132화. < 33. 재앙의 전조(6) >
지원군이 늦게 도착한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불안정한 차원으로 인해 공간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고, 그 때문에 사람들은 지상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런던에 위치해 있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출발한 지원군은 인근에 생성된 게이트로 인해 발이 묶였고, 지원을 요청받은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는 섬나라의 특성상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도착한 런던.
유럽 연합국의 병력을 이끌고 도착한 지휘관 발터 융한스(Walter Junghans)는, 눈앞의 광경에 넋을 잃었다.
“...이럴 수가.”
상황은 들었다.
십수 개의 게이트가 동시다발적으로 생성된 유례없는 재앙이라는 사실은 알았으나, 실제로 보니 이것은 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처참하게 무너진 상태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사방에서는 몬스터와 인간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있으며,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보이는 광경은 한 폭의 지옥도를 보는 것만 같았다.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넋을 잃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멀리서 아득하게 전해져오는 전장의 소리는, 아직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전군 돌격!”
“몬스터들을 몰살시켜라!”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외성을 넘어서자,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몬스터가 보였다.
심연의 악마가 죽은 직후, 게이트의 힘은 점점 약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 하나둘씩 사라졌다.
그래서 더 이상 게이트는 존재하지 않았고, 이미 현세에 나타난 몬스터들은 모두 외성 안에서 내성을 공격하고 있었다. 유럽 연합국은 그들의 후방을 타격했다. 수많은 몬스터와 골렘, 기간트를 내세운 인간들이 뒤얽히며 또 다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그때 새로운 지원군이 도착했다.
게이트의 증발.
그로 인해 차원이 안정되었다.
하늘에서 밝은 불빛이 일어나더니, 하얀 로브를 필력이는 마법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이트 캐슬이다!”
“화이트 캐슬의 마법사들이 도착했어!”
3대 세력 중에서, 화이트 캐슬은 유일하게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헌신하는 집단이다.
그들의 마법이 발현되자, 지상을 까맣게 메우고 있던 몬스터들의 숫자가 눈에 보일 정도로 증발되었다.
“어스 퀘이크.”
“썬더 스톰.”
“블리자드.”
쿠쿠쿵.
쿠르르르르르르릉.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가브리엘 칼데론이 있었다.
가브리엘 칼데론은, 엘리샤의 몸에서 사용했을 때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몬스터에게 절망을 선사했다.
“퓨리 오브 더 헤븐."
콰콰쾅!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몬스터들은 많았다.
수만의 몬스터들이 들끓는 상황이었으나, 마법사들의 특별함은 그 불리함을 이겨내는 힘이 있었다. 몬스터들이 죽어 나갔다. 십수 마리의 기간트가 나타나 몬스터들을 짓밟았고, 마법사들의 마법은 끊임없이 화력을 토해냈다. 순식간에 정리가 되어가는 상황. 지원군들에게도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붉게 충혈된 그들의 눈빛은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자 내성의 성문이 열렸다.
버티고 버티던 그들도, 마침내 반격을 시작했다.
“모두 죽여버려!”
“크아아아아악!”
“죽어!”
악에 받친 사람들.
이제는 정말, 이 지긋지긋한 전투를 끝낼 차례였다.
상황이 정리되었다.
그 많던 몬스터들을 모두 처리했고, 사람들은 결국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사람들은 참담한 심정을 숨길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처음에는 일반인을 포함해서 수만 명의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절반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건물도 대부분 무너져 내렸다. 폐허가 되어버린 건물의 잔재에서,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길이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었다.
“.........아아.”
아비드.
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그의 전부였다.
그런데 아카데미의 사람들이, 그리고 아카데미가 무너졌다고 생각하니 그의 세상이 나락으로 처박혔다.
콰직.
영혼이 뭉개지는 기분이었다.
아비드의 몸이 떨렸다.
슬픔을, 절망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의 옆에, 유럽 연합군의 지휘관인 발터 융한스가 다가와 말했다.
“총장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그 누구도 아비드를 비난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무너졌다.
그러나 그건 아비드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외성을 버리지 못한 그의 심정은 모두가 이해하는 부분이었고, 아비드는 끝까지 저항했으나 상황이 좋지 않았을 뿐이다. 대체 누가 십수 개의 게이트가 동시에 생성되리라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왕실 마법 아카데미라서 이 정도로 버틴 것이지, 다른 곳이었다면 30분도 버티지 못하고 전멸을 당했을 것이다.
“그렇죠. 어쩔 수 없는 결과였겠죠."
아비드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건, 이겨도 이긴 전투가 아니었다.
만약에 엘리샤라도 없었다면, 자신을 비롯한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진즉에 외성을 버렸어야 했다.
자신은 틀렸다.
"저도 지휘관님이 무슨 말을 하시려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게이트 현상이 잦아지고 있는 이때, 성벽 밖에서 축제를 진행한 것은 정말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3년 전에 있었던 그린 드래곤 상황을 겪고서 나름 경계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저는 아직도 이 세상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몰렸는지를 자각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축제 따위.
그게 무엇이라고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단 말인가.
아비드가 감정을 억눌렀다.
지휘관에게는 이만 말하자고 손짓을 하더니, 평정심을 되찾은 표정으로 사람들 앞에 나섰다.
자신은 아카데미의 총장이다.
아무리 힘들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나약해질 수 없다.
“지금부터 사상자를 수습한다.”
복잡해지는 머릿속.
