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 33. 재앙의 전조 >
졸업 발표회가 진행되던 그 시각.
임시 방책에서 경비병들은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번 졸업 발표회는 평소보다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성벽 안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숫자였고, 이를 예상한 아카데미 측은 성벽 밖에 위치한 대형 공연장에서 발표회를 진행했다.
크게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최근에 게이트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지만,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그것을 막아낼 충분한 힘이 있다.
문제는, 게이트의 규모가 예상 밖이라는 것이었다.
“대장님! 전방 800m에서 차원의 균열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당장 ‘그린 드래곤’ 상황을 선포해!”
수하의 보고에, 경비대장은 침착하게 매뉴얼대로 지시했다.
실제로 전방 800m 부근에서 게이트가 형성되고 있었다. 일그러지는 차원에서 몬스터의 형상이 아른거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부터 몬스터들이 쏟아질 터. 마법으로 만들어낸 임시 방책(防根)은 7~8m정도 밖에 되지 않기에, 저들을 상대로 오래 버티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시간을 벌어야 한다.’
삐이이이이이익-
경고음이 울려 퍼지는 소리가 들렸다.
발표회를 관람하던 사람들이 비상 대피령에 따라 성벽 안으로 피신하면, 방책에 설치된 마법진으로 시간을 버는 사이에 경비병력은 곧바로 후퇴할 것이다. 경비대장 또한 6서클 마법사. 마나를 일으키며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사이에, 마침내 몬스터들이 차원의 균열을 뚫고 나타났다.
캬아악!
타다다다다닥.
몬스터의 종류는 많았다.
등급이 낮은 고블린, 오크와 같은 몬스터를 시작으로, 괴력의 몬스터인 A등급의 오우거(ogre)도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히 생소한 광경이었다. 보통 게이트는 한 집단의 몬스터가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전에 있었던 그린 드래곤 상황에서도 웨어 울프가 주를 이루었었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다행히도 에픽급 몬스터는 보이지 않는 상황.
그나마 게이트의 등급이 낮은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그때, 수하의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렸다.
“대장님! 하늘을 보십시오!”
".........?!"
푸르른 하늘.
그곳에서도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칼로 찢어버리는 것처럼 갈라지는 차원의 너머에서, A등급 몬스터인 와이번(Wyvern)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게이트가 동시에 2개가 생성된 상황.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였다. 그린 드래곤 상황을 선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대장은 다급하게 ‘골드 드래곤’ 상황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법 통신망을 통해서 연락을 받은 수하가, 또 다른 절망적인 소식을 전했다.
“인근에 게이트가 생성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아무래도 ‘블랙 드래곤’상황을 선포해야 할 것 같은데, 이래서는 저희가 주변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뭐라고?”
창백해지는 경비대장의 얼굴.
그제야 알았다.
3개의 게이트.
상황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게 흘러가고 있었다.
콰앙!
쿠르르르르르르르릉.
공연장이 흔들렸다.
비상 대피령이 선포된 상황.
아직 바깥의 상황은 정확히 모르지만, 강민혁은 침착하게 사람들을 유도했다.
“동요하지 마십시오! 공연장 외벽에는 강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충격으로는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양옆에 비상 통로가 있으니, 침착하게 그리로 대피해주십시오. 지금은 비상 상황입니다. 빠르게 공연장을 벗어나, 성벽 안으로 가시면 됩니다!”
불길한 기운이 피어오른 그때.
강민혁은 곧바로 만일의 상황을 대비했다.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미리 비상 통로를 파악해둔 상태였고, 덕분에 상황이 발생하자마자 마나로 목소리를 키워 사람들을 유도할 수 있었다. 강민혁의 재빠른 대응에 사람들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신속하게 비상 통로를 통해 빠져나갔지만, 문제는 숫자가 너무도 많았다.
‘빌어먹을.’
3개의 작전명.
그 말인즉, 바깥에는 유례없는 상황이 터졌다는 것이다.
밖에 임시 방책이 설치되어 있다지만, 강민혁의 본능은 그것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꽈악.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더니 그들이 효율적으로 대피할 수 있도록 길을 지시했고, 공연장을 가득 메우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 마법사들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끝까지 남았다. 중요한 것은 일반인들의 안전이고, 헌터들은 그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거의 마지막.
