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32. 3년 뒤(5) >
지난 한 달.
잭 그리핀은 골렘 슈트 제작에 모든 것을 바쳤다.
가문의 기술력을 총동원하였고,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R-1’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그 과정은 감탄의 연속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로운 영역을 배운다는 사실에 제작을 멈출 수 없었고, R-1이 완성될수록 강민혁에 대한 의문이 강해졌다. 대체 왜? 이런 귀중한 자료를 졸업 발표회에서 공개하는 걸까. 강민혁은 현재 아카데미에서 상당히 좋지 않은 대우을 받고 있는 입장이다. 그러한 상황을 단번에 반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강민혁은 겨우 졸업 발표회로 만족하는 선택을 내렸다.
발표회 전날.
잭 그리핀은 강민혁을 찾아갔다.
순수하게,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묻고 싶었다.
“골렘 제작법을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이유가 뭐야? 졸업장을 따내기 위해서라는 단순한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해. 내가 경험한 너는 졸업장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실제로 검사인 네게 졸업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렇다면 골렘 제작법은 너에게 ‘부와 명예’을 안겨줄 수단일 텐데, 왜 이런 선택을 하는 거야?”
잭 그리핀의 물음.
강민혁은 생각에 잠겼다.
클리스만의 삶.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일까?
처음에는 클리스만과 거래를 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클리스만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클리스만의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은 강민혁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실제로 강민혁은 부귀영화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기도 하지만, 강민혁은 클리스만이 바라는 것처럼 몬스터를 몰살시키는 일이 가장 최우선의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세상에 곧 재앙이 닥친다면, 인류에게는 ‘새로운 골렘 제작법’이라는 희망이 필요하다.
단지, 그뿐이었다.
강민혁이 말했다.
“특별한 목적은 없어. 네 생각처럼 나는 아카데미 졸업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전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에서 골렘 제작법을 알려주고 싶을 뿐이야. 이유는 단순해. 그게 인류(人類)를 위한 일이잖아. 사실 웃기지 않아? 골렘은 마법만큼이나 몬스터에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야. 그런데 사람들은 기간트의 기술을 보물처럼 여기며, 특별한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어. 몇몇 사람들은 기간트가 나타날 때면 영웅의 등장이라고 환호성을 내지르지만, 그건 아주 잘못된 일이야. 애초에 기간트가 대중화가 되었다면, 기간트는 특별한 때만 나타나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일상에도 곁에 존재하는 아주 친숙한 존재가 되었겠지.”
플루토의 발표.
그로 인해 골렘 시장이 무너져내린다.
기간트 기술의 값어치가 바닥에 떨어지며, 플루토를 제외한 다른 기간트의 대중화가 이루어질 터.
클리스만의 목적은 그것에 있었다.
강민혁이 생각하기에, 플루토는 세상을 바로잡는 수단으로 보였다.
만약 마법과 골렘의 힘이 조화를 이룬다면, 인류는 반드시 지금보다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다.
그날의 대화.
그래서 잭 그리핀은 발표의 스포트라이트를 기대하지 않았다.
강민혁이라면 발표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강민혁을 대놓고 무시하는 상황에 그는 화가 났다.
‘대체 왜 클리스만을 비난하지?’
강민혁은 영웅이다.
본인의 이득을 포기하고, 세상에 권력을 나누어준 영웅.
잭 그리핀은, 자신의 태도가 발표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말을 내뱉었다.
“정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클리스만이 개발한 골렘 제작법이 이 자리에 과분하다고 말했습니다.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기간트의 제작법이 보물로 취급받는 이 세상에서, 클리스만이 만들어낸 기술은 본인이 원한다면 부와 명예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요. 그런데도 클리스만은 졸업 발표회에서 발표하길 택했습니다. 그게 인류를 위한 일이고, 마법사로서 자신이 얻은 가장 큰 가치를 발표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 믿었습니다.”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벤자민 우드를 나무랐다.
일개 학생이, 지금 교수를 비난하고 있었다.
하지만 벤자민 우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잭 그리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큰 실수였다.
생각해보면, 벤자민 우드는 강민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갇혀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했다.
‘잭 그리핀의 말이 옳아.’
졸업장?
그게 강민혁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전혀 없다.
이미 검사로 낙인이 찍힌 강민혁이, 졸업장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건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 그런 강민혁이 골렘 제작법과 같은 엄청난 기술을 발표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편견에 매몰되어버린 생각이었다.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강민혁의 행동은 순수한 목적에 의한 것임을 알았을 텐데도, 벤자민 우드는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을 하고 말았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잭 그리핀의 일침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그리고 그는 마법 아카데미에 대한 자긍심이 높았을 뿐이지, 적어도 멍청하고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다.
“제가 큰 착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잭 그리핀 학생의 말처럼, 골렘 제작법은 과분한 업적입니다. 이 자리에서 밝히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디서든 인정받고 부와 명예를 쟁취할 수 있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물입니다. 만약 잭 그리핀 학생이 골렘 제작법의 원작자였다면, 그 기술을 활용해서 가문을 더욱 부흥시키지, 가문에 이득이 될지도 확실하지 않은 이런 일을 진행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클리스만 학생에게 섣부른 실수를 저지른 점에 대해 사죄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벤자민 우드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강민혁에게 집중되었다.
강민혁.
사람들은 지금, 그의 말을 듣고 싶었다.
벤자민 우드를 탓할 생각은 없다.
그간의 평판.
이 세상의 상식.
