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131화 (131/197)

131화.  < 33. 재앙의 전조(5) >

화이트 매지션.

혹은 백의(白衣)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사나이.

사람들이 세계 최고의 마법사를 선정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마법사가 바로 그였다.

세계 3대 세력.

화이트 캐슬, 블랙캣, 그레이 로브의 수장들은 모두 8서클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지만, 그중에서도 화이트 매지션 가브리엘 칼데론 (Gabriel Calderon)은 가장 특별했다. 같은 선상에서 거론되는 마법사들보다 십수 년은 먼저 8서클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세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신의 경지라고 불리는 9서클의 단계를 넘보고 있다고 했다.

클리스만의 세상.

찬란하게 꽃피운 2000년의 마법 역사에서, 가브리엘 칼데론은 가장 정점에 위치한 마법사였다.

확-

마나가 진동했다.

엘리샤, 아니 가브리엘 칼데론의 힘이 주변에 퍼져나갔다.

아바타 마법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화이트 캐슬의 방식이었다. 강한 연결고리를 통해 전달된 가브리엘 칼데론의 힘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 일부를 구현해낼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성벽 안에 침투한 대부분의 몬스터를 소멸시킨 가브리엘 칼데론은, 날개를 활짝 펼쳐서 날아오르더니 또 다른 마법을 사용했다.

“블레이즈 템페스트(Blaze Tempest).”

화륵.

화르르르르르르륵!

불길의 폭풍이 일었다.

그건 재앙이었다.

키에에엑!

캬아악!

몬스터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A급 몬스터들조차 한낱 몬스터1로 만들어버리는 위력이었고,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강력하게 피어 오르는 불길의 폭풍이 몬스터들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단단한 A급 몬스터의 피부? 그딴 건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보통은 서클이 상승할 때마다 상식 안에서의 성장이 이루어지는데, 7서클과 8서클의 차이는 아예 다르다.

천외.

괜히 그런 단어가 붙는 것이 아니다.

8서클은 인간에게 허락된 신의 힘이었고, 7서클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위력이 휘몰아쳤다.

화륵.

화르르르륵.

수천의 몬스터가 불길에 사라졌다.

십수 개의 게이트에서 쏟아내는 몬스터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이건 눈에 보일 정도의 결과였다. 그러나 가브리엘 칼데론의 반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바타 마법을 통해서는 많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의식의 연결이라는 변칙적인 방법을 활용했다.

바로 아공간.

그것은 공간의 제약을 초월한 힘이었고, 가브리엘 칼데론의 의식이 본체와 통한 아공간을 열었다.

“나오너라, 나의 아이들이여.”

파스스-

콰콰콰콰콰콱!

연기를 뿜어내며 나타난 기간트들이, 땅에 착지하자마자 몬스터들을 그대로 휩쓸어버렸다.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몬스터들. 그런데 기간트의 숫자는 한 둘이 아니었다. 가브리엘 칼데론이 소환한 기간트는 무려 10마리에 달했고, 그 많은 기간트를 가브리엘 칼데론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

초월적인 정신.

8서클의 경지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하얗게 빛나는 엘리샤의 눈빛이 전장을 향하자, 기간트 무리가 하늘을 날아 그곳을 박살내버렸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사람들이 넋을 잃었다.

가브리엘 칼데론의 전투는 현실적이지 않았다.

혼자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인 것처럼, 그는 혼자만의 힘으로 불리한 전세를 역전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가브리엘 칼데론의 판단은 달랐다.

급격하게 소모되는 엘리샤의 체력에, 가브리엘 칼데론의 음성이 사람들의 귀에 꽂혔다.

[내가 시간을 버는 사이에 모두 내성으로 도망쳐라.]

외성은 끝났다.

성벽이 무너진 이곳에서 버티는 것은, 숭고한 희생이 아니라 자살행위일 뿐.

가브리엘 칼데론은 내성으로 피신할 것을 명령했지만,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사람들은 망설였다.

내성과 외성.

그렇게 내부를 구분해놓았지만, 사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모든 것은 내성 밖에 있다. 교육 시설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들. 외성 안의 시설이 무너지는 것은 아카데미의 몰락을 뜻한다. 그래서 아비드는 내성으로의 피신을 지시하지 않았고, 외성에서 최후의 항전을 명령하였다. 그렇기에 사람들로서는 가브리엘 칼데론의 명령을 선뜻 따를 수 없었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왕실 마법 아카데미를 끝까지 지켜내고 싶었으나, 그들에게 자부심을 지킬 수 있는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더 이상 멍청한 선택을 하지 마라.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붕괴보다, 일단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이 이를 악물었다.