잭 그리핀이 말했다.
“너도 얼른 도망쳐!”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
마법사들도 슬슬 눈치를 보면서 빠지는 상황에, 잭 그리핀은 강민혁을 독촉했다.
그러나 강민혁은 거절했다.
“먼저 가.”
“이런 미친 새끼.”
“누군가는 후방을 지켜야 돼.”
이곳은 외성 밖이다.
성벽 안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고, 몬스터를 저지할 병력이 모두 빠져나가 버린다면 일반인들은 꼬리를 잡힐 가능성이 크다. 경비대장의 판단처럼, 강민혁은 헌터들이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민혁의 말에, 잭 그리핀은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마나를 일으켰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
팽팽한 긴장감이 숨을 압박했다.
‘이럴 때 R-1을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R-1은 재사용 대기 시간이 있다.
발표를 위해서 사용하는 바람에, 다시 R-1을 가동시키기 위해서는 1시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터.
지금은 자신의 검을 믿어야만 한다.
그때였다.
쾅!
콰르르릉.
후문이 박살났다.
그리고 쏟아지는 몬스터들.
그들의 모습에, 강민혁은 오라를 일으켰다.
크어어어어억!
쿵! 쿵!
몬스터들의 선봉에는 오우거들이 있었다.
5M에 육박하는 거대한 육체로 공연장의 좌석을 박살내며 달려드는 그들의 모습에, 때를 기다리고 있던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의 캐스팅을 마쳤다.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불빛들. 각자의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마법들이 발현되며, 동시다발적으로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파이어 캐논.”
“라이트닝 레인.”
“트윈 싸이클론.”
화르륵.
콰콰콰콰쾅!
엄청난 위력의 마법이 전방을 휩쓸었다.
A등급의 몬스터인 오우거조차 괴성을 지르며 픽픽 쓰러질 정도의 위력이었고, 공연장에 들이닥친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몬스터들의 숫자는 줄어들질 않았다. 앞에서 쓰러진 몬스터의 사체를 짓밟고, 그 위로 또 다른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졸업 발표회가 마법사들의 축제라는 것이다.
이 자리에는 실력 있는 마법사들이 많았고, 그중에는 홍염의 마법사 엘리샤도 포함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화르르르륵.
그녀가 험악한 말을 내뱉었다.
불길이 활활 타오르더니, 홍염의 마법이 본격적으로 발휘되었다.
“익스플로전 (Explosion).”
콰앙!
콰콰쾅!
폭발이 일었다.
그녀가 사용하는 6서클 화염 마법은 7서클의 위력을 넘어섰고, 엄청난 충격에 몬스터들이 화염에 그대로 휩싸였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몬스터들. 그녀의 마법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곧바로 발휘되는 화우. 익스플로전에서 튀어 오른 불길이, 또 다른 화염 마법이 되었다.
“파이어 볼.”
화르르르륵.
수십 개의 화구.
그것들이 일제히 작렬했다.
후문을 통해 들어온 몬스터들은 일정선을 넘지 못했고, 마법사들의 폭격에 사체가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그러나 결국 마법사들에게도 공격의 틈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인해전술(人海戰術)이 얼마나 골치 아픈 전술인지를 증명하듯, 결국 앞까지 도달한 몬스터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상대는 따로 있었다.
캬아아악!
서걱!
빠른 스피드로 달려드는 웨어 울프의 모습에, 강민혁이 재빨리 그 앞을 막아서더니 목을 베어버렸다. 간결한 일격. 웨어 울프는 미처 반응하지도 못하고 목이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강민혁의 근육이 크게 부풀어오르더니, 땅을 박차고는 또 다른 몬스터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푸확!
피가 튀었다.
아직 안심하기엔 일렀다.
한차례 휘몰아친 마법사들의 공격이 다음 캐스팅으로 넘어가는 틈이 생기자, 마법을 뚫고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많아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이 건물 안이라는 것. 강화 마법 덕분에 공연장이 무너질 걱정은 없으니, 협소한 공간은 오히려 몬스터들을 상대하기에 적절했다.
“와라!”
화르르르륵.
오라가 강하게 타올랐다.
