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 33. 재앙의 전조(4) >
인간의 몸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몸은 망가지고 마는데, 개방은 일시적으로 그러한 경계선을 무너트린다.
한계를 넘어선 힘.
단전에서부터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힘이, 전신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확!
퍼억-
앞에 있던 리자드맨들의 머리가 줄줄이 부서져나갔다. 몬스터의 반응 속도로도 강민혁의 움직임을 예상할 수 없었고, 강민혁은 사방에서 들끓는 몬스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순간 타오르는 오라. 무려 3M에 버금가는 거대한 크기의 오라가, 공간 자체를 그대로 갈라 버렸다.
서걱-
‘결(快).’
공간이 일그러졌다.
몬스터들의 몸이 비스듬히 미끄러지더니, 사지가 바닥을 나뒹굴며 붉은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푸화아아악!
크에엑!
몬스터들이 괴성을 질렀다.
자연스럽게 발휘되는 수호 검법의 효과에, 수천 마리의 몬스터가 일제히 강민혁에게 적의를 표출하였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몬스터들. 검이 번뜩일 때마다 같은 몬스터가 죽어 나가는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우르르 몰려드는 검은 물결을 향해, 강민혁도 서슴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캬아악!
서걱!
쩍 벌어지는 아가리 채로 머리가 날아갔다. A급 몬스터의 단단한 외피 따위는 ‘개방’을 사용한 강민혁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활활 타오르는 검은 무적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한 마리를 베어버리면 그 뒤에는 새로운 몬스터가, 그리고 그 몬스터를 처리하면 사방에서 또 다른 몬스터가 덮쳤다.
난전이었다.
성벽 위에서는 작게만 보이는 인간 하나가, 수천의 몬스터와 뒤엉키며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푸확!
강민혁의 얼굴이 피로 흠뻑 물들었다. 그중 한 방울이 눈에 튀었지만, 강민혁은 피로 뻘겋게 물들어가는 눈빛으로 몬스터를 직시했다.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것. 그것은 전투의 기본이다. 우악스럽게 몬스터의 사지를 갈라내는 순간, 초감각으로 발달된 감각이 적의 공격을 포착했다.
카앙-
카카카캉!
섀도우 로드의 공격이었다. 그림자에서 솟아오른 가시가 급소를 공략하자, 강민혁은 방어 초식을 펼치며 그것을 모두 막아냈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기간트마저 쓰러트린 섀도우 로드의 공격은 위력적이었지만, 수호 검법은 방어에 특화된 검법. 에픽급 몬스터의 공격에도 강민혁은 무너지지 않았다.
개방.
단전이 타들어갔다.
잠시 한계를 벗어난 힘을 보여주는 대가로, 강민혁의 생명력은 빠르게 닳았다.
‘오래 사용할 수 없어.’
개방은 위험한 힘이다.
리스크가 있기에, 강덕철도 정말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사용하지 않았었다.
사실 개방의 리스크는 자신이 아니라 클리스만이 감당하게 될 문제다. 그러나, 강민혁은 클리스만이 자신의 선택을 원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전투를 치르는 내내 의문이었다. 클리스만은 재앙을 예고했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기억을 보여주었다. 그는 분명히 자신에게 이번 사건을 통해 원하는 것이 있다.
클리스만과 자신의 관계에 우연이란 없다.
모든 것은 필연(必然)의 연속이고, 그러한 사실을 알기에 개방을 사용함에 있어 망설임이 없었다.
성벽 위.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클리스만을 도와야 합니다!”
“빨리 마법을!”
그들은 경악했다.
클리스만.
강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홀로 몬스터의 물결을 막아내고 있는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강민혁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몬스터를 베어냈고, 수호 검법의 효과에 몬스터들은 강민혁의 뒤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덕분에 시간을 확보한 마법사들이, 강민혁의 너머로 마법을 사용하였다. 강렬하게 터지는 폭발. 사지의 한복판에서, 강민혁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성벽이 되었다.
캉!
카카캉!
시야가 뒤얽혔다.
눈을 가만히 둘 수 없을 정도로, 사방에서도 수도 없이 날카로운 공격이 목숨을 노렸다. 아무리 베어도 끝이 없었고, 개방의 힘으로 들끓는 단전은 역한 기운을 올려보냈다. 아버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로서는 못났을지 몰라도, 그는 수호문의 문주로서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나도 할 수 있어.’
믿었다.
자신의 힘을.
후계자로서 쌓았던 세월의 경험이 무섭게 살아나며, 강민혁은 이 세상에서 수호 검법을 증명했다.
