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 32. 3년 뒤(3) >
졸업 발표회를 앞두고.
잭 그리핀이 마침내 희소식을 가지고 왔다.
“골렘 슈트를 완성했어.”
표정에서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가 시계처럼 보이는 장치를 누르자, 하얀빛이 일어나더니 슈트의 외골격(外骨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
비좁은 공간에 인간이 들어가 슈트를 장착하는 순간, 인간은 초인의 힘을 발휘한다.
“나 정도 되는 사람이니까 시간 내로 완성한 거지, 어쭙잖은 골렘 제작자들은 이 슈트를 만드는 데 반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 거야. 그러니까 감사하게 생각해.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골렘 슈트를 제작하면서 확신이 들었어. 너는 네가 골렘 제작법을 이론적으로 만들어냈다고 했지만, 그건 절대 불가능해.”
나이를 떠나, 잭 그리핀은 장인(匠人)이라고 할만한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 골렘 제작 일을 도맡았던 그는, 골렘 슈트를 제작하면서 그 디테일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왜 그렇게 확신하지?”
“이론은 말 그대로 이론에 불과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기에, 실제로 착용하는 사람에 맞는 디테일이 부족할 수밖에 없지. 그런데 네가 건네준 자료에는 나조차도 상상하지 못하는 수준의 디테일이 집약되어 있었어. 보면서 감탄이 나오더라고. 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술을 개발한 것일까. 그리고 너는 대체, 억만금을 주어도 팔지 않은 이 기술을 어떻게 얻었을까.”
강민혁이 웃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잭 그리핀이 진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강민혁은 굳이 그걸 인정해줄 생각이 없었다.
골렘 제작은 강민혁이 개발한 것이어야만 하고, 그래야 졸업 발표회라는 무대에서 공개할 수 있다.
그에 따른 의구심?
상관없다.
강민혁은 단순히 메시지의 전달자다.
논란은 되겠지만, 이것이야말로 골렘 제작법을 확실하게 전파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뭐, 어찌 되었든 간에 내게는 좋은 경험이었어.”
떠보는 것에 실패하자, 잭 그리핀은 포기했다.
골렘 제작법의 원작자가 정말 궁금하기는 했지만, 강민혁의 반응을 보아 알아내지 못할 것 같았다.
“일단 임의대로 골렘 슈트의 이름을 R(revolution)-1 이라고 명명했어. 골렘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킬 기술이라, 그 정도의 이름은 필요하다고 생각했거든. 자료에 나왔던 대로 골렘 슈트를 장착할 경우 평범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초인의 힘을 발휘할 수 있어. 평범한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30kg의 바위를 들던 사람이 200kg의 바위를 드는 괴물로 변하는 거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골렘 슈트.
그것은 100kg의 바위가 한계선이다.
그런데 R-1의 최대 출력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것보다 2배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효과도 많아. 순간적으로 가속을 증폭시키는 장치와 공중을 밟고 떠오르는 에어 점프, 그리고 실드 등등. 정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기술을 골렘 슈트에 집약시켜 놓았더라고. 그래서 평범한 사람도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수단임에는 분명하지만, 이건 아무나 사용하지 못해. 정신과 육체가 강인한 사람이 아니라면, 골렘 슈트의 압력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어.”
일단 결과물은 완성했다.
문제는 아직 사용해보지 못했다는 것.
잭 그리핀은 직접 운용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 선택권을 강민혁에게 넘겼다.
‘클리스만은 A급 몬스터를 상대할 정도로 강인한 전사야. 골렘 슈트의 압력을 이겨낼 수 있겠지.’
“어때, 한번 착용해볼래?”
애초에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강민혁이 말했다.
“얼마든지.”
슈트의 착용법은 간단했다.
시계에 마나를 불어넣으면 ‘사용자’로 등록이 되고, 원할 때마다 골렘 슈트가 자동으로 몸에 장착된다.
‘장착.’
화악-
시계에서 불빛이 일었다.
마나의 입자가 골렘 슈트의 형상을 만들어내더니, 외골격이 쩍 벌어지면서 강민혁이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신체의 형태로 알맞게 변형되었다. 그리고 장착되는 골렘 슈트. 얼굴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지만, 목 아랫부분부터는 마치 멋들어진 중세 갑옷을 입은 것 같았다.
철컥.
“괜찮은데?”
외부에서 들끓는 힘.
강민혁은 본능적으로 골렘 슈트의 위력을 알았다.
몇 번 몸을 움직여보더니, 금세 적응한 강민혁이 땅을 박찼다.
팍!
파박!
순식간에 주변의 사물이 흐릿해졌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스피드. 강민혁은 골렘 슈트의 스피드를 만끽하더니, 가속의 능력을 활용해보았다. 그러자 골렘 슈트에 장착된 마나석에서 마나가 쭉 빠져나갔다. 현기증이 핑- 일더니, 눈을 떠보니 이미 다른 공간에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스피드.