맞는 말이다.

이곳에서 죽는 것은 개죽임을 터.

사람들이 몸을 추스르고 자리를 떠났다.

아비드도, 피눈물을 흘리면서 결국 내성으로 향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 골렘 병사들은 자리를 지켰지만, 인간들은 빠르게 내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홀로 남은 가브리엘 칼데론.

그가,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네 녀석은 처리하고 가야겠지.”

심연의 악마.

그 괴물을 향해, 가브리엘 칼데론이 마나를 일으켰다.

가브리엘 칼데론은 도망치지 않았다.

심연의 악마.

그를 물리쳐야만, 이 재앙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키키키킥-

심연의 악마가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직 도망치지 않은 강민혁은 클리스만이 자신에게 전달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로브를 펄럭이며 마법을 사용하는 선택받은 자들의 모습은 내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도 새로운 길이 생겼다. 나는 수호문의 심법을 통해 강해질 것이고, 심연의 악마들을 모조리 몰살할 것이다.]

처음 수호문의 힘을 알려주었을 때 말했던 내용.

그리고.

[.......장벽 너머에서 언제고 ‘심연의 악마’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건 너에게도 값진 경험이 될 거라 장담한다. 심연의 악마는, 이 세상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너의 세상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재앙일 테니까.]

장벽 너머로 향했을 때 말했던 내용.

사실 강민혁은 아직 심연의 악마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일반적인 몬스터를 칭하는 단어와는 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클리스만이 목격한 재앙은 사람들이 아는 것과는 달랐다. 인간의 형태를 한 검은 힘. 그들이야말로 재앙의 실체였다. 저런 것이 장벽 너머에 존재하고 있다면, 2000년의 세월 동안 공존을 택한 인간들의 선택은 정말 멍청한 것이었다.

지적 생명체.

그들이 힘을 가지고도 인간을 몰락시키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다.

재미를 위해서거나.

아니면, 힘을 축적하기 위해서.

심연의 악마가 일으키는 강력한 힘에, 가브리엘 칼데론이 정면에서 맞받아쳤다.

콰앙-!

콰콰콰쾅!

인간의 전투가 아니었다.

가브리엘 칼데론의 마법이 천지를 뒤흔들었고, 5마리의 기간트는 동시에 심연의 악마를 공격했다. 심연의 악마가 뒤로 물러났다. 성벽을 붕괴시켰던 힘은 다행히도 자주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연의 악마도 체력적인 소모가 있었던 모양인지, 가브리엘 칼데론의 맹공에 밀렸다.

콰콰콱!

쿠르르르르릉.

그런데도 심연의 악마의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

그로부터 비롯되는 어둠의 마나가 가브리엘 칼데론를 공격했고, 섀도우 로드들이 그림자에서 나타나 가브리엘 칼데론을 덮쳤다. 만약 가브리엘 칼데론의 주변에 5마리의 기간트가 버티고 있지 않았다면, 심연의 악마와 승부를 내기도 전에 가브리엘 칼데론의 몸은 난도질이 되었을 것이다.

신계의 전투.

강민혁은 바닥에 찍힌 점처럼, 하늘 위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간 자신이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마법이 마법 문명에서도 통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했었다.

힘은 상대적인 것이다.

6서클이 한계인 세상에서, 강민혁은 대마법사라 불릴 자격이 있다.

그러나 2000년의 마법 문명이 꽃을 피운 이곳에서는, 강민혁은 아직 그 끝을 보지 못했다.

가브리엘 칼데론.

마법 문명의 정점.

강덕철의 힘이라면 8서클에 버금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가브리엘 칼데론은 같은 8서클 마법사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이지만, 그러한 사실을 고려할지라도 그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강화 문명에서도, 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퍼엉!

화륵, 화르르르르륵!

키에에엑!

심연의 악마가 비명을 질렀다. 몸이 불타오르자 그가 발악했고, 그때 기간트 5마리가 달려들어 심연의 악마의 사지를 찢어발겼다. 마침내 재앙의 원인이 제거되는 순간이었다. 가브리엘 칼데론은 희미하게 웃어 보이더니, 그대로 초점을 잃어버리고는 땅바닥으로 추락해 버렸다.

