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33. 재앙의 전조(3) >
믿기지 않았다.
십수 개의 게이트.
최초의 재앙으로부터 인류는 수많은 위기를 겪었지만, 이런 압도적인 광경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저게 대체.........."
“아아.”
“우, 우린 끝났어.”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마법을 사용하던 그들이, 사방에서 생성되는 게이트에 공포에 잠식되고 말았다. 문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공포였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도 칠흑 같은 게이트가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고, 그곳으로부터 악마의 자식들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크르르르륵!
캬아아악!
숫자를 셀 수 없었다.
뭉텅이로 우르르 몰려오는 모습은 최소 수만 이상의 단위를 추정하게 만들었고, 성벽 위의 사람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아비드를 보았다. 지금은 중심을 잡아줄 지휘관이 필요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누군가는 그들에게 희망의 길을 열어주기를 바랐다.
아비드가 이를 악물었다.
그 또한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가에 핏줄이 섰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인류의 희망이다. 우리가 무너져서는 안 돼.’
마법 아카데미의 상징성.
미래의 대마법사를 배출하는 교육기관인 이곳은, 인류의 자부심이자 희망이다. 그런데 만약 마법사들의 축제가 벌어지는 와중에 아카데미가 무너진다면? 인류는 절망에 빠질 것이다. 단순히 한 교육기관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아비드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곳은 단 한 번도 적들에게 함락되지 않은 철옹성이다. 그러니 나를 믿고 끝까지 싸워라.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시련도 과거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화악-
마나를 일으켰다.
지금은 강력한 임팩트가 필요한 상황.
2개의 마법을 동시에 캐스팅하면서, 전신에 각인되어 있는 3개의 각인 마법을 활성화시켰다.
“썬더 스톰!”
쿠르르르르르르르릉!
마법의 중첩.
똑같은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자,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작렬하는 번개. 그것은 자연의 분노였다. 빛이 번쩍일 때마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번개가 몬스터들을 소멸시켰다.
콰앙!
콰콰콰콰쾅!
뭉텅이로 몰려오던 몬스터 무리가 증발했다. 그런데도 몬스터들은 끊임없이 밀려왔지만, 세차게 내리치는 번개로 적들이 줄어드는 모습에 사람들이 안색을 되찾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들도 황급히 다시 마법을 사용하였고, 성벽 위에 설치된 병기에서도 수천 발의 화살이 하늘을 날았다.
파바바바바바박!
화살의 비.
몬스터들이 픽픽 쓰러졌다.
몬스터들의 숫자는 정말 많았지만, 다행히도 그들 중에 초월급 이상의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기간트다!”
“드디어 기간트가 도착했어!”
쿠르르르르.
기간트가 아공간을 뚫고 등장했다.
마법 문명의 결정체가 땅바닥에 떨어지자, 엄청난 충격이 일어나며 주변에 있던 몬스터들이 휩쓸렸다. 그런데 기간트의 숫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아비드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비밀리에 보유하고 있었던 기간트를 포함해서 5대의 기간트를 동원하였고, 이 자리에는 마법 세력의 수장급들이 보유한 기간트도 있었다. 총 8대의 기간트. 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며 전장을 휩쓸어버리는 모습은, 이번 전투가 마냥 절망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무려 8대다.
1~2대만 있어도 에픽급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 기간트인데, 이곳에는 웬만한 국가의 힘을 넘어서는 힘이 집중되어 있었다.
쾅!
콰콰콰쾅!
기간트가 전장을 점령했다.
거기에 더불어 폭발하는 마법은, 십수 개의 게이트로부터 비롯되는 절망이 사라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그건 순간의 희망이었다.
기간트는 강력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적의 병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화악!
파바바바박!
기간트의 그림자.
그곳에서 수십 줄기의 가시가 솟아오르더니, 그대로 기간트의 몸을 관통하였다. 가시의 주체는 하나가 아니었다. 무려 네 군데에서 집중된 공격에, 기간트의 몸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서, 설마.”
아비드가 비명을 지르듯이 외쳤다.
그림자 공격.
에픽급 몬스터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다고 알려진, 섀도우 로드(shadow Lord)의 공격과 같았다.
에픽급 몬스터는 없던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고, 지능을 가진 그들이 협력해서 동시에 기간트를 공격했다.
얼추 추정되는 숫자만 네 마리.
쿵!
쿠르릉.
기간트가 쓰러진 자리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희망을 가져서였을까?
