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 32. 3년 뒤(2) >
강민혁의 제안.
합동 발표를 같이하자는 어처구니없는 말에, 잭 그리핀의 얼굴에 황당함이 떠올랐다.
“너 미쳤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클리스만.
그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 공식 왕따다.
결투 대회에서 상당한 무력을 보여주면서 그를 대놓고 핍박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와 친해지려는 사람도 없었다. 이 세상은 마법이 주류인 세상이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재학생들은 훌륭한 마법사가 되겠다는 꿈을 꾸고 사는 사람들인데, 그들에게 클리스만이라는 존재는 돌연변이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클리스만과 친해지려고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호기심에 말을 거는 사람은 있었다.
그러나 그건 엄연히 호기심일 뿐,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그들은 클리스만의 흉을 보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이제는 아카데미에 다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옅어진 녀석이, 느닷없이 합동 발표를 같이하자니.
잭 그리핀으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난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어. 혼자만의 힘으로도, 충분히 졸업 발표회를 통과할 수 있거든.”
잭 그리핀은 천재다.
마법적인 재능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골렘 명가의 재능을 물려받아서 골렘 제작과 컨트롤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보통 졸업 발표회가 끝나면 각종 단체에서 인재들을 데려가기 위해 혈안이 된다. 잭 그리핀은 아직 4서클 마법사에 불과하지만, 그를 데려가길 원하는 세력들은 줄을 섰다.
골렘은 마법 문명의 핵심이다.
잭 그리핀이라는 한 명의 인재가 가진 값어치는 대단하기에, 그는 아카데미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열등생인 강민혁과는 전혀 다른 위치.
잭 그리핀의 반응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이해해. 합동 발표는 높은 수준의 결과물을 요구하는 데다, 너 정도의 실력자라면 다른 사람과 합동 발표를 진행할 이유가 전혀 없겠지. 그래서 나는 네게 거래를 제안할 생각이야. 얘기를 들어보고 마음에 들면 같이 하는 거고, 그래도 싫다고 말한다면 더 붙잡고 늘어지진 않을게.”
“흐음.”
잭 그리핀이 미심쩍은 반응을 보였다.
짜증 어린 기색은 가득했지만, 강민혁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얘기를 들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말해봐.”
“일단 이걸 읽어 봐.”
강민혁은 자료를 하나 건넸다.
그건 골렘 제작법의 일부를 정리한 것이었다.
제작법의 핵심 기술은 알 수 없으나, 잭 그리핀 정도라면 자료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터.
자료를 읽어내려가던 잭 그리핀의 눈이, 돌연 휘둥그레졌다.
“...?!"
그가 고개를 홱 들었다.
그러더니, 아까와는 다른 흥분 어린 기색으로 말했다.
“이거 어디서 난 거야?”
“내가 이론적으로 만들어낸 거야. 이걸 졸업 발표회에서 공개하고 싶은데, 문제는 내가 모형을 만들어낼 능력이 없어. 알다시피 골렘 제작은 경험이 없는 마법사가 이론의 기술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잖아. 숙련된 기술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가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기술의 핵심을 그냥 말해줄 수도 있어.”
획득 경위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정말 간단한 변명이다.
잭 그리핀도 골렘 제작법을 얻어낸 경위보다는, 제작법을 알아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조건이 뭐야?”
미끼를 물었다.
당연한 결과다.
골렘 제작을 평생의 업으로 삼은 사람에게, 고차원의 기술을 보여준다면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강민혁은 본론을 말했다.
“거래의 조건은 간단해. 나와 같이 합동 발표 조를 이루어서, 내가 생각해낸 골렘 기술의 모형을 만들어주면 돼. 그리고 졸업 발표회 전에는 이 기술을 절대 유출하지 않겠다고 나와 마나의 약속을 한다면, 이것뿐만 아니라 더 많은 지식을 공개할 의향이 있어. 선택 잘해. 골렘 제작자는 너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너는 이 기술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을 테니까.”
선을 그었다.
타협은 허락하지 않았다.
강민혁은 특별한 협상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미 잭 그리핀은 결단을 내린 상태였다.
“할게, 무엇이든지 할게. 이 기술을 직접 확인할 수만 있다면, 네가 하라는 건 뭐든지 할 수 있어.”
장인들의 특성이었다.
