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26. 수확의 계절(4) >
처음엔 무시했다.
60억이 걸린 상황에 전화라니.
그러나 쉬지 않고 울려대는 전화기에, 박무철은 결국 강민혁이 보는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
[사장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사업장에 헌터 관리국 애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저희가 이제껏 저질렀던 불법 행위 정황을 모두 알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제대로 작정한 것 같습니다. 이를 어찌해야 합니까? 영장을 가져와서, 관리국 애들이 사업장 자료를 가져가는 걸 막을 수가 없습니다!]
“뭐라고?”
박무철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헌터 관리국이라니.
그 말인즉, 공권력(公權刀)이 움직였다는 의미다.
박무철은 표면적으로는 헌터 캐시를 깨끗하게 운영한다. 세금도 납부하면서 범죄자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 이면에는 온갖 비리가 많다. 정상훈과 같은 케이스. 정말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나타나면, 그때는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어떻게든 상대의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헌터 캐시가 아무리 규모가 있는 사업체라지만, 헌터 관리국에 찍히고 살아남기란 매우 힘들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전화기에는, 방금 전화를 제외하고도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박무철은 그중 하나에 전화를 걸었다.
“넌 또 무슨 일이야?”
[이번에 작업을 치던 조동필의 일이 잘못됐습니다.]
“그게 왜 잘못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조동필의 발목에 족쇄를 거의 채웠다고 생각했는데, 방금 전에 갑자기 찾아오더니 저희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옭아맸다는 증거 자료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한바탕 난리가 났습니다. 조동필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전에는 아내의 치료비를 명목으로 돈을 빌린 거라 얌전하게 당해줬는데, 사실을 알고 나니 우리 애들을 완전히 박살을 내버렸습니다.]
“아아.”
현기증이 일었다.
몸에서 피가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조동필.
그는 정상훈과 같은 케이스였다.
야만 전사라고도 불리는 그는, 용병으로 상당한 명성을 떨친 강화 전사다.
그런데 아내의 치료비로 막대한 수술비가 필요하자, 그는 잠깐 돈을 빌릴 생각으로 박무철을 찾았었다. 그게 함정의 시작이었다. 박무철은 어떻게든 조동필이 돈을 벌 방법을 차단하였고, 산처럼 불어나는 이자로 인해서 조동필은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사실 조동필 정도의 능력이라면 돈을 버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박무철이라는, 독사 같은 방해꾼만 없었다면 말이다.
“빌어먹을.”
보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헌터 관리국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버릴 것이고, 조동필 정도의 실력이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
벼랑 끝.
암담한 상황에, 박무철은 뒤늦게 강민혁이 시야에 들어왔다.
“너 이 새끼..!”
확실하다.
문제의 시작은 바로 저 녀석이다.
강민혁이 전화를 걸어 시작하라고 말하는 순간, 헌터 캐시를 옭아매는 모든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전화를 받기 두려웠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강민혁이 말했다.
“그래서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드리는 기회를 거절하면 후회하게 될 거라고.”
“지랄하지 마, 이 새끼야. 이 정도로 준비했다면, 애초에 나를 묻어버릴 생각으로 찾아온 거겠지.”
“그건 그쪽 마음대로 생각하시죠.”
강민혁이 피식, 웃었다 박무철의 눈빛에 살의(殺意)가 맴돌았다.
이미 자신은 무너졌다.
빌고 빈다고 해서, 상대는 자신을 구제해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딱 하나다.
‘강민혁을 담그고 내 이름을 남긴다.’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박무철이라는 사람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래야 1년이 지나든, 10년이 지나든.
자신이 재기할 판이 마련된다.
박무철이 사나운 이빨을 드러냈다.
“공격해!”
벼락같은 명령.
강민혁 뒤에 있던 수하들이, 일제히 강민혁을 덮쳤다.
“죽어!”
“건방진 새끼!”
박무철의 수하들.
그들의 무기가 바람을 갈랐다.
그들 또한 강화 전사기에, 오라로 일렁이는 무기가 단번에 강민혁의 몸을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검에 베어지기 직전.
강민혁의 몸이 사라졌다.
“블링크.”
팟.
“허억.”
“어, 어디 갔어?”
박무철의 수하들이 당황했다.
블링크는 이 세상의 마법이 아니다.
강화 문명은 아직 ‘공간의 마법’을 개척하지 못했고, 마법사가 사라지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몇 걸음 떨어진 거리.
강민혁이 나타나더니, 마나를 일으켰다.
“파이어 캐논(Fire Cannon)."
화아악.
각인 마법.
강민혁의 손등에서 일어나는 불빛이, 강력한 화염으로 변했다.
콰앙!
화르르르르르륵!
“크악!”
“크아아아악!”
박무철의 수하들이 불길에 휩쓸렸다.
강화 전사들은 웬만한 마법으로는 피해를 입힐 수 없다. 그러나 강민혁의 마법은 얘기가 달랐다. 파이어 캐논은 5서클의 마법이고, 최상급 마법을 사용함에 따라 6서클의 위력을 보인다.
