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 26. 수확의 계절(6) >
공간 마법 .
이번 실험은 이학범에게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이전에는 강민혁의 실험을 도와주는 역할이었다면, 영국행은 강민혁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았다.
‘순수하게 내 능력을 시험해보자.’
궁금했다.
연구자로서의 자신은 어느 수준에 머무르고 있을까.
강민혁과 같이 연구를 진행하며 자신의 기량이 많이 향상되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강민혁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있다 보니 자신의 수준을 책정할 수 없었다. 고로 영국행은 이학범에게 있어 도전이었다. 마법 학과라는 우물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능력을 검증했다.
그 결과.
이학범은 자신이 새로운 경지에 올라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전과는 달라. 연구의 흐름이 눈에 보이고, 문제가 생기면 그걸 개선할 방향이 머릿속에 떠올라.’
영국 마법 협회의 연구자들.
그들은 세계 최고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도 애를 먹고 있는 모습에, 이학범은 본인의 생각을 말했다.
“...혹시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조심스러운 물음.
처음에만 해도 연구자들은 이학범의 말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학범은 아직 영국 마법 협회 연구자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외부인인 그의 의견은 신빙성이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금방 변했다.
이학범의 의견은 항상 적절했고, 연구가 점점 앞으로 나아가는 상황에 그들은 이학범을 인정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이학범 교수님, 방금 말씀하신 것을 혹시 자세하게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정말 대단해요! 아아, 이학범 교수님이 없었다면 이번 실험은 난관에 부딪혔을 거예요.”
연구의 중심.
이학범이 핵심이 되었다.
웨인 라피에르를 포함한 연구자들은 이학범을 중심으로 뭉쳤고, 이학범은 주도적으로 연구팀을 이끌었다. 답보 상태에 머물던 연구가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강민혁이라는 괴물과 같이하면서 이학범의 머리가 열렸고, 이학범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능력을 갖추었다.
그렇게 연구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연구자들의 존경 어린 시선을 받으며, 이학범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성취감이 차올랐다.
‘나도 할 수 있어.’
한때는 본인의 한계를 의심했다.
고리타분하고 빡빡한 자신의 성향이, 연구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웨인 라피에르조차 자신의 실력에 박수를 치는 모습에, 이학범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딱 그때였다
이학범이라는 연구자의 정신이 더욱 강인해진 그때, 웨인 번즈는 그와 만남을 청했다.
웨인 번즈는 솔직한 사람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말을 빙빙 돌리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이득을 제시했다.
“이번 실험을 통해 이학범 교수님의 실력에 정말 감탄했습니다. 저는 이학범 교수님을 정식으로 영국 마법 협회에 영입하고 싶습니다. 제가 약속해드릴 수 있는 것은 웨인 라피에르와 같이 하나의 팀을 운영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연구팀의 예산은 일 년에 최소 1억 파운드(1,534억) 이상이며, 상황에 따라 추가 지원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학범 교수님이 바라는 연봉이나 조건이 있다면, 저희는 무조건적으로 그 조건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백지 수표를 내밀었다.
이건 누구든 혹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명예를 바란다면 연구팀에 반할 것이고, 부를 바란다면 백지 수표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것이다.
제안은 적절했다.
문제는, 이학범이라는 사람의 신념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돈과 명예에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오로지 마법의 발전이고, 그래서 강민혁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대체 왜 강민혁의 곁이어야만 하는 겁니까? 이학범 교수님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연구자이십니다. 영국 마법 협회에서 팀을 이루고 연구를 진행하신다면, 앞으로 마법을 발전시킬 수많은 연구를 성공시킬 것이라 확신합니다. 강민혁이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이학범 교수님이 ‘주인공’으로서 빛나기를 바랍니다.”
주인공.
사람들은 대부분, 조연이길 바라지 않는다.
이학범은 강민혁의 그림자에 가려졌고, 웨인 번즈는 그러한 부분에 감정을 호소하며 상대를 자극했다.
맞는 말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웨인 번즈의 의견에 동조할 것이다.
이학범이 말했다.
“지난 몇 개월간 저는 연구자로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게 제 안에 내재된 잠재 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강민혁이 없었다면 애초에 발전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왜 연구에 악착같이 매달렸는지 아십니까? 강민혁의 곁에 남으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민혁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저를 움직이고 발전하게 만듭니다.”
