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100화 (100/197)

100화.  < 26. 수확의 계절(5) >

강민혁과 헤어지고.

정상훈은 곧바로 집으로 향했다.

과거의 위세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한 외관의 집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아버지와 대면했다.

겨우 며칠 사이에 아버지는 많이 늙었다.

초췌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순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정상훈은 표정을 굳히며 진심을 말했다.

“아버지, 빚 문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강민혁 스승님이 빚 문제를 해결해주셨고, 저는 앞으로 그분에게 평생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제가 3서클 마법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빚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분의 덕이니까요. 그러니 이만 정씨 가문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셔도 됩니다. 제가, 이 정상훈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을 이끌겠습니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후계 계승(繼承).

가주가 다음 세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훈은 직접 가주의 자리를 물려달라고 말했다.

정상훈의 아버지, 정문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말대로 무거운 짐이었지. 내가 가주의 자리를 맡기 전부터 정씨 가문의 위세는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고, 아무리 발악해도 그러한 현실을 바꿀 수 없었단다. 사채를 끌어 마법 사업에 투자했던 것은, 가주로서 무엇인가를 남기고자 했던 내 마지막 발악이었지.” 정문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들 몰래 사업을 벌이고서, 그는 매일 밤 기도를 드렸다.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가 하늘에 닿아 성공하기를, 아들에게 자랑스러운 가문을 물려줄 수 있기를.

그러나 현실은 잔인했다.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상황에, 정문성도 자신의 그릇을 깨달았다.

“무력하게 30억의 빚을 대물림한 순간부터, 나 또한 정씨 가문 가주의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미안하다. 너에게, 이름밖에 남지 않은 가문을 물려주어서. 다른 사람들은 가문의 덕을 받고 승승장구하는데, 너는 오히려 가문의 빛바랜 명성이 발목을 붙잡는구나.”

가주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

그것은 권력의 대물림이 아니다.

정씨 가문이라는 이름에서부터 내려오는 부담감을, 정문성은 감당하지 못해 결국 포기하는 것이다.

미안했다.

앞으로 아들이 걸을 가시밭길을 알기에, 울컥거리는 감정을 조절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있다.”

“말씀하세요.”

“강민혁, 그를 믿을 수 있겠느냐?”

정문성은 이제 무대에서 내려온다.

앞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기에, 정상훈을 이끌고 있는 강민혁에 대한 불안감이 생겼다.

강민혁.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문성은 애초에 강민혁에게 콩고물이라도 얻으려고 정상훈을 붙였던 것이지만, 정상훈이 진심으로 믿고 따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올바른 사람의 뒤를 따라가느냐. 그에 따라 정상훈의 인생은 크게 변할 것이며, 강민혁이 자신의 사람을 아끼지 않는다면 토사구팽(免死拘哀)을 당할지도 모른다.

현실이 그렇다.

정문성도, 자신의 최측근이 돈을 가지고 도망칠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정상훈이 뜸을 들였다.

이윽고,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예. 스승님은 저를, 그리고 정씨 가문을 영광의 길로 인도하실 분입니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던 하루.

햇빛이 창문을 통해 집안을 비추던 그 날, 정상훈은 정문성으로부터 정씨 가문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정상훈은 다짐했다.

‘앞으로는 정씨 가문의 부흥과 스승님. 딱 두 가지만을 보고 달려나간다.’

훗날 대마법사라 불릴 사나이.

그의 근간이 되는 뿌리가, 마음 깊숙이 단단히 자리를 잡는 순간이었다.

마법 학계가 떠들썩했다.

이유는 바로 마법 천재의 탄생 때문이었다.

성동구에서 진행된 마법 대회에서 우승한 정상훈은, 며칠 뒤에 또 다른 마법 대회에서도 우승했다.

문제는 바로 그 마법 대회에 상당한 실력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19세 이하의 선수 중에서 이름을 날린다는 마법사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그중에는 미국의 마법 천재라고 불리는 에릭 슈미트(Eric Schmidt)도 있었다. 에릭 슈미트는 무려 18살의 나이에 3서클의 경지에 오른, 현재 미국이 주목하고 있는 최고의 유망주였다. 19세 이하의 대회에서 에릭 슈미트의 상대가 없을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는데, 그걸 정상훈이 박살을 냈다.