잭 그리핀의 눈빛에서는, 이미 강민혁에 대한 편견은 보이지 않았다.
잭 그리핀과 마나의 계약을 맺었다.
이제 그는 강민혁을 배신하지 못한다.
아비드와 같은 인물에게는 통하지 않을 방법이지만, 잭 그리핀은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몰랐다.
강민혁은 기술의 핵심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잭 그리핀은 당장에라도 심장마비가 일어날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기술이라니. 기존 골렘들보다 출력이 2배나 높은 데다, 다른 성능에서도 압도적으로 발전한 형태야. 이걸 정말 네가 개발했다는 거야?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골렘도, 이 정도로 뛰어나지는 않아. 이건 미쳤어. 정말 혁명이라고, 혁명!”
그가 혀를 내둘렀다.
졸업 발표회에서 ‘플루토’를 공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나마 제작 기간이 짧은 골렘 슈트를 제작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사실 기술만 공개해도 될 일이지만, 졸업 발표회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명확한 결과물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잭 그리핀의 기술력이라면 충분히 그런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 터. 잭 그리핀은, 당장에라도 제작에 돌입하고 싶은지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다 잭 그리핀이 마지막 책장을 넘겼다.
플루토.
그에 대한 설명에, 방금까지 흥분하던 잭 그리핀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게 무슨.”
방금까지는.
그저 대단한 기술의 발견처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플루토는 달랐다.
기술의 체계에서 보이는 플루토의 강력함에,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 정도의 기간트라면 에픽급 몬스터라 할지라도 홀로 괴멸시킬 수 있어. 그런데 이걸 졸업 발표에서 공개하겠다고? 기간트 제작법은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서도 보물처럼 여기는 것인데, 세상에 이것보다 뛰어난 기간트는 존재하지 않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뒤늦게 알았다.
이게 생각보다 큰 판이라는 사실을.
이런 대단한 기술을 아무런 대가 없이 공개한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혹스럽겠지.’
잭 그리핀의 반응.
이해한다.
만약 자신이 잭 그리핀의 입장이었어도, 플루토만큼은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명할 이유는 없다.
이미 잭 그리핀과 마나의 계약을 맺었고, 잭 그리핀도 골렘 제작자로서 손해 볼 일은 절대 아니다.
남들보다 먼저 기술의 원본을 확인하는 것.
그건 상당한 메리트다.
골렘 제작자로서의 인생을 한 단계 발전시킬 기연이었지만, 그래도 이 순간이 당황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잭 그리핀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강민혁을 향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지금 이 순간.
그로서는,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클리스만의 메시지를 보면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곧 세상에 재앙이 닥친다. 그리고 인류가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더 발달한 형태의 골렘 제작법이 필요해.’
정보의 전달.
클리스만은 메신저(messenger)의 역할을 강민혁에게 맡겼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마법 문명을 충격에 빠트릴 자리로,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무대라는 것이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졸업 발표회는 강화 문명의 학술 대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스케일이 크다. 나름 규모 좀 있다는 마법 세력에서 모두 졸업 발표회를 축하하기 위해 찾아오며, 수많은 사람들이 발표회를 관람하고자 몰려든다. 그리고 전 세계에 동시 송출되는 방송까지. 단순히 학교 행사가 아니라, 세상이 관심을 가지는 마법 학계의 축제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한 달 뒤.
그 순간을 위해서 강민혁은 착실하게 준비했다.
잭 그리핀은 정말 뛰어난 인재였고, 강민혁으로서는 불가능한 골렘 제작의 영역을 현실로 만들어갔다.
강민혁이 하는 일이라고는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었다.
제작을 도와주기에는 방해가 될 테니, 강민혁은 잭 그리핀의 기술을 눈으로라도 배우고자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잭 그리핀이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었다. 본인의 노하우를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자신이 제공받은 기술의 수준을 생각하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강민혁은 이미 신문물의 골렘 제작법을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잭 그리핀으로서도 그 말을 곧 이곧대로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강민혁에게 노하우를 노출하더라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다.
이건 거래다.
기술을 받았으니, 노동력과 노하우를 알려주는 거래.
잭 그리핀은 충실하게 본인의 역할을 해냈다.
‘졸업 발표회가 끝나면 어떻게 될까.’
상상이 되질 않았다.
마법 문명.
이곳은 강화 문명과는 다르게, 2000년의 역사를 쌓으면서 지금의 ‘마법 문명’을 만들어낸 세상이다.
