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29. 파격적인 행보(3) >
바로 다음 날.
박동진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연히 강민혁과의 갈등을 예상했던 기자들은, 박동진의 발언에 상황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예전부터 저는 강민혁이라는 사람이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더블 캐스팅, 마법의 형태 변화, 마나 동화, 의료 마법 등등. 강민혁님은 마법 학계의 발전이라는 순수한 목적을 위해서, 그간 엄청난 값어치를 가지고 있는 마법 지식을 무료로 공개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마법 학계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마탑을 창설하겠다는데, 대체 누가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이 자리를 빌려 말씀드리건대, 한국 마법 협회는 강민혁님의 새로운 출발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입니다.”
파파팟.
플래시 세례가 터져 나왔다.
박동진의 발언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강민혁과 박동진의 파워 게임(power game)에서, 놀랍게도 박동진이 백기를 내걸고 투항을 선언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노선을 바꾼 박동진은, 강민혁의 나팔수가 되었다.
"사실 저는 얼마 전에 매우 부끄러운 제안을 받았습니다. 세계 마법 연합으로부터 강민혁님의 행보를 방해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어리석게도 당시에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세계 마법 연합의 위상이 저를 멍청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세계 마법 연합은 강민혁님의 선의로 인해 가장 많은 이득을 본 세력입니다. 그런데 강민혁님이 권력을 독식할 것을 우려한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마탑의 창설을 방해하는 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우리가 강민혁님을 지켜야만 합니다. 마법 학계가, 그리고 한국 마법의 미래가 밝아지기 위해서는 결국 발전하지 못하는 사회가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박동진의 정치력은 연기에 있었다.
훌륭한 호소력이었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감탄했다.
그렇게 연설이 끝났다.
결국 강민혁에게 굴복했다는 사실을 증명한 그에게, 한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공개적으로 세계 마법 연합을 비난했습니다. 그 뒷감당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공격적인 질문.
해당 기자는 세계 마법 연합의 사람이었다.
박동진은 싱긋, 웃어 보이고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본인도 안다.
세계 마법 연합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한국 마법 학계가 앞으로 엄청난 공격을 받을 거라는 사실을.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결국 멀리 있는 적보다 가까이 있는 적이 무서울 수밖에 없는 법. 정부가 강민혁의 편을 들어준 이상, 사실상 내 선택은 이미 정해졌어. 한국이라는 땅덩어리에서 한국 정부가 외면하는 길을 걷느냐, 아니면 세계 무대에서는 외면받을 수 있으나 당장의 안위를 지키는 선택을 하느냐. 정답은 간단하지.’
세계는 결국 세계다.
고향에서 잘 사는 것이 중요하지, 바깥에서의 평판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마나석의 가격을 깎아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어.’
강민혁의 당근은 적절했다.
강민혁은 박동진이 나팔수의 역할을 맡는다면, 붉은 마나석의 공급은 물론이고 시장 가격보다 10% 낮춘 가격만 받겠다고 말했다. 말이 10%지, 그걸 돈으로 환산하면 상당한 금액이다. 처음에는 강민혁을 찾아간 일에 자존심이 무척 상했던 박동진이지만, 확실한 보상을 제시하는 강민혁과의 거래에 지금은 강민혁을 비난하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진 뒤였다.
“이렇게 된 이상 이겨라. 세계 마법 연합의 공격을 버텨내고 반드시 살아남아라. 그래야, 우리도 사니까.”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갈대 같다.
당근 하나.
겨우 당근 하나에, 박동진은 강민혁의 승리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었다.
적이라 할지라도 ‘선’을 넘지 않는 이상 필요하면 언제든 품어라.
그것이 강덕철의 가르침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만 걸러서 받다 보면 끝이 없다.
필요에 따라 사람을 받아들이고, 힘으로 그들이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억압하는 것.
강민혁은 강덕철의 철학을 지켜보며 자랐다.