복잡한 감정이었다.
처음에는 강민혁의 재능에 감탄했고, 다음에는 자신에게 실망했으며, 어느 순간에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은 현재를 즐겼다.
큰 부담감을 내려놓으니, 연구자로서의 삶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한때는 강민혁이 미래에서 왔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의 모든 연구는 현재의 세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시작점에서부터 출발하며,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은 마법 학계를 발전시켰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주인공의 역할이 아닙니다. 저는 제 능력이, 강민혁이 연구를 함에 있어 조금의 도움이라도 된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강민혁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가 마법 문명을 발전시킬 것이고, 저는 그의 곁에 남아 그것을 도울 것입니다.”
발전.
이학범은 강민혁의 곁에 남기 위해서 진화했다.
강민혁이라는 강력한 동기가 이학범을 성장시켰고, 그는 늦은 나이에 꽃을 피웠다.
".........."
웨인 번즈가 말을 잃었다.
이학범의 말에서, 강민혁을 향한 강한 신뢰를 보았다.
그는 유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강민혁이야말로 마법 발전의 희망이라고 믿는 그는, 다른 그 어떤 가치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확고한 태도.
이학범이 확실히 종지부를 찍었다.
“저도 영국 마법 협회가 싫은 것은 아닙니다. 뛰어난 연구진, 훌륭한 연구 환경. 이곳에서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연구자에게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지만 제가 영국 마법 협회로 소속을 옮기는 것은 단 하나의 가능성밖에 없습니다. 바로 강민혁이 영국 마법 협회에 입회하는 것. 그가 그러한 선택을 내린다면, 저는 협회장님이 말한 조건들이 없다 할지라도 알아서 따라올 겁니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학범의 가치를 낮게 평가했을 때는 단순히 1+1로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1이 크게 다가왔다.
결국 다시 강민혁으로 돌아왔다.
이학범을 반드시 영입하고자 했으나, 그가 말한 대로 이학범의 영입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문제는 강민혁을 어떻게 영입하느냐지.’
강민혁.
그는, 영국 마법 협회로서도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름이었다.
그 시각.
강민혁은 고영철을 만났다.
"박무철의 일은 잘 처리했어. 그리고 상황은 네가 계획했던 대로 진행되고 있고. 그런데 이학범 교수가 영국 마법 협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리라는 사실을 예상했던 거야? 너는 이학범 교수가 마법 학계에서 인정을 받길 원했는데, 딱 적절한 타이밍에 결과를 보여주었잖아. 영국 마법 협회의 연구는 아직 발표 단계가 아니라서 일반인들은 이학범의 성과를 알지 못하겠지만, 벌써부터 마법 학계에서는 이학범이야말로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연구자라고 말하고 있어.”
“예상했다기보다는 믿은 거지. 난 이학범 교수님이, 뛰어난 연구자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거든.”
상황은 이상적이었다.
정상훈은 마법의 천재로서 명성을 날렸고, 이학범은 마법 학계에서 연구자로서 인정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재명은 사람들에게 세계 최고의 마법사라고 불렸다.
유일무이(推一無二)한 6서클 마법사라는 타이틀은 특별했고, 그의 밑으로 실력 있는 마법사들이 몰려들었다. 가끔은 6서클 마법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경우에는 고영철의 도움을 받아서 적절하게 걸러냈다. 지금 남아 있는 약 50여 명 정도의 마법사들은, 진심으로 유재명에게 반해서 마법사로서 발전하기를 원하는 이들이었다.
정상훈, 이학범, 유재명.
그들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고영철은 정보 부대의 세력을 세계로 넓혀가고 있었고, 마나석 시장의 경우에는 확실히 장악했다.
그리고 김성호 일행.
S급 던전 암흑 도시에서 디펜더의 역할을 맡았던 그들은, 아예 강민혁의 계획에 동조하고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디펜더를 희망하는 사람들. 그들이 김성호를 중심으로 모여 본격적으로 디팬더로서의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는 방법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마탑.
서울 중심부에 마탑이 건설되고 있었다.
이촌역 근처 국립중앙 박물관이 있었던 위치에, 기존의 건물을 허물고 새로운 형태의 마탑을 올렸다.