A급 몬스터도 쓰러트릴 위력.
그걸, 박무철의 수하들이 버텨낼 리가 없었다.
“뜨, 뜨거워!”
“저 새끼 죽여!”
파박.
박무철이 땅을 박찼다.
그가 품에 있던 단검을 빼 들며, 잔뜩 충혈된 눈빛으로 강민혁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몸놀림은 정말 빨랐다.
사채 바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박무철은 이런 제한적인 공간에서 수많은 싸움을 벌였다. 이곳은 박무철의 홈그라운드. 강민혁이 어떻게 공간을 이동하고 마법을 빠르게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박무철은 자신의 힘이라면 강민혁의 목을 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확!
순식간에 다가오는 박무철.
그가 강민혁에게 단검을 찔러넣으려는 순간, 파이어 캐논의 잔여 불길이 마법으로 변했다.
“파이어 애로우.”
화염의 권능.
불길이 강민혁의 의지를 따랐다.
수십 발의 파이어 애로우가 박무철에게 작렬하자, 박무철은 몸을 날리던 그 모습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콰당!
화르르르륵!
뒤이어 달려드는 박무철의 수하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강민혁의 캐스팅은 오랜 시간이 소모되지 않았다. 캐스팅을 생략할 수 있는 마법으로 박무철의 수하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방해했고, 조금만 시간을 내주어도 강력한 5서클 마법이 발현되며 수하들을 휩쓸었다. 그렇다고 공격이 통하는 것도 아니었다. 간신히 다가가서 검을 휘두르는 박무철의 수하가 있었지만, 이번에도 블링크로 멀리 사라져버린 뒤였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박무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상대는 마법사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다수의 강화 전사를 상대하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고통을 호소하는 수하들.
십여 명이 넘어가는 수하들은, 어느새 대부분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빠득.
이를 악물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방은 먹여야만 한다.
박무철은 다시 달려들었고, 강민혁이 마법을 사용하자 마나를 끌어올리며 정면에서 맞섰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강력한 불길.
그에 피부가 모두 타버려도 좋다.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고 난 이후에 생기는 약간의 딜레이를 파고들어, 강민혁을 끝내려고 했다.
확-
볼길을 뚫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단검을 강하게 찔러넣었다.
“끝이다!”
확신했다.
이건 마법사가 막을 수 있는 공격이 아니다.
그런데.
“...?!"
강민혁의 침착한 표정.
그것을 보고 박무철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분명히 자신의 공격이 먹혔다고 생각했는데, 강민혁의 표정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단검이 박혔다
그 순간, 강민혁이 모습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미라지.”
파스스스스-
도미닉 그린.
그를 통해서 배운 마법이 박무철의 공격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도미닉 그린이 강민혁을 공략했던 것처럼 강민혁은 바로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번 플레어(Bum Flare).”
퍼엉!
화륵, 화르르르르륵!
강하게 일어나는 폭발!
그 엄청난 충격에 박무철이 나가떨어졌다.
피부는 검게 녹아내리며 타닥타닥 타들어갔고, 박무철은 더 이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름 본인만의 왕국을 세워나가던 헌터 캐시가, 그 위상과는 달리 허무하게 무너져내리는 순간이었다.
화륵, 화르르륵.
불길로 뒤덮인 사무실.
강민혁은 그곳에서 정상훈의 서류를 챙기고는, 밖으로 나오며 전화를 걸었다.
“수고했어. 뒷정리도 부탁할게.”
[그래.]
헌터 캐시는 오늘 몰락했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고, 그 과정에 강민혁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영철은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그리고 그에게, 원한 관계가 많은 박무철의 죽음을 처리하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강민혁은 곧바로 정상훈을 찾아갔다.
5개월 만의 만남에 정상훈은 반가운 기색을 보였으나, 그것도 잠시 서류를 확인하고는 표정이 굳었다.
강민혁이 말했다.
“궁금한 게 있다. 내가 붉은 마나석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왜 그걸 팔지 않았지?”
“...저는 이미 스승님에게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스승님이 붉은 마나석을 독점하고 있고, 그로 인해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하지만 스승님은 제게 훈련의 용도로만 사용하라고 허락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스승님과의 신뢰 관계를 무너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솔직한 대답이었다.
본인이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정상훈은 마치 죄인인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빚 서류.
저것이 강민혁의 손에 쥐어져 있는 이유는, 강민혁이 분명히 그만한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네가 예상하는 대로야. 나는 붉은 마나석의 비밀을 알아냈고, 아직 사람들이 그 가치를 모르는 사이에 붉은 마나석 시장을 독점했다. 그리고 내가 직접 붉은 마나석의 비밀을 공개했다.”
“예?”
정상훈이 놀랐다.
직접 붉은 마나석의 비밀을 공개했다니.
