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33. 재앙의 전조(2) >
강민혁이 생각하는 강덕철은 이기적인 사람이다.
항상 냉철하게 손익을 계산하며, 모든 상황을 가문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주도한다.
하지만 전장에서의 강덕철은,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절대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수호(守護)의 검이란 그런 것이다.
그리고, 강민혁도 한때는 수호문의 피가 흘렀다.
크아아아아악!
".........!"
오우거의 괴성에 벤자민 우드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일단 동료 마법사를 구하기 위해서 몸을 던졌지만,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2인 이상이라 블링크는 사용할 수 없는 상태. 벤자민 우드의 머리 위로 오우거의 거대한 손이 떨어지는 순간, 강민혁이 한발 먼저 오우거의 손을 베었다.
서걱!
푸화하학!
피의 비가 떨어져 내렸다.
벤자민 우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강민혁을 보았지만, 강민혁은 벤자민 우드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이미 그를 구하겠다는 선택을 내렸다.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은 벤자민 우드에게 도망치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했고, 강민혁은 분노를 토해내는 오우거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나도 태생은 어쩔 수 없구나.’
수도 없이 휘둘렀던 검.
아버지의 고함은 항상 생명의 존엄성을 말했다.
네가 이렇게 죽을 듯이 강해지는 이유는, 사람들을 지켜야만 하는 상황에서 쓰러지지 않기 위함이라고.
그는, 강민혁의 뼛속까지 수호의 정신을 새겨넣었다.
쾅!
오우거의 발이 땅바닥에 작렬했다.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해낸 강민혁이 검을 휘두르자, 수십 갈래로 나누어진 오라가 그대로 오우거의 사지를 찢어발겼다.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피. A급 몬스터의 질긴 피부로도 강민혁의 공격을 버텨낼 수 없었다. 활활 타오르는 마나가 외피를 난도질하자, 오우거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쿠웅!
캬아아아악!
그 뒤로 또 다른 몬스터들이 달려들었다.
강민혁은 수호 검법을 펼치며 그들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마주하는 족족 그들의 목을 날려버렸다.
‘확실해. 클리스만의 육체는 강해졌어.’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런데 막상 전투를 치르자 생각 이상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전신에서 뿜어지는 힘은 폭발적이었고, 짐승처럼 날랜 움직임은 머릿속의 그림을 현실로 구현시켜주었다. 전에는 생각보다 느린 반응 속도에 애를 먹었는데, 지금은 생각함과 동시에 휘둘러진 검이 적을 베었다.
단순히 육체적인 능력만 따지자면 수호문의 장로급.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R-1의 힘이 더해질 경우, 장로 중에서도 수준이 다른 정판호를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훅!
퍼억!
웨어 울프의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강민혁이 내지른 권격이 웨어 울프의 머리를 박살냈다. 역동적인 움직임에 근육이 꿈틀거렸다. 사방에서 수십 마리의 몬스터가 동시다발적으로 달려들었고, 강민혁은 수호 보법을 밟으며 그들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베고 또 베고. 아무리 베어도 몬스터들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강민혁의 피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들끓었다.
클리스만의 검.
몬스터의 피는, 강민혁에게 오히려 활력을 불어넣었다.
장벽 너머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강민혁은 검에서부터 흘러들어오는 몬스터의 마나를 오라로 폭발시켰다.
흡수한 마나를 다시 외부로.
활활 타오르는 오라가, 몬스터들의 질긴 외피를 두부처럼 잘라내 버렸다.
강민혁의 앞에 피의 강이 흘렀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민혁에 의해 죽어 나간 수십 마리의 사체가 수북이 쌓여 길을 막았다.
입이 말랐다.
갈증이 일었다.
마음 같아서는 끝까지 몬스터들을 모두 도륙하고 싶었지만, 서늘한 본능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불길했다.
왠지, 이번 재앙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장에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을 터.
힐끗 주변을 확인하자, 마침내 벤자민 우드가 공연장 밖으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이다.’
확!
파바바박!
오라 웨이브가 달려들던 적들에게 작렬했다.
찰나의 틈.
강민혁은 곧바로, 비상 통로를 향해 뛰었다.
바깥도 지옥이었다.
공연장을 공격했던 몬스터들이 활개를 치는 모습에, 벤자민 우드는 부상자를 업은 상태로 뛰었다.