진동하는 땅의 울림만큼이나, 덜컥 내려앉은 사람들의 가슴에는 이제 절망이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에픽급 몬스터들은 서로 협력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이렇게 게이트가 동시에 생생되는 경우도 거의 없다.
“...세상에 재앙이 닥쳤구나.”
기간트를 하나 쓰러트린 섀도우 로드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섀도우 로드의 존재를 알았기 때문에 처음처럼 쉽게 당해주지는 않았다.
“파이어 스톰.”
콰앙!
화르르르르르르르륵!
일단 7서클 마법사들이 일제히 화염의 마법을 사용했다. 소멸(燒減)의 힘은 그림자를 약하게 만드는데, 불길이 치솟아 오르자 섀도우 로드들도 마음 놓고 활개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사이에 기간트를 통해 공격하게 만들었다. 기간트의 합동 공격에 섀도우 로드 하나가 비명을 지르며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나갔지만, 그러는 사이에 섀도우 로드도 틈을 노출한 기간트를 공략했다.
푹!
파바바박!
기간트의 몸에 수십 개의 구멍이 생겼다.
원동력인 마나석이 박살이 나버렸고, 비틀거리는 기간트가 쓰러지는 순간 정신적으로 연결된 마법사들도 피를 토하며 뒤로 넘어갔다. 2마리의 기간트가 당해버린 상황. 아직도 6대의 기간트가 남아 있었지만, 남아 있는 적의 규모를 생각하면 마냥 희망적이지만은 않았다.
불길이 일었다.
마법사들의 저항은 격렬했으나, 에픽급 몬스터를 내세운 몬스터들의 공격은 어느새 성벽에 들이닥쳤다.
쾅!
콰르르르릉.
성벽이 흔들렸다.
강화 마법 덕분에 성벽이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성벽을 타고 올라서는 몬스터들로 인해서 사람들의 얼굴에 공포가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은 무너질 때가 아니다. 성벽에는 각종 수성 병기가 설치되어 있었고, 미리 대기시켜둔 골렘 병사들이 쥐고 있는 창으로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퍽!
빠직!
골렘 병사의 힘은 인간의 것과는 달랐다.
단번에 몬스터의 머리를 박살내버렸고, 그대로 추락한 몬스터가 바닥에 떨어지며 곤죽이 되어버렸다.
공방을 주고받는 상황.
아비드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아까부터, 알 수 없는 불길함이 그를 사로잡았다.
‘심연(深滿)의 너머에 무언가가 있어.’
게이트 너머.
그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아비드는 점점 압박되는 숨통에 마나를 끌어 올렸고, 그의 시선은 심연 안의 존재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감은 옳았다.
그 안에.
심연에는 악마가 있었다.
거대한 인간 형태의 어둠으로 둘러싸인 괴물이 바깥에 모습을 드러내자, 몬스터들이 일제히 괴성을 질렀다.
캬아아악!
크라라락!
몬스터들이 날뛰었다.
심연의 악마를 떠 받들 듯이, 그들은 성벽에 목숨을 던짐으로써 본인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였다. 성벽이 뒤흔들렸다. 단단한 외성에서 돌조각들이 바닥에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심연의 악마는 칠흑같이 어두운 마나를 일으켰고, 그것은 불길로 화해 그대로 성벽에 작렬했다.
콰콰쾅!
쿠르르르르릉.
그건 악마의 힘이었다.
강력한 일격에 강화 마법진이 모두 파괴되었고, 성벽 일부가 그대로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수성의 이점을 상실했다.
심연의 악마가 만들어낸 틈을 통해, 수많은 몬스터들이 해일처럼 밀려 들어왔다.
그러자, 아비드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레드 드래곤 상황을 선포해!”
작전명 레드 드래곤.
그것은 최후의 항전을 뜻한다.
아비드는 지금 이 순간, 이곳이 자신의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성벽의 붕괴.
무너진 성벽으로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모습에, 기간트 하나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콰앙-!
기간트의 일격에 몬스터들의 육체가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아직은 뚫리지 않았다. 절망적이지만 성벽만 뚫리지 않으면 희망은 있기에, 해당 구역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인물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모두 이곳으로 병력을 보내! 절대 뚫려서는 안 돼!”
그건 발악이었다.
성벽에는 복구 마법이 내장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면 성벽을 원상태로 복구할 수 있기에, 기간트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캬악!
카카카칵!
문제는 섀도우 로드였다.