강민혁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양면(雨面)이 있다. 겉으로는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속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고영철과 같이 오랜 시간을 투자해서 얻은 사람들은 그래도 신뢰 관계를 맺을 수 있으나, 모든 인간관계가 그처럼 이상적일 수만은 없다. 결국 얕은 인간관계도 필요하고, 강민혁은 그러한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신뢰’를 얻는지를 알고 있다.
바로 확실한 이득.
채찍과 당근만 적절하게 이용한다면, 절대 상대 쪽에서 신뢰 관계를 무너트리지 못한다.
그렇게 박동진을 받아들였다.
박동진이라는 인간 자체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한국 마법 협회라는 위치는 어느 정도 이용할 필요성이 있었다. 박동진은 선을 넘기 전에 빠르게 투항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강민혁을 찾아와 새파랗게 어린 사람을 상대로 고개를 숙인 순간부터, 그에게는 이용할 가치가 생겼다.
나팔수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세계 마법 연합은 비난을 받았고, 잠시 동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태도를 바꾸는 건 아니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한다고 해서 강민혁을 받아주기엔, 이번 파워 게임에 걸린 대가가 너무 컸다.
한참 바깥이 시끄러울 그 시각.
강민혁은 몇몇 세력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그들은 세계 마법 연합에 가담하지 않은, 강민혁이 판단하기에 아군으로서의 가능성이 있는 세력들이었다.
영국, 독일, 캐나다 마법 협회.
그리고 5개의 마탑.
상당히 초라한 인원이었다.
그나마 영국과 독일이 있어서 망정이지, 나머지 6개의 세력은 마법 학계에서 이름값이 높지 않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영국 마법 협회였다.
웨인 번즈가 말했다.
“제가 강민혁님의 선택을 지지한 이유는, 강민혁님이 강조한 ‘꿈’이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마법 학계와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마냥 긍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 자리에 모인 8개의 세력을 제외하고는, 백 개가 넘어가는 크고 작은 세력들이 세계 마법 연합에 동조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는 아주 큰 문제입니다. 마법 학계에서 고립이 된다는 것은, 자생(自生)이 불가능한 부분에서 말라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해답을 제시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위험성을 감당해야만 하는 근거를 말입니다.”
웨인 번즈가 총대를 멨다.
그는 위험한 선택을 내렸다.
그러니, 강민혁에게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다.
“옳은 말씀이십니다. 마법 학계에서의 고립은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고립.
단순히 따돌림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마법 학계와의 교류가 중단되는 것은 물질적인 것도 포함되고, 그로 인해서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거래가 끊긴다. 마나석, 아티팩트, 마법서, 인력 등등. 마법적인 모든 것을 다른 세력과 교류할 수 없으며, 다수의 세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고립된 세력을 공격할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독일의 경우에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독일은 게이트가 형성되는 경우가 잦은 지역인데, 보통 세계 마법 연합의 구성원인 주변국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그런 지원이 끊긴다면? 독일은 매일 위험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듯, 단순히 재정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많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저는 고립으로 인한 문제를 위해서 많은 도움을 드릴 생각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마나석 시장을 독점하고 있고, 남들보다 뛰어난 마법 지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초반에 힘든 건 저도 이해합니다. 자리를 잡기까지, 주변의 견제에 위험한 나날이 계속되겠지요. 하지만 장기전으로 진행될수록 유리한 건 저희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장의 힘은 세계 마법 연합이 강하다 할지라도, 저라는 사람의 미래가 그것을 뛰어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설득력이 있었다.
기나긴 싸움.
시간이 지날수록, 무조건 강민혁이 유리하다.
마나석 시장은 마르지 않는 우물이고, 우월한 마법 지식에서부터 비롯된 인재들이 탄생할 테니 말이다.
무너지지만 않는다면 이기는 싸움.
다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웨인 번즈가 모두의 의견을 대표했다.
“혹시 준비한 세력이 어느 정도나 되십니까? 마탑의 창설은 어린애 소꿉장난이 아닙니다. 만약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마법 학과 학생들을 몇 명 데리고 마탑이랍시고 선포한다면, 그때는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앞으로의 꿈? 좋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도 중요합니다. 강민혁님이 아무리 대단한 존재라 할지라도, 혼자서 마탑이라고 주장한다면 아무도 그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큰 문제 중 하나.