서걱-
또 다시 공간을 가르는 그때.
성벽 위에서 지휘관의 기쁨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성공했어.”
화아아악-
성벽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법사들이 강민혁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서 마법을 일제히 사용했다. 그 강력한 충격에 몬스터들이 뒤로 물러나는 사이, 강민혁은 빠르게 성벽을 타고 몸을 날렸다.
재생되는 성벽.
희망이 살아났다.
성벽은 무너져 내렸으나, 강민혁의 희생으로 인해 실낱같은 희망을 살릴 수 있었다.
그 순간.
콰콰콰쾅!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심연의 악마가 불길을 뿜어냈다.
강민혁의 노력이 무색해질 정도로, 방금까지도 단단하게 버티던 다른 쪽 성벽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끝났다
개방의 힘이 끊겼다.
강민혁으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
무너진 성벽을 통해, 검은 물결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전장이 혼란에 빠졌다.
성벽의 붕괴.
수성의 이점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제는 성벽을 복구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안으로 들이닥치는 모습에 골렘 병사들이 나섰다.
콰앙!
빠직!
골렘 병사들과 몬스터들이 뒤엉켰다. 골렘 병사들이 몬스터의 심장에 창을 박아넣으면, 몬스터들은 날카로운 이빨로 그대로 골렘 병사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 생명력의 원천이 파괴된 골렘 병사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스파크가 튀면서 그대로 무너졌다.
“물러서지 마!”
“끝까지 투쟁해라!”
높은 직급의 마법사들이 악에 받쳐 소리쳤다.
그중에는 벤자민 우드도 있었다.
벤자민 우드는 마나를 일으키더니, 바로 코앞에까지 다가온 몬스터들을 향해 마법을 작렬시켰다.
“라이트닝 블레이드(Lightning Blade).”
치지지직!
파바박!
웨어 울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간발의 차이로 웨어 울프의 공격이 빗나갔고, 벤자민 우드는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장벽. 그곳에서 벤자민 우드는 수많은 위기를 경험했다. 강민혁이 상대했던 도미닉 그린이 근접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그는 강력한 한 방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각인 마법.
파랗게 일어나는 마나가, 주변을 휩쓸었다.
“에너지 써클(Energy Circle).”
콰콰쾅!
파파파파파파박!
대단한 위력이었다.
벤자민 우드는 어떻게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는지를 무력으로 증명했지만, 문제는 그런데도 몬스터가 끊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십수 개의 게이트에서 밀려드는 몬스터다. 수십, 수백 마리를 죽인다고 해서 그건 티도 나지 않았다. 벤자민 우드와 마찬가지로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마법사들은 성벽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뛰어난 전투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은 그뿐이었다.
결투 대회.
마법사들은 1대1 대결에서도 강했다.
난전이라 할지라도, 전투가 능숙한 마법사들의 경우에는 강화 전사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상대가 1명이 아니라면?
마법을 끊임없이 사용할 수 없는 마법사들에게는 한계가 있다.
강력한 위력의 마법이 한 번에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소멸시키는 대단한 일이 가능할지는 몰라도, 그 마법이 끊기는 순간 마법사는 연약한 인간으로 전락해버린다. 그것이 바로 강화 전사와 마법사의 차이였다. 그래서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사람들은 성벽을 끝까지 지키려고 했었던 것인데, 성벽이 뚫려버리는 순간부터는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콰득!
“끄아아아악!”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항은 격렬했으나, 백 마리의 몬스터를 처리하고도 백 한 마리를 어찌하지 못해 죽어야만 했다.
벤자민 우드가 이를 악물었다.
장벽을 떠나며.
그는 다시는 이런 광경을 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게이트라는 재앙이 닥치지 않은 상태였고, 무리하게 장벽으로만 가지 않는다면 그곳에서의 지옥을 경험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건 안일한 생각이었다. 장벽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을 외면한다고 해서, 이 세상이 안전하다는 크나큰 착각을 하고 말았다.
‘우리가 정말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구나.’
2000년.
그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인간은 몬스터와의 공존이 아니라 그들과 어떻게든 결판을 봐야만 했다.
지금의 상황.
게이트는 인간들의 안주가 만들어낸 형벌이었다.
꾸역꾸역 밀려드는 몬스터에, 벤자민 우드는 발악하듯 각인 마법을 모두 발현시켰다.
“기가 라이트닝."
파바박!
콰콰콰콰콰콰쾅!
번개 다발이 주변에 작렬했다.