결승전.

정상훈과 에릭 슈미트와의 대결에서, 정상훈은 압도적인 마법 컨트롤로 에릭 슈미트를 무너트렸다.

그에, 미국 언론이 화들짝 놀랐다.

[.......미국의 천재 마법사 에릭 슈미트가 한국의 정상훈에게 패배했다. 결승전의 내용은 조금도 부정할 수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에릭 슈미트는 시종일관 정상훈을 상대로 주도권을 가져오지 못했고, 정상훈은 치밀한 마법 연계로 에릭 슈미트에게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결승전이 끝나고, 본 기자는 정상훈의 이름을 수소문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났단 말인가? 정상훈은 겨우 17살의 나이에 3번째 서클을 형성했으며, 마법을 사용하는 모습은 노련한 경험이 엿보였다. 알고 보니 그는 과거 마법의 명가라 불리던 정씨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의 우승은, 정씨 가문이 부활했다는 신호탄을 터트렸다.]

대서특필.

미국 언론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세계 마법 학계가 정상훈을 주목했다.

[정상훈, 그는 누구인가?]

[한국에서 태어난 대마법사의 재능]

[17살에 3서클, 그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여러 세력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몇몇은 벌써부터 정상훈을 영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정상훈의 인터뷰가 원천 봉쇄를 했다.

“일단 이렇게 마법 대회에서 우승하게 되어서 정말 기쁩니다. 제가 우승하는 과정까지 주변의 많은 도움이 있었습니다. 마법 학과의 교수님들이 양질의 가르침을 내려주셨고, 최병호 학과장님은 제가 마법 대회에 도전할 수 있도록 진심 어린 응원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강민혁.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라는 사람은 없었을 겁니다. 정말 진심으로, 그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아직 강민혁에 대한 언급은 아꼈다.

마법 학과에 확실한 애정을 보임으로써, 그는 주변의 제안을 거절할 명분을 만들었다.

정상훈의 비상.

그의 행보에, 사람들은 마법 학과를 주목했다.

-마법 학과에 뭐가 있나?

-진짜 당장 마법 학과에 입학해야 하나 봐. 세계 최고의 마법사인 유재명도 마법 학과의 출신이고, 이번에 정상훈도 배출해냈잖아. 무엇보다도 강민혁이 마법 학과의 학생이야. 마법 혁명부터 시작해서 그간 이루어낸 업적이 한둘이 아닌데, 그 또한 마법 학과에서 공부했어.

-우연도 반복되면 필연이라고 했어. 분명히, 마법 학과가 그만한 가르침을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마법사는 무조건 한국으로 가는 게 답이네.

최병호가 기쁨의 비명을 지를 만한 반응이었다.

마법 학과의 주가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마법 학과 출신들이 보여주는 특별한 성과에, 당연히 마법 학과의 가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 마법 학과로 시끄러울 그때.

마법 학과의 또 다른 인물이 표면 위로 떠올랐다.

그는 바로 이학범이었다.

세간에 이학범의 평가는 어떨까.

위대한 학자?

강민혁과 같이 대단한 연구를 성공시킨 연구자?

아니다.

강민혁은 발표를 위해 이학범을 내세웠지만, 그 누구도 이학범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학범이 대단한 연구자라고? 솔직히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하겠어. 이학범도 본인이 직접 인터뷰에서 밝혔잖아. 이제껏 성공한 연구는 90%이상 강민혁이 완성하면,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숟가락을 얹는 것 정도에 불과했다고. 더블 캐스팅, 마나 동화. 현재 마법 학계에 크나큰 변화를 일으켰던 연구는 이학범의 성과가 아니야. 강민혁이 왜 항상 이학범을 연구의 일원으로 받아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마법 혁명만 보더라도 모든 지식의 원천은 강민혁으로부터 비롯돼.

강민혁은 밝게 빛났다.

그로 인해 드리우는 그림자는, 이학범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한국에서는 알아주는 연구자인 이학범이지만, 세계 무대에서는 그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이학범이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은 정확히 3개월 전의 일이었다.