적절한 마법은 없었다.
블링크는 본인을 제외한 사람은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하늘을 날아오르기에는 와이번이 하늘을 점령한 상태였다. 결국 지상을 통해 움직여야만 하는 상황. 벤자민 우드는 염동력을 사용해서 부상자의 무게를 최대한 가볍게 만든 다음에, 이를 악물고 성벽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느렸다.
마법으로는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으나, 결국 마법이 사라진 마법사는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
“허억, 허억.”
턱밑까지 차오른 숨.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한테 넘겨요!”
“클리스만?!”
“어서요!”
강민혁이었다.
강민혁은 벤자민 우드로부터 부상자를 받았고, 그대로 같이 성벽을 향했다. 도중에 그들을 공격하는 몬스터가 있었다. 그런데 강민혁은 예술적인 움직임으로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더니, 부상자를 업은 채로 몬스터를 단번에 베어버렸다. 급박한 상황에도, 강민혁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
외성 밖.
이미 그곳은 몬스터들의 소굴이 되어버렸다.
이대로라면 성벽에 도달하기도 전에 몬스터들에게 발목이 붙잡힐지도 모르는 일.
끊임없이 달리는 와중에도 퇴로를 찾던 강민혁의 시야에, 희망의 불빛이 살아났다.
“넌 정말 미쳤어. 어떻게 그런 와중에도 부상자를 구하러 갈 생각을 해?”
엘리샤였다.
마지막까지 남았다가 공연장을 빠져나갔던 그녀는, 강민혁이 없다는 사실에 다시 되돌아왔다.
그녀가 불길을 뿜어냈다.
강민혁을 바짝 추격하는 몬스터들에게, 화마(火魔)의 지옥을 선사했다.
“플레임 캐논.”
화르르르륵.
강렬하게 일어나는 불길.
동시에.
“염화.”
쾅!
콰르르르르르 르르르르릉!
주변의 불길을 흠뻑 빨아들인 플레임 캐논이 그대로 주변을 휩쓸어버렸다.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이었다. 정령 계약. 샐러맨더와 계약한 이후로, 엘리샤가 사용하는 홍염의 마법은 더욱 강력해졌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땅 위에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없었다.
“어서 도망쳐!”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엘리샤는 날개를 활짝 펼쳐 날아오르며, 강력한 화염 마법으로 몬스터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얼마나 뛰었을까.
눈앞에 성벽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외성은 문을 닫고 있었던 상황.
다행히도 강민혁 일행은, 간발의 차이로 성벽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쿵!
성문이 닫혔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수성(守城)의 이점을 살릴 차례였다.
성벽 위에서는 엄청난 마법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덕분에 안전을 확보한 강민혁 일행은, 성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부상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맹독에 당했어.”
벤자민 우드였다.
그가 부상 부위를 살피더니,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는 진찰을 내리자마자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의료 마법?’
벤자민 우드의 손길이 매우 능숙했다.
큐어(cure)의 기운으로 독이 더 이상 진행되는 것을 막았고, 단검을 하나 빼 들더니 그대로 썩어버린 부위를 도려내 버렸다. 허벅지 살이 한 움큼이나 잘려나갔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보통 기술이 아니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는 기술은, 이와 같은 상황에 매우 익숙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
강민혁의 생각을 읽었던 것일까.
벤자민 우드는 치료하는 와중에,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교수로 임용되기 전에, 8년간 장벽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었어. 그곳에서 부상자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라 의료 마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그때의 경험이 날 사지로 밀어 넣을 줄이야. 나도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았어. 분명히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도망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비명 소리가 들리자마자 본능적으로 몸을 날리고 있더라고.”
피식, 웃었다.
장벽에서의 시간.
처음에는 마법사로서 호기로웠던 벤자민 우드라는 마법사는, 그곳에서 총명함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자신과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건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선사했다.
그래서 장벽에서의 삶은 마무리했을 때, 벤자민 우드는 죽은 사람들 몫까지 이기적이라도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후 교수의 자리에 오른 그는 학생들이 그리 좋아하는 스타일의 교수는 아니었지만, 막상 위기가 닥치자 망설임 없이 부상자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아직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행했을 뿐이고, 잔뜩 쪼그라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렇군요.”