주변에 사는 주민들은 항상 그 마탑의 정체를 궁금해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건물을 짓는 것일까?
아직 완공되지 않았지만, 일반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세력에서도 마탑의 정체를 알아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용도가 마탑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고영철은 대리인과 차명 계좌를 활용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정체를 숨겼다. 적어도 음지의 세계에서, 고영철의 꼬리를 밟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착착 진행되는 계획.
고영철은 진심으로 감탄이 나왔다.
강민혁은 세력을 형성하기로 마음을 먹은 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정말 엄청난 일을 벌이고 있었다.
‘하여간 난 놈이라니까.’
예전에는 강민혁이 수호문의 가주가 되는 상상을 많이 했었다.
그건 정말 환상적인 일이었다.
강민혁이 수호문의 가주가 되었다면, 분명히 수호문은 엄청난 성세를 이루었을 것이다. 현재 수호문의 후계자인 이준호가 강민혁보다는 검술에 재능이 있다할지라도, 가주로서의 자질은 강민혁을 따라잡지 못한다. 강덕철의 피를 타고난 그이기에, 재능이 없음이 밝혀졌음에도 수호문에서는 강민혁을 내치는 선택을 섣불리 내리지 못했었다.
그리고 현재.
강민혁이 말했다.
“마탑의 발표는 기습적으로 이루어질 거야. 그리고 그 결과에 반발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강력한 임팩트를 선사해야겠지. 우리는 단순히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최고가 될 단 하나뿐인 세력을 만들려는 것이니 말이야.”
고영철이 피식 웃었다.
다음 계획을 그도 알고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강민혁이 다음 계획을 실행하고, 정상훈, 이학범, 유재명과 같은 이들이 마탑의 합류 의사를 밝힌다면?
세상이 발칵 뒤집힐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너무 흥분되었다.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고영철.
그는 이준호에게 ‘다음 세대의 권력’을 약속받았었다.
그러나 역시, 그걸 거절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강민혁은 사람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재능이 있단 말이지. 이래서, 이 녀석의 곁을 떠날 수 없어.’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는 음지(陰地).
그 그림자 안에서, 고영철은 활짝 핀 웃음을 보였다.
서울 은평구의 중심부.
그곳에는 강화 전사의 세력인 벽력문이라는 곳이 있다.
수호문을 포함한 4대 세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 호전적인 도법으로 상당한 세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특히 벽력문의 주인인 벽력문주는 A급 몬스터 수십 마리를 쓰러트린 경험이 있을 정도로 실력자였는데, 그 명성에 이끌린 사람들로 인해 문도의 수만 백여 명에 달했다.
평범한 오후.
벽력문에는 제자들이 수련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만 하더라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으나, 땀방울이 바닥을 적실 무렵에 한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벽력문의 문지기.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상대의 행색이 마법사의 그것과 같았다.
최근에 의료 마법이 생기면서 마법사의 세력이 커졌고, 그로 인해 벽력문은 상당한 반감이 있었다.
강화 전사는 주류다.
대세를 거스르려는 마법사들의 행보는, 주류의 심기를 건드렸다.
마법사가 말했다.
“세를 이룬 강화 전사들은 언제든 도전자를 반긴다고 들었습니다. 현판을 내건 것은 본인들의 실력에 자부심이 있다는 것이고, 도전자들의 위협에서도 현판을 지키는 게 그 세력의 힘을 증명하는 것이죠. 맞습니까?”
“맞습니다만, 그 대가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습니까? 도전에 실패하면 그에 대한 응징은 확실합니다. 몸이 성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막대한 보상금에 빈털터리로 쫓겨나간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문지기가 험악한 기세를 보였다.
간혹 도전자들이 나서기는 하지만, 마법사의 행색을 한 사람이 도전을 운운하는 게 열이 받았다.
후드 밑.
겉으로 드러난 입가가 씨익 웃었다.
마법사가 후드를 걷으며, 본인의 얼굴을 드러냈다.
“제 이름은 강민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벽력문에게 비무행(比武行)을 신청하겠습니다.”
비무행.
그것이 바로 고영철이 말했던 다음 계획의 정체였다.
1대1에서 마법사가 약하다는 상식이 당연한 이 세상에서, 상식을 무너트릴 임팩트를 선사하는 계획.
강민혁의 발언에, 평범했던 벽력문의 오후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