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32. 3년 뒤 >
반가운 풍경이었다.
허름한 숙소는 예전과 같았으나, 시간이 주는 낯설음에 강민혁은 한동안 빙의의 여운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알았다.
누가 시간을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생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일단 눈에 보이는 팔다리가 이전보다 길쭉하게 뻗어있었고, 근육으로 뒤덮인 몸은 육체적인 성장을 증명하였다. 강민혁은 잠시 눈을 감고 심법을 운용하였다. 클리스만으로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내외부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건..........'
달랐다.
단전.
힘의 원천인 그곳에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양의 마나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활화산과도 같았다.
거칠고 사나운 마나는 언제든 폭발할 것처럼 들끓었고, 그것은 온전히 강민혁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정확히는 클리스만의 통제하에 움직이는 힘일 터. 강민혁이 강화 문명에서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동안, 클리스만은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정도의 마나를 축적하기 위해서 대체 얼마나 많은 몬스터를 도륙했을까.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그간의 고난이 눈에 보였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수호문에서도 장로급에 버금간다.’
단순히 추정하는 수치.
강민혁은 힘을 갈무리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책상 위.
예상대로 그곳에는 클리스만의 메시지가 있었다.
강민혁은 책상으로 다가갔고, 오랜만에 서늘한 의자의 감촉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아마 당황스럽겠지. 예정된 시간이 지났어도 빙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네게 시간이 필요했듯이 내게도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차원간의 시간은 뒤죽박죽 얽혀있어, 네가 1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곳에서는 3년이 넘어가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3년.
그 단어가 눈에 콱 박혔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재앙이 닥친 이 세상에서는, 3년의 시간 동안 많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이 세상은 몬스터들의 공격으로 많은 위험이 있었지만, 나는 내 할 일에만 집중했다. 네가 가르쳐준 검술을 탐내는 사람들의 회유를 거절하고, 조용히 학교를 다니며 시간을 보냈지. 그리고 알고 있겠지만, 그동안 검사로서 성장하는 것에 집중했다. 매일 방과 후면 게이트 너머에 있는 장벽으로 가서, 수많은 몬스터를 도륙하며 검사로서의 삶에 적응했다. 그게 현재의 나다. 그리고 지금은 게이트와의 링크를 끊은 상태다.]
단전에 들끓는 마나.
예상대로였다.
수많은 몬스터들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단기간에 이 정도의 힘을 쌓을 수 없다.
사실 이해가 되질 않았다.
클리스만이 전수해주는 지식은 이미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수준을 벗어난 상태고, 클리스만은 마법사가 아니라 검사로서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 왜 왕실 마법 아카데미를 떠나지 않았던 것일까.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가 아카데미에 남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머릿속에 엉킨 실타래가 풀리지 않는 기분.
클리스만의 삶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지만, 강민혁은 이러한 의문이 이제는 달갑게 느껴졌다.
다음 책장을 넘기는 순간.
웃음이 번지던 얼굴이 굳었다.
[세상의 흐름이 변하고 있다. 자연의 마나가 재앙을 예고하고 있으며, 게이트의 형성 주기도 점점 짧아지고 있다. 나는 이 끝에 어떤 재앙이 닥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건 2000년간 쌓아온 이 세상의 문명으로도 막을 수 없는 종류의 재앙일 것이다. 그래서 너의 힘이 필요하다.]
재앙.
서늘한 단어였다.
시선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나를 대신해서, 이 세상에 ‘다음 단계’를 제시해주었으면 한다.]
클리스만과의 관계는 항상 이랬다.
이번에도, 그의 요구는 예상을 벗어났다.
다음 단계.
그 단어가 주는 의미는 특별했다.
클리스만이 일개 개인처럼 느껴지지 않고, 마치 세상을 관조하는 신(神)과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아니야, 클리스만은 확실히 인간이야.’
그와의 시간.
강민혁은 클리스만이 전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몬스터를 떠올릴 때면 저절로 반응하는 심장의 떨림은, 그가 몬스터에 얼마나 큰 적의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이런 사람이 신에 버금가는 존재일 리가 없다. 하지만, 책에 나온 내용은 분명히 인간의 상식을 넘어섰다.
[골렘 제작법]
골렘.
마법 문명의 꽃.