사실 이미 그에 대한 해답은 있었다.
강민혁은 자신에게 동조하기로 한 사람들의 이름을 밝힌다면, 그것은 단번에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이들은 박동진과의 관계와는 다르다.
박동진은 오로지 거래만 보았다면, 이들과는 신뢰 관계가 필요하다.
맹목적으로 믿지는 않겠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옥석(玉石)을 가려낼 필요성은 있다.
“그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저에게 조력할 몇몇 인물들의 동의를 얻어냈습니다. 만약 제힘이 의심된다면 창단식에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저를 믿고 끝까지 가실 의향이 있으신 분들은, 모든 위험을 충분히 고려하고 창단식에 참여해주십시오."
그게 마지막 약속이었다.
강민혁의 말을 끝으로 잠깐의 대화가 더 이어진 뒤에, 사람들은 결국 일어나서 자리를 떠났다.
그들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진실을 말해주었다면 결정이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선택의 기로에 선 그들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시간은 빠르게 지났다.
마침내 창단식 당일이 되었고, 강민혁의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완공된 마탑 앞에 설치된 무대로 모였다.
마탑의 위용은 대단했다.
그러나 감탄도 잠시, 독일 마법 협회의 마르코 도슨은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아무래도 위험한데.’
지난 자리.
영국, 독일, 러시아를 포함한 총 8개의 단체가 강민혁의 의지에 동조했는데, 오늘 방문한 단체는 겨우 5개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은 웨인 번즈와 존 웨슬리가 직접 나타나는 성의를 보였으나, 러시아 마법 협회와 2개의 마탑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러시아 마법 협회는 세계 마법 연합의 스파이였다.
그들은 애초에 강민혁을 따를 생각이 없었지만, 강민혁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일부러 나섰다.
그 결과 소문이 퍼졌다.
강민혁이 만들어내려는 마탑이, 실속이 없는 깡통이라고 말이다.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실 이번 결정은 마르코 도슨이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독일 마법 협회장은 아무리 그래도 세계 마법 연합과 어긋나는 노선을 걷는 것은 위험하다고 말했지만, 마르코 도슨은 자신이 경험한 강민혁이라면 반드시 수가 있을 거라고 말했다. 만약 마르코 도슨이 얼굴을 붉혀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이번 창단식에 참여하는 마법 협회는 영국과 한국밖에 없었을 것이다.
심각한 열세.
만약 강민혁이 판을 뒤집지 못한다면, 초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매우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제대로 준비했어야 할 텐데.’
걱정이 컸다.
그러는 사이, 드디어 창단식이 시작되었다.
강민혁이 앞으로 나섰다.
많은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올라온 강민혁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웃었다.
‘예상대로네.’
많지 않았다.
창단식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눈치가 보이는 선택이다.
세계 마법 연합에게 밉보이기 싫어서 대부분 얼굴도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강화 전사들이 이 자리에 참석할 이유는 없었다. 비무행. 그로 인해 강민혁은 인정을 받았지만, 동시에 공공의 적이 되었다.
참석한 사람보다 기자가 많은 상황.
세계 마법 연합의 의도는 먹혔다.
결국 기득권의 힘은, 새로운 세력이 자라날 수 없도록 그 시작부터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족스러웠다.
영국과 독일, 그리고 세 개의 마탑.
생각 이상의 결과다.
사실 영국만 편을 들어주어도 이득이라고 생각한 상황에서, 강민혁은 네 개 세력의 믿음을 더 얻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판을 만들어야겠지.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이 아니야. 세계 마법 연합은 나와 완전히 반대되는 노선을 걷겠다고 선택 했고, 그들을 굴복시키고 하나의 세력으로 규합해야만 게이트 너머의 몬스터들을 소탕하는 것이 가능해. 첫인상은 강하게. 멀리서 창단식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
판은 깔렸다.
그리고, 이 판을 뒤집을 자신도 있었다.
강민혁이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창단식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와 같이 마탑을 이끌어가기로 하신 분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비장의 카드.
쇼타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