영국 마법 협회는 아주 특별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난관에 부딪히는 바람에 마법 학과에 도움을 요청했다. 정확히는 강민혁의 도움을 바란 것이었는데,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 나섰다.

“이학범 교수님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분이라면, 분명히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당시 강민혁은 폐관 수련 중이었다.

강민혁을 대신해서 이학범이 나섰고, 영국 마법 협회로서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으나 상당히 실망했다.

막말로 영국 마법 협회에는 이학범 이상의 연구자들이 넘쳤다.

특히 수석 연구자인 웨인 라피에르의 경우에는, 강민혁도 감탄시킨 엄청난 실력자이지 않던가. 이학범의 도움은 딱히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마법 학과의 호의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학범과 마법 학과 모두 강민혁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에, 적당히 장단에 맞추어주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정확히 3개월 뒤.

영국 마법 협회 내에서 이학범의 평가가 완전히 달라졌다.

수석 연구자 웨인 라피에르는 잔뜩 격양된 표정으로, 협회장인 웨인 번즈에게 말했다.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아직은 작은 돌멩이 하나를 보내는 정도지만, 분명히 ‘차원의 통로’를 이용해서 돌멩이의 공간 이동을 성공시켰습니다! 이는 정말 대단한 성과입니다! 우리는 그간 꿈으로만 상상했던 공간의 영역에 발을 들였고, 이번 발견으로 공간 마법은 엄청난 발전을 이룰 겁니다!”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간 마법.

마법사들이 그토록 바라던 미지의 영역이었다.

정령 마법과 같이 웨인 라피에르가 매달리던 것인데, 이번에 드디어 소기의 성과를 얻어냈다.

그 과정에는 이학범의 덕이 컸다.

“이학범 교수를 초빙한 것이 신의 한 수였습니다. 대체 왜 그 정도의 인물이 세계 마법 학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겁니까? 공간 마법의 중요한 단서를 그가 발견해냈습니다. 만약 이학범 교수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공간 마법의 실마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헤맸을 겁니다.”

“...그 정도입니까?”

“그 이상입니다. 이학범 교수의 합류는, 단순히 단서를 찾은 것을 떠나 연구팀의 능률이 올랐습니다. 그는 마치 연구실의 마에스트로 와도 같았고, 저도 그에게 배움을 청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웨인 라피에르는 천재다.

그러나, 이학범은 연구실의 ‘머리’로서 탁월한 재능을 갖추었다.

웨인 라피에르가 이렇게 극찬하는 경우는 드물기에, 웨인 번즈로서는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이학범을 잘못 판단했던 건가?’

솔직히 말해서 이학범은 영입 명단에 없었다.

강민혁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1+1로 데려오면 몰라도, 그가 중요한 인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이학범의 포텐이 진짜라면, 이전에 있었던 일들도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강민혁의 발표가 전적으로 그의 공이라고 생각해. 이학범의 인터뷰를 보면 그게 실제로 맞는 말이겠지만, 강민혁이 이학범을 끝까지 놓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야. 이학범은 대단한 연구자고, 실제로 강민혁의 연구에 도움이 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거지.’

강민혁과 관련된 이름.

정상훈과 이학범.

정상훈은 전에는 몰랐으나, 인터뷰에서 강민혁을 언급하면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의 포텐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학범의 경우에는 실제 결과로 증명했기에, 웨인 번즈는 이대로 구경만 할 수는 없었다.

웨인 라피에르와의 대화가 끝났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수하에게 연락했다.

“지금 당장 이학범 교수님을 내 방으로 모셔와.”

강민혁은 놓쳤다.

그는 모두가 군침을 흘리는 대어지만,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어서 지금은 방관하고만 있었다.

그러나 이학범은 다르다.

그는 영국에 있다.

그리고, 같이 실험에서 성과를 이루었다.

연구자에게 이보다 더한 기쁨이 어디에 있겠는가?

웨인 번즈는 열망에 타오르는 눈빛으로, 이학범에 대한 의지를 표출했다.

“그만은 반드시 영입한다. 그의 영입은, 영국 마법 협회의 퀄리티를 한 단계 더 높여줄 테니까."

강민혁이라는 배경을 떠나.

그것은 순수하게 연구자 이학범에 대한 욕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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