자신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깎아내리는 것은, 정말 일반적인 상식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사과를 하시니 더 이상 문제를 삼지는 않겠습니다. 잭 그리핀이 말해주었지만, 저는 골렘 제작법이 제 개인의 안위가 아니라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사용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게 여러분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졌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닙니다. 지금 저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관중석에서든, 아니면 카메라 너머에서든. 저는 졸업 발표회라는 조금의 거짓도 없이 자료를 공개할 수 있는 무대를 얻었을 뿐입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들은 알까.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클리스만과 같은 사람들이 인류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 이 세상에는 멸망설이 퍼지고 있다.
2000년의 마법 문명을 쌓으며 몬스터와의 공존을 택했던 사람들이, 게이트 현상이 발발하자마자 벌써부터 불안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알량한 권력은 손에 쥔 채로 놓지 못하였고, 지난 2000년간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에 어떻게든 상황이 해결될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변해야 한다.
그래야 인류가 살아남는다.
클라스만은 재앙을 예고했고, 그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이 상태로 인류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강민혁이 말했다.
이건, 예전부터 양쪽 세계 모두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저는 마법에 재능이 없습니다. 그래서 검술을 택했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검사가 되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사람들은 ‘낙오자’라고 말하더군요. 남들이 하지 않는 새로운 길로 결과를 보여주었다고 해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척을 받았습니다.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저라는 사람이 마법 아카데미에서 졸업장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몬스터라는 이 세상의 재앙과 맞닥트린 상황에서, 여러분들은 마법만으로 그들을 상대할 생각입니까? 인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해야만 합니다. 제발, 환상에서 깨어나십시오. 인류가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을 때는 재앙 직후였습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때, 인류는 주류와 비주류를 가리지 않고 살길을 찾아갔습니다. 이게 졸업 발표회와는 동떨어진 발언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이렇게라도 여러분들에게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탁-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자신이 이런 일을 벌인 이유를, 그리고 클리스만이라는 존재가 행하고 있는 노력을 조금이라도 알리고 싶을 뿐이었다.
침묵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그중에는, VIP석에 앉은 엘리샤도 있었다.
졸업 발표회 초대를 받았을 때.
엘리샤는 강민혁이 자신을 가지고 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친구와 타인의 사이를 오가는 강민혁의 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결국 졸업 발표회에 참석했다.
그건, 은인에 대한 예의였다.
그런데.
‘플루토라니.’
강민혁의 발표는 충격적이었다.
마법의 천재라 불리며 골렘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녀였지만, 플루토라는 존재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잭 그리핀의 말대로다.
플루토는 졸업 발표회에 과분한 업적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가치의 보물. 만약 지식의 독점권을 두고 화이트 캐슬과 거래를 진행했다면, 적어도 1000억 파운드(151조) 이상의 보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냥 돈의 가치는 의미가 없다고 보면 된다. 강민혁이 원하는 만큼, 구매자들은 기꺼이 돈을 지불했을 터.
그러자 묘한 기분이 일었다.
골렘 제작법.
그에 경악하는 사람들.
그건 마치, 정령 계약을 전달받았던 자신의 모습과 비슷했다.
‘어떻게 그런 기술들을 알 수 있는 거지?’
그뿐만이 아니다.
화이트 캐슬은 최근에 강민혁의 검술을 연구하고 있다.
결투 대회에서 보여주었던 영상을 분석했는데, 수석 연구자들이 충격적인 결론을 내렸다.
“클리스만의 검술은 일개 개인이 만들어낸 수준의 완성도가 아닙니다. 최소 수십, 수백 년의 노력이 들어있지 않고서는 이런 검술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투 대회에서 보여준 검술의 힘은 일부분에 불과하며, 클리스만은 아직 본인의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사실, 오늘이 강민혁과의 마지막 만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발표가 모두 끝나면, 엘리샤는 강민혁을 찾아가 반드시 진실을 알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발표가 끝났다.
강민혁은 R-1을 회수하고, 이만 무대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핑-
현기증이 일었다.
몸을 비틀거리자, 옆에 있던 잭 그리핀이 황급히 붙잡아주었다.
“괜찮아?!”
R-1의 후유증?
아니다.
전혀 생소한 충격이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머리를 짓누르더니, 클리스만의 기억에서 여러 가지의 파편을 떠올렸다.
화악-
[.........꺄아악!]
[.........도망쳐! .........우리는 끝이야!]
[.........사, 살려주세요!]
드문드문 떠오르는 장면들.
사람들이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로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도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사람들의 얼굴이 익숙했다.
어디서 보았던 것 같은 얼굴들.
‘설마.’
강민혁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관중들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바로 그들이었다. 지금 자신의 머릿속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이, 관중석에서 자신에게 환호성을 보내고 있었다. 훌륭한 발표였다면서 휘파람을 부는 그들은, 강민혁의 기억과는 다른 괴리감을 선사했다.
“크윽."
현기증에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 와중에 강민혁은 검을 붙잡았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입은 바짝 메말랐고, 날카롭게 변한 감각이 주변을 살폈다.
‘제발 아니기를.’
이해하지 못할 상황.
자신의 본능이 단순히 착각이기를 빌었다.
그러나 강민혁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클리스만은 알았는지도 모른다.
인류의 희망이 필요한 시점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삐이이이이이익-
[비상! 비상!]
[코드 레드 발동! 코드 레드 발동!]
[왕실 마법 아카데미 인근에서 게이트가 생성되었습니다. 학생 여러분은 무장을 갖추고, 신속하게 작전명 그린 드래곤의 대응 체계를 갖추길 바랍니다.]
익숙한 상황.
그러나 그 알림이 끝나기도 전에, 추가 전달 사항이 전파되었다.
[...작전명 골드 드래곤의 대응 체계를 갖추길 바랍니다.]
[...작전명 블랙 드래곤의 대응 체계를 갖추길 바랍니다.]
축제는 끝났다.
이제는, 절망적인 현실을 직시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