클리스만의 책에는, 세 가지 종류의 골렘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 설명을 간략하게 축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골렘 병사]
[인간형태의 골렘. 연금술사들의 인형(人形)처럼, 인간과 똑같은 신체 구조를 활용해 인간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 골렘 병사는 자의식이 없으며, 마법사와 연결한 링크를 통해서 골렘 병사에게 명령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현재 알려진 골렘 술사들은 보통 최소 10마리에서, 최대 30마리의 골렘 병사를 동시에 조종할 수 있다.]
[골렘 슈트]
[골렘의 골격을 인간이 착용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 형태. 골렘 슈트를 착용한 인간은, 일반인이라 할지라도 초인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마법사들이 골렘 슈트를 착용하기도 하는데, 골렘 슈트의 출력을 감당하면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소수에 선택받은 자만이, 두 가지의 힘을 동시에 사용한다.]
[기간트]
[골렘 문명의 결정체. 마나의 출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거대한 괴물. 기간트의 힘은 에픽 몬스터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하다. 다만, 인간의 정신력으로는 다룰 수 없는 강대한 힘이기에, 보통은 최소 5명 이상으로 구성된 마법사가 동시에 기간트의 움직임에 간섭한다. 기간트 또한 골렘 병사와 마찬가지로 자의식이 없으며, 마법사가 입력한 명령어에 따라 움직인다.]
일반적인 상식.
클리스만의 세상에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클리스만의 골렘 제작법은 달랐다.
‘이건 말도 안돼.’
클리스만의 제작법을 통해서 탄생한 골렘은, 일단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최소 2배 이상의 출력을 뿜어낸다. 그뿐만이 아니라, 마법사와의 링크를 통해서 명령을 수행 받지만, 상황에 따라서 자의식을 가지고 직접 전투를 수행하는 일이 가능하다. 에고(ego)의 형태라 보기에는 조금 애매했지만, 확실한 건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함에 따라 전투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플루토(Pluto).'
기간트의 발달한 형태.
기간트와 시작은 같지만, 기간트보다도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 플루토라는 병기였다.
플루토의 힘을 추정하자면, 마법사의 지원이 없더라도 에픽급 몬스터를 괴멸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넌 대체..........'
클리스만.
그의 지식은 이 세상의 상식을 뛰어넘었다.
2000년의 마법 문명을 쌓은 이 세상에서도, 클리스만은 먼 미래의 지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골렘 제작법은 상당히 복잡했다.
만약 이것을 가져가도 강화 문명에서는 사용하기 힘들 정도.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골렘 제작 인력을 육성한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강화 문명에서는 구현할 수 없는 수준의 기술이었다.
클리스만은 말했다.
[골렘 제작법을 사람들에게 공개할 것을 부탁한다. 인류에게는 희망이 필요하다.]
궁금한 게 많았다.
어떻게 이런 기술을 알았는지.
인류의 희망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리고 골렘 제작법을 사람들에게 알릴 생각이었다면, 왜 본인이 직접 수행하지 않고 자신에게 맡기는지.
머리가 아팠다.
역시, 클리스만의 삶은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적어도 내가 아직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너의 말대로 따라줄게.’
클리스만의 동기.
인류의 희망을 위해서 골렘 제작법을 세상에 밝혀달라는 것이라면, 충분히 동조해줄 수 있다.
이 기술을 세상에 어떻게 알려야 할까.
인터넷을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그럼 삽시간에 골렘 제작법의 기술이 퍼지겠지만, 인터넷을 통한 유포는 원본이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
골렘 제작은 위험한 기술이다.
조금이라도 원본과 달라진다면, 어떤 사고가 벌어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아비드에게 알리는 방법도 있어.’
아비드.
그의 발언권에는 힘이 있다.
그를 ‘확성기’로 활용하는 방법을 떠올렸으나, 강민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믿을 수 없다.
아비드와 교류가 있었다고는 하나, 클리스만의 골렘 제작법은 욕망에 눈이 멀게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안전하게, 그리고 완벽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
다행히도 고민은 길지 않았다.
3년이 지난 이 세상에는 마침, 강민혁이 생각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자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지금 정신이 없었다.
바로 연말.
마법 아카데미 학생들의 졸업 시즌이 다가온 것이다.
마법의 명문은 입학도 힘들지만,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졸업 과정이 매우 힘들다.