벤자민 우드가 새삼 다르게 보였다.
사람은 자신만의 과거가 있다.
인간이란 단면만 있는 동물이 아니고, 그들의 양면성(雨面性)은 항상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게 벤자민 우드의 진짜 모습인지도 모른다.
능숙하게 응급처치를 하는 그의 모습에서, 한때는 총명했던 벤자민 우드의 모습이 겹쳐졌다.
벤자민 우드가 말했다.
“고맙다. 네 도움이 아니었다면, 나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치료를 끝냈다
눈을 마주치며 진심으로 말하는 모습에, 강민혁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닙니다. 교수님이 아니더라도 부상자를 구할 생각이었고, 교수님 덕분에 저도 늦지 않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
“저도 감사합니다.”
인생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불과 몇 분 전.
벤자민 우드는 강민혁을 혐오하며 어떻게든 깎아내리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포근하게 변했다. 잭 그리핀의 지적에 벤자민 우드는 강민혁에 대한 편견을 한 꺼풀 벗겨냈고, 방금 있었던 사건으로 강민혁이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이제 숨을 돌렸다.
다행히 성벽 안은 여유가 있었다.
벤자민 우드가, 성벽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되는 건가. 축제 도중에, 이런 위기가 닥쳤다는 게.”
성벽 위.
그곳에는, 수많은 마법사들이 몬스터들에게 재앙을 선사하고 있었다.
졸업 발표회.
마법사들의 축제다.
이 자리에는 뛰어난 마법사들이 많았고, 그들이 아비드의 주도하에 강력한 화력을 뿜어냈다.
“번 플레어.”
“스톤 레인.”
“기가 라이트닝."
콰쾅!
콰콰콰콰쾅!
몬스터들은 감히 성벽으로 다가오지도 못했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와이번이 있었지만, 지난 그린 드래곤 상황으로 더욱 강화시킨 대공(對空)용 병기가 그대로 와이번을 격추시켰다. 와이번이 뿜어내는 불길은 성벽에 전혀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마법 방어진을 겹겹이 두른 성벽은 철옹성의 위엄을 뿜어냈다.
격렬한 전투.
그 와중에 가장 빛을 발하는 사람은 바로 아비드였다.
“썬더 스톰(Thunder Storm)."
파바박!
빠지지지지지직!
7서클 마법 !
그 강력한 위력이 몬스터들에게 작렬했다.
지난 전투에서는 아비드가 자리를 비웠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축제를 위해 아카데미에 남아있었던 상황. 아비드를 비롯해서 이 자리에는 7서클 마법사가 제법 있었고, 그들의 화력은 수적 우위를 의미 없게 만들었다. 몬스터들은 마법의 희생양에 불과했다.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로 몬스터들의 숫자는 많았으나, 그들은 일정 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모두 죽임을 당했다.
화악-
아비드가 마나를 가라앉혔다.
다른 마법사들에게는 계속해서 공격할 것을 지시하며,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그나마 다행인가.’
에픽급 몬스터.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3개의 게이트가 생성된 것은 이례적인 일이나, 에픽급 몬스터가 없다면 상황은 생각보다 희망적이었다.
자잘한 몬스터들로는 성벽의 이점을 어찌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린 드래곤 상황을 겪고서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더욱 체계적으로 방어 체계를 갖추었다.
‘문제는 차원의 균열로 인해 공간 마법의 좌표가 일그러졌다는 거야. 주변 국가의 지원 병력이 도착하면 쉽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물리적인 이동 수단을 통해서 이쪽으로 오고 있어. 그들이 인근에 생성된 게이트를 처리하고 도착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리겠지.’
결국 지금 필요한 건 시간뿐.
시간이 지나면, 3개의 게이트라는 역사에 길이 남을 재앙은 해결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마법을 캐스팅하려던 아비드의 눈이, 갑자기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게 무슨.”
멀리 떨어진 거리.
그곳의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건 분명히 게이트가 생성되는 현상이었는데, 문제는 공간의 일그러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무려 십 수 개.
왕실 마법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십수 개의 게이트가 생성되고 있었다.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희망을 말하던 아비드의 감정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처박혔다.
아비드가 발악하듯 외쳤다.
“지금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기간트를 가져와! 그리고, 주변 국가에 우리의 상황을 알려라!”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조차도, 지금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