그가 알기로는, 시장의 상황에 의심을 가진 사람들이 연구 끝에 마나석의 비밀을 알아냈다고 들었다.
“붉은 마나석을 매입하고 한 달 이후부터, 사람들은 붉은 마나석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누가 대체 왜, 붉은 마나석을 휩쓸어가는 것일까. 그들은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일단 시장의 흐름에 따라 붉은 마나석을 매입하기 시작하더군. 그래서 적절한 타이밍에 ‘가상의 세력’을 만들어서 붉은 마나석의 비밀을 공개했다. 그래야 붉은 마나석의 가격이 폭등할 테고, 나는 이미 확보한 붉은 마나석으로 막대한 부를 쟁취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그렇게 금력(金刀)을 얻었다.”
덤덤한 음성.
하지만 그 내용은 엄청났다.
붉은 마나석의 독점은, 겨우 몇억 단위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감히 예상할 수는 없지만, 강민혁은 못 해도 조 단위 이상의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을 것이다.
“...그걸 왜 제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민혁은 본인의 힘을 밝혔다.
그게 가진 것의 일부이기는 하겠지만, 강민혁은 지금 정상훈을 상대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박무철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방관했지. 내가 너의 위험을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정상훈이라는 사람이 위기의 상황을 어떻게 모면하는지 보고 싶었다.”
정상훈
자신의 제자로서 이름을 날릴 사람이다.
그의 바닥이 생각보다 더 밑에 있다면, 강민혁은 정상훈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야만 한다.
“너는 옳은 판단을 보여주었다.”
붉은 마나석.
강민혁의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본인의 책임을 감당하는 자세를 보이며, 그것을 영리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최병호를 끌어들였다. 그 과정도 탁월했다. 본인이 3서클 마법사라는 사실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법을 알았다.
정상훈을 만났던 그 날.
강민혁은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둘의 신뢰 관계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을 그때, 강민혁은 정상훈을 받아들이는 판단을 내렸다.
수호문.
그곳에는 그렇게 강민혁을 따르는 사람이 많다.
보통은 같이 지낸 세월이 신뢰를 부여하지만, 반대로 먼저 손을 내밂으로써 신뢰가 형성되기도 한다.
정상훈은 말을 잃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강민혁의 시험에 통과했다고 좋아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던 강민혁의 모습에 소름이 돋아야 하는 걸까.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정상훈의 모습에, 강민혁은 빚 서류를 집어 들더니 그가 보는 앞에서 불을 붙였다.
“파이어.”
화르르륵.
빚 서류가 타들어갔다.
빚의 권리.
그것을 찾아온 이유는, 본인의 손으로 직접 없애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선을 넘은 박무철의 경우에는 조금의 자비도 베풀지 않았다.
그게 지도자의 자리다.
수호문에서 후계자의 수업을 받으면서, 강민혁은 필요에 따라 잔인해지는 법을 배웠다.
“이제 네 빚은 없다. 그리고 나는 네게 새로운 거래를 제안할 것이다.”
“그게 무엇입니까?”
"상훈아. 너의 아버지는 좋은 분이시지만, 30억이라는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들에게 대물림한 순간부터 정씨 가문의 가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 그러니, 네가 정씨 가문을 이어받아라. 내게 말했었지. 네가 바라는 목표는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거라고. 너는 겨우 17살의 나이에 3개의 서클을 형성했다. 세상이 널 주목할 때, 마법의 명가가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려라.”
이번 일.
강민혁이 방관을 택한 이유가 있었다.
정상훈이라는 사람을 시험한 것도 있었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정상훈이 주변의 상황을 정리하길 바랐다.
정상훈은 가문의 부흥을 바란다.
그런 그에게, 그의 아버지는 걸림돌이 된다.
부자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로서는 좋을지 모르나, 가주로서의 그는 절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30억의 빚은, 좋은 사람이라는 말로 넘어갈 수 없는 엄청난 재앙으로 정상훈을 괴롭혔을 것이다.
결단이 필요하다.
그가 정녕 남들보다 높은 곳에 서길 원한다면, 때로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태도가 필요하다.
자기처럼.
그리고 수호문의 강덕철처럼.
강한 세력에는, 항상 강인한 지도자가 있는 법이다.
“설마.........."
정상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문을 맡으라고 해서?
아니다.
강민혁의 말은 인정한다.
아버지가 30억의 빚을 떠 안긴 그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가문을 이어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빚을 감당했다.
그건 아버지의 책임을, 가주로서의 책임을 이어받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가 놀란 것은, 강민혁의 발언에서 ‘숨은 의도’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계획을 실행하실 생각이십니까?”
계획.
강민혁이 말했던 미래.
당황하는 정상훈을 바라보며, 강민혁은 확고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 빠른 시일 내로, 나는 새로운 마탑의 출발을 세상에 알릴 예정이다."
정상훈
그는 진짜 마탑의 일원이 되기 위한 시험에 통과했다.
이제는, 그간 뿌렸던 씨앗을 수확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