아바타 해제.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바람에, 더 이상 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자.

확!

와락!

강민혁이 추락하는 엘리샤를 낚아챘다.

모두 도망치는 데도 끝까지 남은 이유.

그것은 바로 지금의 상황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크르르르륵.

크아아악!

몬스터들이 분노했다.

심연의 악마가 죽었다는 것에 그들이 광분하며, 더욱 난폭한 기세로 외성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따라잡히면 죽는다.

다행히도, 알맞은 타이밍에 가동 장치에서 마나가 일었다.

'R-1 장착.’

화악-

철컥, 철컥철컥!

몸을 감싸는 골렘 슈트.

개방의 후유증으로 한계에 도달했던 몸이 활력을 되찾는 순간, 강민혁은 곧바로 땅을 박찼다.

R-1의 힘은 폭발적이었다.

따라붙는 몬스터를 베어버리며 빠르게 내성으로 향했고, 간발의 차이로 내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엘리샤!”

엘리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마나의 소멸.

그녀가 가쁜 숨을 내뱉었다.

6서클의 육체로 가브리엘 칼데론의 힘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바람에, 그녀는 그간 모았던 마나가 모두 증발되었다.

‘제길.’

가브리엘 칼데론은 무책임한 사람이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 엘리샤의 몸에 강림했지만, 사실 그건 다수를 위해 개인을 희생시킨 선택이었다. 가브리엘 칼데론은 엘리샤라는 인간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마나를 잃으면 그녀의 삶이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아니, 그러한 사실을 떠나서 애초에 아바타가 끊기는 순간 엘리샤는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엘리샤는 희생 당했다.

그녀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선택한 것이겠지만, 강민혁으로서는 지금의 상황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녀를 초대하는 바람에 이렇게 됐어.’

엘리샤.

끝까지, 자신과의 관계를 놓지 않았던 사람.

클리스만의 태도에 화가 났었는데도, 그녀는 강민혁이 초대한다는 말 한마디에 못 이기는 척 따랐다.

그것의 결과가 이것이다.

엘리샤는 클리스만이 안배한 퍼즐이었고, 그녀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지만 엘리샤의 상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녀의 삶은 이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천재라고 불리며 화이트 캐슬에 입성했던 그녀가, 마법사로서의 삶이 끊어지고 말았다.

강민혁은 황급히 엘리샤를 치료했다.

수호 심법

선천(先天)의 힘을 끌어올려, 엘리샤의 생명줄을 붙잡았다.

다행히 엘리샤의 호흡이 진정되었다.

강민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지만, 그래도 착잡한 심정은 숨길 수 없었다.

“미안해.”

더 할 말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감상에 빠질 시간도 없었다.

엘리샤의 희생을 통해 얻은 기회.

아직 재앙은 끝나지 않았고, 희생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살려야만 한다.

꽈악.

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성벽 위로 향했다.

그때부터는 다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몬스터들은 아까처럼 성벽을 무너트리고 들어오는 방법은 사용할 수 없었지만, 그 숫자가 많아서 성벽 위는 금방 몬스터들로 들끓었다. 마법사들의 마법은 어느새 한계에 도달했다. 서클의 마나를 쥐어짜는 바람에 마법사들은 코에서 코피가 터져 나왔고, 몇몇은 픽픽 쓰러지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마나가 떨어진 마법사들은 무기를 쥐고 앞으로 나섰고, 곱디고운 손으로 몬스터의 머리에 무기를 찔러넣었다.

캉-

당연히 통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살기 위해서.

내성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발악했다.

지옥 같은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동안, 그들은 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중심.

그곳에는 강민혁이 있었다.

R-1을 착용한 강민혁이 성벽 위를 활보하며, 악착같이 달려드는 몬스터들의 머리를 우수수 베어버렸다.

처절한 싸움이 지속되었다.

얼마나 오래 싸웠는지도 모르겠다.

입이 바짝 말랐고, 몬스터의 마나를 빨아들이는 효과가 아니었다면 강민혁도 진즉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노을이 드리울 때, 내성의 사람들은 한계에 도달했다.

이젠 정말 끝이다.

몬스터들이 내성 벽을 넘어 안으로 쏟아지는 그 순간, 그들이 그토록 바라왔던 소리가 들렸다.

“지원군이 도착했다!”

지원군.

드디어, 길고 길었던 재앙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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