강민혁은 수호 검법을 펼쳐서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그로부터 퍼지는 마나의 파동. 몬스터들의 눈빛이 붉게 충혈되었다. 강한 적의(敵意)가 강민혁에게 집중되었고, 마법을 뚫고 나타난 몬스터들이 일제히 강민혁을 공격하였다.
푹!
서걱!
정신없는 공방이 이어졌다.
바로 앞에서 휘둘러지는 웨어 울프의 공격을 피하면, 머리 위로 오우거의 방망이 공격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을 피해 리자드맨의 가슴팍을 베어버리는 순간, 고블린떼가 강민혁을 덮쳤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그 어떤 것도 통하지 않았다. 서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반경 10M 거리. 그곳은 강민혁의 영역이었고, 예민하게 돋아오른 강민혁의 감각은 모든 공격에 대응했다.
‘초감각.’
푸확!
리자드맨의 머리가 날아갔다.
강민혁이 단단하게 앞에서 버텨주자, 뒤에 있는 마법사들로서는 한결 편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죽어, 이 개새끼들아.”
화르르르륵!
다시 한번 타오르는 화염.
엘리샤의 마법이 작렬하자, 새카맣게 타버린 몬스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픽픽 쓰러졌다.
어느새 일반인들은 모두 대피한 상태였다.
주변의 상황을 파악한 마법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일반인들이 모두 도망쳤습니다! 우리도 도망쳐야 해요!”
적절한 판단이었다.
언제까지고 여기서 버틸 수는 없다.
마나와 체력은 결국 떨어질 수밖에 없을 테니, 성벽 안에서 지형적인 이점을 활용해야만 한다.
마법사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강민혁은 끝까지 그들을 보호해주었다.
아무리 이 세상의 마법사가 근접전에 강하다지만, 이렇게 근접에서 벌어지는 난전(亂戰)에서 강화 전사보다 뛰어난 것은 아니다. 강민혁은 언제든 몸을 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얼른 먼저 도망치라고 소리를 질렀고, 자신을 공격해오는 몬스터를 베어버리며 그들이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상황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주변을 힐끗 확인하자, 마법사들이 거의 다 도망쳤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제는 도망쳐야 한다.’
후문.
엘리샤가 파이어 필드를 사용해서 경계선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곳에서부터 계속해서 몬스터들이 밀려 들어왔다.
더 이상은 위험할 터.
강민혁도 이만 물러나려는 순간,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크아아악!”
한 마법사.
그가 몬스터의 공격에 당했다.
멀리에서 던진 단검이 그의 허벅지에 박혔고, 마법사는 그만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제길!”
위험했다.
이미 마법사들 대부분이 빠져나간 상태라, 방금 쓰러진 마법사를 이대로 두면 죽어버리고 말 터.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다.
그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강민혁은 그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지만, 그를 구하러 가는 선택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런데 그때.
타다닥.
'.........?!"
강민혁보다 먼저 앞으로 뛰쳐나간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벤자민 우드였다.
상황이 눈으로 빨려 들어왔다.
벤자민 우드는 블링크로 빠르게 접근하더니, 염동력을 이용해서 마법사를 둘러업으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금만 참아!”
“크윽."
블링크는 본인만 사용할 수 있는 마법.
단검에서부터 퍼지는 중독 증상에 마법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벤자민 우드는 직접 마법사를 데리고 가는 방법을 택했다. 동료를 구하려는 용기는 가상했다. 하지만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얼마 도망가지 못하고 몬스터에게 따라잡힐 것이 뻔하다.
찰나의 순간.
강민혁의 머릿속이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벤자민 우드.
그다지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이번 발표회를 떠나서, 제임스 체스터와의 사건에서도 벤자민 우드는 이기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사실 상당히 의외였다. 평소에는 체스터 가문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던 사람이, 정작 진짜 위급한 상황에서는 동료를 위해서 몸을 서슴없이 던진다는 사실이 말이다.
확실한건.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애초에 혼자 도망치겠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벤자민 우드가 이미 부상자를 챙긴 상황.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에게 필요한 도움은 뒤에 따라붙는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것일 터.
벤자민 우드와 시선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에, 강민혁이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서 외쳤다.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수백의 몬스터.
비좁은 공간을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도망이라는 선택을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을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강민혁은 그대로 몬스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