무너져내리는 정신과는 다르게, 그의 얼굴은 기계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시체를 수습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는, 강민혁도 있었다.
‘벤자민 우드 교수.’
익숙한 얼굴.
오우거에게 얻어맞아 기괴하게 비틀린 그의 시체를 끌고 가며, 강민혁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그는 살 수 있었다.
만약 평소처럼 이기적으로 굴었다면, 벤자민 우드는 자신과 같이 생존자로서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장벽에서의 경험은 그를 최전방에 몰아넣었고, 끝까지 싸우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어쩌다가, 그는 죽어야만 했을까.
‘그간 착각하고 있었어.’
사실, 자신도 안일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눈부시게 발전한 2000년의 마법 문명.
이들이 몬스터들과의 공존을 택한 것처럼, 이 세상이 그렇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마법사들은 강했다.
강화 전사들마저 쓰러트리는 그들의 힘이라면, 어떻게든 몬스터들을 물리칠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클리스만의 부탁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목적에 따라서는 많은 일을 벌였지만, 강민혁이 자발적으로 클리스만의 세상을 위해 움직인 경우는 없었다.
강화 문명과는 달랐다.
그곳에서 강민혁은 세력을 형성하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이곳은 안전하다고 믿었다.
착각이었다.
생각해보면 아주 간단한 문제다.
클리스만은 힘이 있다.
이 세상도 경악시킬 만한 힘이 있는 클리스만이 , 대체 왜 문명이 뒤떨어지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일까?
본인의 힘으로도 불가능한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클리스만은 절망했고, 새로운 희망이 필요했다.
그렇게 선택받은 강민혁은, 잠시 클리스만이 어떠한 생각으로 살아왔는지를 간과하고 말았다.
‘이 세상도 똑같아.’
인류는 위기를 맞이했다.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당장은 아니겠지라는 안일한 마음가짐은, 오늘과 똑같은 사건을 낳을 것이다.
“씨발.”
욕이 나왔다.
참, 거지 같았다.
시체들은 정말 많았다.
벤자민 우드가 아니더라도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관중석에서 자신에게 찬사를 보내던 사람들. 그들이 싸늘한 시체가 되었다. 그나마 깨끗하게 죽은 사람들은 시체라도 보존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대부분의 시체는 몬스터들에게 갈기갈기 찢겨서 정상인 것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감정을 억눌렀다.
슬픔을.
분노를.
절망을.
꾸역꾸역, 안으로 밀어 넣었다.
클리스만은 엘리샤를 통해 재앙을 막아내려고 했다.
그것이 정확한 그의 목적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재앙을 막아내는 방식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이건 막아낸 게 아니다.
고로.
‘이제부터는 내 방식대로 움직이겠어.’
강민혁의 내부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클리스만.
그가 진정으로 자신의 도움을 바란다면, 앞으로 클리스만의 삶은 많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세상이 충격에 빠졌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어떤 곳인가?
마법사들의 미래.
미래의 대마법사를 육성하는 고등 교육기관으로서, 사람들에게 그곳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무너졌다.
그것도 처참하게.
사진과 영상으로 전해지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풍경에, 사람들은 절망과 분노를 표출했다.
["십수 개의 게이트가 생성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나, 앞으로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건 재앙의 전조입니다. 무려 왕실 마법 아카데미나 되는 곳이 몬스터들에게 당했다면, 이 세상에 안전한 장소는 없습니다. 인류는 장벽을 세우고 2000년 동안 그 안에서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세상을 위협하는 몬스터들은 장벽 너머에서 무섭게 세력을 부풀리고 있었지만, 멍청한 우리들은 이리 살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인류의 전부를 걸고서라도 그들을 무너트려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언제고 우리는 장벽에서 넘어온 몬스터들에게 삶의 터전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TV 너머.
사람들에게 얼굴이 익히 알려진 인물이,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현실의 위험성을 피력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사건은 기폭제가 되었다.
사람들이 일어났다.
전쟁.
그들이 전쟁을 주장했다.
그만큼 아카데미의 상징성은 컸고, 언제 게이트가 생성될지 불안에 떨 바에는 먼저 공격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건 예민한 문제였다.
장벽 너머.
그곳은 지옥이다.
아직은 조율되지 않는 의견으로 떠들썩 한 그때, 사람들은 한 사람의 이름을 거론했다.
바로 화이트 매지션.
가브리엘 칼데론이 사람들의 찬양을 받았다.
화이트 캐슬의 수장으로서 이미 세계 최고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사나이였지만, 그의 힘이 제대로 발휘된 것은 오랜만이었다. 사람들은 다시금 가브리엘 칼데론의 위력을 목격하였다. 엘리샤를 통해 발현된 힘은 심연의 악마를 무찔렀고, 지옥에 직접 강림해서 상황을 완전히 정리했다.
화이트 캐슬.
그들이야말로 신의 사자(使者)였다.
같은 3대 세력인 블랙캣과 그레이 로브는 움직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은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런데 웃기게도, 가브리엘 칼데론만큼이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사건이 발발하고.
졸업 발표회를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챙긴 사람들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뜨문뜨문 주변의 상황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건 본능이었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사용하고, 디펜더들이 방패를 드는 것처럼. 한평생 카메라를 들고 살았던 사람들은, 죽기 직전까지도 촬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조각조각 난 영상들.
그 영상들이 합쳐졌다.
그리고, 한 사람을 중심으로 구성된 영상이 사람들에게 퍼졌다.
그러자.
‘클리스만.’
그 이름이,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