잭 그리핀이 설명을 덧붙였다.
“골렘 슈트의 가속은 너무 빨라서 인간의 머리로는 즉각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의 수준이야. 그리고 골렘 슈트의 원동력은 마나석인데, 너무 많은 기술을 남발하면 마나가 모두 떨어질 수도 있어. 그래서, 골렘 슈트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한계를 파악해두는 것도 중요해.”
슥-
강민혁이 검을 뽑았다.
그러더니, 발밑에 있는 돌멩이를 위로 띄웠다.
툭.
허공에 떠오르는 돌멩이.
강민혁은 정신을 집중하더니, 돌멩이를 정확히 보고 검을 그었다.
서걱-
돌멩이가 잘려나갔다.
‘확실해. 이건 진짜야.’
골렘 슈트의 힘은 대단했다.
검을 휘두르는 스피드를 비롯해서 모든 신체적인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였고, 골렘 슈트의 능력을 잘만 활용하면 엄청난 시너지가 가능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골렘 슈트는 강화 전사의 힘을 밀어내지 않았다. 애초에 강화 전사를 위한 도구인 것처럼, 힘이 폭발적으로 들끓었다.
마음에 들었다.
현재 클리스만의 신체 상태와 골렘 슈트의 힘을 더한다면, 수호문의 장로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다.
‘이걸 강화 문명에 가져갈 수만 있다면..........'
엄청난 힘이 될 것이다.
강화 전사들도, 강민혁을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강민혁은 단전의 힘은 미약하지만, 골렘 슈트의 힘으로 어느 정도는 강화 전사처럼 싸울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내 기술력으로는 완성시킬 수 없다는 거야. 골렘 슈트의 제작법을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확실하게 기술을 숙달해야만 해. 골렘 제작은 조금의 오차도 인명사고로 이어지는 기술. 그걸 완성해나가는 잭 그리핀의 기술력은, 그야말로 장인의 솜씨였어.’
잭 그리핀.
그의 실력을 인정한다.
옆에서 보았기에, 자신은 불가능할 정도로 정교한 잭 그리핀의 기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었다.
그런데, 감탄하고 있는 건 잭 그리핀도 마찬가지였다.
넋을 잃은 그는, 지금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어떻게 벌써 골렘 슈트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거지?”
골렘 슈트.
인간이 만들어낸 병기이지만, 그건 결코 쉽게 다룰 수 있는 힘이 아니다.
보통 골렘 슈트에 적합한 훈련을 받은 병사도, 막상 골렘 슈트를 착용하면 한 달간은 적응하지 못한다.
그만큼 골렘 슈트의 컨트롤은 어렵다.
단순히 육체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골렘 슈트는 안에 연결되어 있는 마나와 정신적으로 연결해야 한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골렘 슈트를 거의 착용하지 못한다.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는 능력이고, 보통은 마법사들이 골렘 슈트와 마법을 동반해서 사용한다.
그리고 R-1 버전은, 당연히 일반전인 골렘 슈트보다 난이도가 높다.
그래서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강민혁은 거의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게 클리스만의 능력인 건가.’
소문은 들었다.
A급 몬스터를 도륙한 검사.
이 세상의 상식과는 다르게, 마법사와의 1대1 대결에서도 엄청난 무력을 보여준 괴물이라고 말이다.
그런 사람을 실제로 보니 감탄만 나왔다.
강한 검사.
그가 골렘 슈트를 완벽하게 활용한다면?
‘...어쩌면, 웬만한 마법사들보다 더한 괴물이 되겠지.’
머릿속에 파문이 일었다.
마법사가 이 세상의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난생처음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발표회 당일이 되었다.
예상대로 발표회를 관람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영국으로 몰려들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공간에서, 세계 각국에서 파견된 방송팀들이 현장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영국 왕실 마법 아카데미를 찾은 줄리아 캐서린(Julia Catherine) 리포터입니다. 현장은 벌써부터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데요.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졸업 발표회는 마법 학계의 축제라고 불리는 만큼, 많은 사람들이 기대 어린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방송이 시작되었다.
졸업 발표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은, 아주 높은 확률로 마법 학계의 거물로서 성장한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란 그런 곳이다.
세계 최고의 재능들이 모이는 자리고, 그곳에서 훌륭한 성적으로 졸업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리가 바로 졸업 발표회다. 엘리샤와 같은 재능들을 배출한 아카데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면, 그 사람의 재능은 이미 검증된 것이나 다름이 없을 터. 아카데미의 졸업은 도약의 발판일 뿐이고, 개인사로 무너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몇 년 뒤에 다들 상당한 명성을 떨쳤다.