강민혁은 클리스만의 세상에서 얻은 지식을 강화 문명에 전파한 경험이 있지만, 그때와는 엄연히 다른 문제다. 강화 문명에서 마법은 미개척지일 뿐이다. 발달되지 않았기에, 새로운 발견은 충격적이지만 주류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그러나 마법이 주류인 이 세상에서 새로운 지식을 발표한다는 것은, 사회의 근간을 흔들어버릴 정도로 크나큰 충격을 선사할 것이다.
하지만 해야만 한다.
클리스만의 골렘 제작법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면, 강민혁으로서는 굳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졸업 발표회를 며칠 앞둔 시점.
강민혁을 찾은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오랜만이네.”
그녀는 바로 엘리샤.
이제는 화이트 캐슬(White Castle)의 소속인 그녀가 강민혁을 찾았다.
엘리샤가 강민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장에서, 강민혁이라는 사람은 참 미스터리했다.
“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분명히 서로의 발전을 위해서 지식을 공유할 때는 친구 같다는 느낌을 풍기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마치 남처럼 대하는 것을 보면 말이야.”
엘리샤.
그녀는 대인 관계가 원만한 편이 아니다.
거친 성향을 떠나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위해서 노력하는 편도 아니다.
그런 그녀가, 강민혁만큼은 특별하게 생각했다.
홍염의 근원을 찾도록 도와준 인물이기에, 강민혁과의 관계는 끝까지 이어나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강민혁은 변했다.
정확히는 클리스만이 변한 것이지만,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마지막에 내게 이런 말을 했었지. 반드시 화이트 캐슬의 일원이 되어서 강해지라고. 그리고 네가 졸업 발표회를 앞두게 되면, 한 번쯤은 자신을 찾아와 달라고 말이야.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네 재수 없는 낯짝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지만, 정령 계약의 은인이기 때문에 약속을 지키는 거야.”
‘..엘리샤에게 이런 약속을 했다고?’
순간 되물을 뻔했다.
그건 자신이 한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클리스만이 했다는 뜻인데, 대체 왜 엘리샤에게 3년 뒤에 찾아오라는 약속을 했단 말인가.
‘3년은 정처 없이 흘러간 시간이 아니었어.’
클리스만.
그는 3년의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그게 계획되지 않은 시간의 흐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엘리샤에게 약속을 했다면 애초에 3년이라는 기간은 정해져 있었을 것이다. 클리스만은 지금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발표회라는 무대조차도, 강민혁이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클리스만이 의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머릿속이 얽혔다.
클리스만은 굳이 왜 지금을 택했을까.
그리고 자신에게 메신저의 역할을 맡긴 이유가 무엇일까.
입이 메말랐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강민혁의 모습에, 엘리샤는 짜증이 나는지 눈썹이 홱 올라갔다.
“벙어리야? 불렀으면 말 좀 해.”
엘리샤.
그녀는 이제 평범한 아카데미생이 만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다.
홍염의 마법을 완전히 개화한 그녀는, 현재 마법 문명을 대표하는 마법사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화이트 캐슬의 일원.
그녀는 하늘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사실 그래서 그녀가 아카데미를 찾아왔다는 소식에, 아카데미가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일단 미안해.”
진심이었다.
그녀는 밝힐 수 없는 진실의 희생자다.
강민혁과 클리스만 사이에서 감정을 소모했을 테니, 강민혁으로서는 사과부터 하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이전 빙의에서 클리스만은 엘리샤와 아예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어. 그런데 이번에는 엘리샤에게 졸업 발표회 전에 찾아오라고 한 것을 보면, 분명히 졸업 발표회에 목적이 있어.’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엘리샤의 배경.
화이트 캐슬의 일원이 졸업 발표회에 참석하겠다고 말한다면, 그 자리의 무게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세상이 주목할 것이다.
굳이 홍보하지 않아도, 엘리샤를 보고자 사람들이 방송을 시청할 터.
강민혁이 말했다.
“졸업 발표회에 참석해줘. 그날의 발표를, 네가 지켜봐 주었으면 좋겠어.”
퍼즐이 맞추어졌다.
졸업 발표회가 치러지는 그날.
엘리샤가 참석하고.
세상이 주목하는 그 순간에.
강민혁은 세상을 충격에 빠트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