그들이 인간의 의도를 알았다는 듯이, 그림자 밖으로 튀어나와서 그대로 기간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기간트의 몸에 그림자가 칭칭 감겼다. 마법사와의 링크가 끊겨버렸고, 기간트는 바닥에 쓰러지더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섀도우 로드와 기간트가 서로 전투 불능이 되어버린 상황. 다른 기간트들은 먼 위치에 있기 때문에, 성벽은 그대로 노출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난전이 벌어졌다.
골렘 병사와 디펜더들이 성벽을 막아섰고, 해일처럼 몰려드는 몬스터에게 마법사들의 마법이 집중되었다.
각종 수성 병기의 화력이 몬스터들에게 쏟아졌다. 바닥에 설치된 마법진에서 환한 불빛이 일어나며 폭발이 주변을 휩쓸었지만, 십수 개의 게이트에서 공급되는 몬스터들은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었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아무리 죽여도 몬스터들은 언제나처럼 인간들을 위협했다.
“후욱 후욱."
무너진 성벽의 책임자.
지휘관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다급하게 성벽을 복구하고 있었으나, 몬스터들이 이미 어느 정도 진입하는 바람에 복구가 힘들었다.
“빌어먹을! 이대로는 복구가 불가능해.”
절로 욕이 나왔다.
성벽 복구.
그 공간에 생명체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형상 복구를 방해하는 요소기에, 몬스터들을 밖으로 밀어내야만 복구를 진행할 수 있다.
급박한 상황.
그때, 옆으로 다가온 사내가 있었다.
“시간을 얼마나 벌면 되겠습니까?”
“.........넌?”
“빨리요!”
익숙한 얼굴.
바로 강민혁이었다.
부상자를 후방으로 이송한 강민혁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곧바로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벌어진 광경.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벤자민 우드는 마법사들의 축제라서 다행이라 말했지만, 세상에 닥친 재앙은 사람들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지휘관이 무너진 성벽의 상황을 살폈다. 언뜻 봐도 그쪽에 몰린 몬스터의 숫자가 수천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성벽이 뚫릴 수밖에 없기에,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말했다.
“딱 10분. 10분만 버티면 성벽을 복구할 수 있어.”
“알겠어요.”
강민혁이 곧바로 몸을 날렸다.
성벽 아래.
강민혁의 목적지는 바로 사지(死地)의 중심부였다.
아주 어렸을 때.
강민혁은 아버지의 전설에 대해 들었었다.
수천의 몬스터가 밀려드는 상황에서, 강덕철은 검 한 자루를 쥐고 그들을 상대했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
강민혁은 어느 날, 강덕철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대체 왜 그렇게 위험한 선택을 하신 거예요? 그러다 죽을 수도 있었잖아요.”
그때는 그게 의문이었다.
강덕철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나섰다.
한국에 레드 게이트가 발발하였고, 절망적인 상황에 강덕철은 모두를 지켜내는 수호의 검이 되었다. 그로 인해 강덕철은 세상의 인정을 받았지만, 강민혁으로서는 강덕철의 희생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수호문이 공격받은 것도 아니고, 그들은 남이 지 않은가.
당시에 강덕철은, 무심한 어투로 질문에 대답했다.
“그게 수호문의 운명이다.”
운명.
가주의 자리란 그런 것이다.
수호의 검을 물려받았을 때, 강덕철이라는 사람은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강민혁도 같았다.
클리스만의 세상은 자신의 ‘진짜 삶’이 아니지만,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것에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부상자를 구출할 때도.
그리고 지금도.
강민혁은, 수호문의 운명을 따랐다.
캬악!
서걱-
제일 먼저 달려드는 몬스터를 그대로 베어버렸다. 고개를 들자, 득실거리는 어둠이 자신을 향해 득달같이 달려드는 모습이 모였다. 대체 얼마나 많은 숫자일까. 시야가 닿는 곳은 모두 몬스터였고, 그들의 역한 내음이 코를 간질였다. 성벽 위에서는 그저 까만 물결이 성벽에 들이닥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성벽 아래는 현세(現世)의 지옥이 펼쳐져 있는 상태였다.
희생양.
누구도 강민혁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강민혁은 지난 1년간 애써 부정했던 수호문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저도 아버지와 다르지 않네요.’
웃었다.
수호검의 전설이 탄생했던 그날.
강덕철은 수호문에서 금기시되는 비기를 사용했다.
강민혁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그 정도의 힘이 아니라면 절대 살아나갈 수 없다.
꽈악.
강하게 움켜쥐는 검.
밀려드는 몬스터들을 바라보며, 강민혁은 서늘한 눈빛을 보였다.
‘개방(開放).’
딱 10분.
10분만 버티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