엘리샤만 해도 그렇다.
리포터들은 기대하고 있는 학생들의 이름을 거론하다가, 엘리샤의 이름을 주목했다.
“...내부 정보통에 의하면,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졸업생인 엘리샤가 졸업 발표회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엘리샤는
졸업 이후에 곧바로 화이트 캐슬에 입성했으며, 장벽에서도 홍염의 마법으로 엄청난 화력을 보여주며 6서클의 경지에 대마법사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때문에 그녀의 등장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은데요. 저도 그녀의 타오르는 붉은 머릿결을 직접 보고 싶네요.”
모두가 기대하는 존재.
발표회의 시간이 다가오자, 엘리샤가 약속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꺄악!”
“엘리샤다!”
“엘리샤님! 저 좀 봐주세요!”
마치 연예인과도 같은 인기였다.
아직도 세상에는 연예인이라는 직종이 남아있었지만, 뛰어난 마법사는 그들의 인기를 훨씬 상회하였다. 포탈을 타고 나타난 엘리샤의 등장에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수많은 인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엘리샤의 등장을 반겨주었고, 엘리샤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엘리샤는 흥행 보증 수표였다.
원래도 많은 관심을 받는 졸업 발표회가, 엘리샤가 참석한다는 소문에 2~3배 이상의 관심을 받았다.
열기가 달아올랐다.
곧 시작될 졸업 발표회에, 사람들은 다들 기대 어린 기색을 보였다.
그런데 그중에는 그 누구도 강민혁의 존재를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3년 전.
그린 드래곤 상황에서부터 결투 대회까지 강민혁은 강력한 임팩트를 선사했지만, 그건 이제 옛날 일이다.
졸업을 앞둔 지금.
마법사들의 축제에서, 강민혁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대 아래.
교수들이 자리를 잡았다.
졸업 발표회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대를 평가하고 점수를 책정하는 자리가 아니다. 모든 발표가 끝나고 논의 끝에 합불을 결정하지만, 발표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사람들을 대신해 질문자의 역할을 맡는다. 졸업생에게 직접적으로 궁금한 것이나, 아니면 발표에 관련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질문의 종류는 다양하다.
어떤 때는, 학생이 앞으로 관심이 있는 세력이 어디인지 질문을 해주는 센스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관중석.
그곳에 자리한 사람들은, 모두가 졸업생들의 영입에 군침을 흘릴 테니 말이다.
미리 배정된 자리에 착석한 교수들은, 곧 시작될 졸업 발표회를 위해 명단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벤자민 우드(Benjamin Wood) 교수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아니, 이게 대체 뭡니까?”
“무엇을 말씀하시는 거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벤자민 우드는 명단을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더니,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보십시오. 잭 그리핀과 클리스만이 한 조로 배정되어 있습니다. 합동 발표를 하겠다는 뜻일 텐데, 발표 주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새로운 골렘 제작법’입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클리스만은 낙제가 명백한 학생인데, 이건 잭 그리핀의 능력에 빌붙어 졸업 발표회를 통과하겠다는 것이지 않습니까?”
앨버트와의 대화.
그때, 벤자민 우드는 강민혁에 대해 강한 불만을 토로했었다.
아카데미의 비호를 받는 그가 평소에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선을 완전히 넘어버렸다.
“으흠.”
“그건 조금 이상하네요.”
“혹시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걸까요.”
다른 교수들도 동조했다.
확실히 잭 그리핀과 클리스만의 조합은 이상했다.
벤자민 우드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무조건 거래가 있었던 겁니다. 잭 그리핀이 누구입니까? 골렘 명가의 후손인데, 그가 골렘 제작과 관련해서 클리스만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클리스만에게 어떤 배경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잭 그리핀을 고용해서 졸업을 시키겠다는 의도가 명백합니다.”
쾅!
그가 책상을 내리쳤다.
대회를 준비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번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은 참았습니다. 마법과는 관련이 없는 클리스만 같은 학생이 아카데미를 다니는데도, 어차피 졸업은 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위안 삼으면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클리스만이 졸업 발표회를 통과한다면, 이것은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위상에 먹칠하는 일입니다.”
무대를 취소시키는 것?
그건 섣부른 선택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아직은 심증에 불과하기에, 그는 다른 교수들에게 동의를 구하듯 확실히 말했다.
“만약에 우리가 예상한 대로 잭 그리핀이 주도한 발표가 된다면, 다른 교수님들도 이번만큼은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건 딱 봐도 부정행위지 않습니까?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명예는, 우리 교수들이 지켜야만 합니다.”
타당한 말이었다.
그의 말에, 교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밑.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공간에서 잠깐의 소동이 벌어지는 사이, 졸업 발표회는 어느새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