졸업을 앞두고 4학년생들은 졸업 발표회라는 것을 진행한다. 발표회에서 본인이 마법사로서 성장했다는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학생의 졸업을 인정하지 않는다. 졸업생은 아카데미의 얼굴이다. 단순히 학년을 채웠다고 해서 해당 학생의 졸업을 인정해버린다면, 수준이 낮은 졸업생으로 인해 아카데미의 명성이 먹칠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발표회에서 낙제할 경우.
학생은 매년 여름쯤에 진행되는 보충 발표회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졸업을 포기하는 방법이 있다.
졸업 발표회를 앞두고.
명단을 정리하던 앨버트 교수가, 동료 교수에게 말했다.
“교수님. 클리스만이 졸업 발표회에서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클리스만의 성적표.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F가 비처럼 내리는 성적표를 바라보고 있으면, 클리스만이 어떻게 입학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동료 교수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연히 낙제를 당하겠죠. 아직도 그따위 녀석이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점수는 기준치는커녕 항상 바닥을 보이는 데다, 클리스만은 마법이 아니라 검을 수련하겠다고 대놓고 공표하지 않았습니까? 대체 그의 뒤에 어떤 배경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배경 덕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클리스만이 퇴학 처리를 당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클리스만.
교수들에게 미움의 대상이었다.
클리스만은 3년간 조용히 아카데미를 다녔지만, 그는 이미 모두에게 강력한 임팩트를 남기고 말았다.
바로 결투 대회.
도미닉 그린과의 치열한 승부에, 그의 검술이 이 세상의 상식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런 인물이 왕실 마법 아카데미를 계속 다니고 있으니, 세간의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클리스만이 그 이후에 어떤 피드백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며, 당당하게 F를 받는 모습에 교수들은 클리스만이 대놓고 반항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징계도 수차례 받았다.
그런데도 끝끝내 퇴학 처리되지 않고 졸업 발표회를 앞둔 상황에, 교수는 괜히 신경질이 났다.
앨버트 교수가 클리스만의 성적표를 물끄러미 보았다.
“아무래도 그러겠죠. 졸업 발표회에서 ‘마법적’으로 정말 대단한 성과를 보여주지 않는 한, 클리스만은 마법 아카데미의 졸업장을 따지 못할 거예요. 그게, 마법 아카데미가 명성을 유지하는 방법이니까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일.
그는 이만, 클리스만의 성적표를 옆으로 치워버렸다.
졸업 발표회.
강민혁은 그 자리를 D-DAY로 잡았다.
세간의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이니만큼, 그 자리에서 공개한 지식은 세상에 널리 퍼질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내 기술로는 골렘 제작법의 모형을 완성시킬 수 없어.’
골렘 제작법은 지식이 있다고 해서 뚝딱뚝딱 만들 수 있는 종류의 기술이 아니다.
관절의 체계와 출력을 입력하는 과정은, 골렘 제작에 익숙한 기술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합동 발표’였다.
졸업 발표회는 무조건 개인이 진행할 필요가 없다.
필요하다면 합동 발표도 가능하지만, 웬만한 학생들은 합동 발표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합동 발표는 학생들이 힘을 합쳐서 좋은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 방법이나, 심사할 때 더 높은 결과물을 요구받는다. 개인의 발표는 5정도로도 졸업을 할 수 있다면, 합동 발표는 8이상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골렘 제작에 능한 사람. 그런 사람이 필요해.’
아마 강민혁이 합동 발표를 제안한다면 상대는 기겁할 것이다.
강민혁은 마법 아카데미의 열등생.
그런 사람이 발표를 같이하자고 말하는 것은, 무임승차를 하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걸 설득하는 것은 강민혁의 몫이다.
골렘 제작법이라는 신기술을 쥐고 있는 이상, 상대를 충분히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상대의 조건이었다.
‘골렘 제작에 능숙하며,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해. 적당히 어리숙한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어떤 제안을 하더라도 골렘 제작에 눈이 멀어 받아들일 만한 인물. 그런 상대가 필요해.’
발품을 팔았다.
조건에 부합하는 상대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마침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는, 매우 유명한 인물이 한 명 있었다.
강민혁이 찾아가서 곧바로 합동 발표를 제안하자, 그가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리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내가 왜 너랑 발표를 해?”
골렘 술사 명가의 후손.
잭 그리핀 (Jack Griffin)의 반응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