과도한 마법으로 인해 코에서는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벤자민 우드는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마법사들의 성지(聖地)고, 이곳을 함락당할 바에는 죽는 것이 낫다. 강민혁의 대단한 배경에도 졸업장을 내주지 않으려던 벤자민 우드. 그러한 이면에는, 이기적인 그의 성향과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파지지직-
몬스터가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로 나타난 오우거의 공격에, 벤자민 우드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퍽!
콰득.
벤자민 우드의 몸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기괴하게 틀어진 육체에, 아직은 정신이 남아 있는 벤자민 우드가 입에서 피거품을 물었다.
“...끄르륵.”
벤자민 우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시야의 끝.
그곳에는, 강민혁이 있었다.
현실감이 살아났다.
잠시 잊고 있었다.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라는 사실을.
오늘 자신과 많은 일이 있었던 벤자민 우드가, 저렇듯 죽어 나갈 수도 있는 게 인간의 비참한 현실이다.
“이런 개새끼들이.”
타닥.
강민혁이 땅을 박찼다.
방금 벤자민 우드를 공격한 오우거를 공격했다. 정말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오우거의 외피가 갈라지면서 쓰러트렸지만, 그렇다고 벤자민 우드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벤자민 우드는 눈을 감았다. 다급하게 의료 마법을 사용하려던 강민혁은, 멈추어버린 맥박에 이가 부서지도록 악물었다.
빠득.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체 왜.
클리스만은 이따위로 밖에 자신에게 경고하지 못했을까.
그는 분명히 재앙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보다 자세하게, 어떤 재앙이 닥칠지를 말해주었다면 미리 대비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화가 났다.
자신에게도, 그리고 클리스만에게도.
그가 정말 이 세상의 재앙을 막길 원한다면, 적어도 오늘과도 같은 상황은 막았어야만 했다.
그때였다.
강민혁의 시야에,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엘리샤를 지켜!”
“아바타(avatar) 마법이 성공할 때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해.”
수많은 사람들의 중심 .
그곳에서 엘리샤가 하얀 불빛에 휩싸여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항상 붉은 화염의 중심에서 마법을 쏟아내는 모습과는 달리, 그녀의 모습은 성스러운 기운이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화이트 캐슬의 권능.’
마법의 정점.
화이트 캐슬의 마법사들은 특별하다.
대부분 7서클 이상의 대마법사들이고, 그들의 마법은 천재지변처럼 일반 마법사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의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그들의 수장인 화이트 매지션(White magician)은 알려진 경지만 해도 8서클. 그는 정점에 오른 마법사들의 머리이자, 화이트 캐슬의 멤버들을 대상으로 아주 특별한 권능을 발휘할 수 있다 들었다.
바로 아바타.
엘리샤는 상황 직후, 곧바로 화이트 캐슬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주변 국가가 도와주지 못하는 것처럼, 공간의 균열로 인해서 차원 이동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화이트 캐슬의 힘을 받아들인 마법사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화이트 매지션의 힘을 빌릴 수 있다.
그걸 아바타라고 부른다.
엘리샤는 본인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아바타를 사용했다.
“...엘리샤.”
입이 바짝 말랐다.
탁한 목소리가, 엘리샤의 이름을 불렀다.
엘리샤의 초대.
강민혁은 그녀의 존재가, 자신이 골렘 제작법을 밝히는 상황에서 이목을 집중시키는 역할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재앙을 예상한 클리스만.
그는 엘리샤가 졸업 발표회에 참여하길 바랐다.
우연일까?
아니다.
그는, 엘리샤에게서 다른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게 엘리샤 자체인지, 아니면 화이트 매지션의 힘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엘리샤는 클리스만이 의도한 퍼즐이었다.
그녀가 눈을 뜨자, 강렬한 안광이 주변에 퍼져나갔다.
팟.
“모두 비켜라.”
묵직한 중저음.
엘리샤를 지키던 사람들이 황급히 물러서자, 엘리샤의 몸에서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강력한 마나가 표출되었다.
“퓨리 오브 더 헤븐(Fury Of The Heaven)."
하늘의 분노.
세상이 번쩍였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릉.
강민혁이 눈을 부릅떴다.
8서클 마법.
이 세상에서도 천외(天外)의 마법이라고 불리는 것이 사용되자, 성벽 안을 가득 메우던 몬스터들이 그대로 증발되었다.
'.........!'
이제야 알았다.
클리스만은 화이트 매지션.
이 사람이야말로, 재앙을 해결해줄 구원자라고 믿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