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98화 (98/197)

98화.  < 26. 수확의 계절(3) >

30억.

분명히 많은 액수다.

하지만 17살에 3서클 마법사라는 가능성을 생각하면, 30억을 갚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다만.

‘박무철이 나를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게 문제지. 내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사실을 알고, 어떻게든 빚을 늘리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야. 박무철의 표정은, 분명히 그런 의도가 보였어.’

탐욕으로 가득한 박무철의 웃음.

그의 의도를 알았지만, 정상훈은 거래라는 명목으로 일단 박무철과 그 패거리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일단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사채는 사채업자들만 탓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아버지는 돈을 빌렸고, 그들이 책정한 이자는 법에 어긋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고로 그들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정상훈은 아버지의 실수를 본인이 해결할 생각이지만, 박무철의 의도대로 따라줄 생각은 없었다.

정상훈은 곧바로 어디론가 향했다.

그곳은 바로 마법 학과 학과장실.

정상훈의 방문에, 최병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지?”

“잠시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숨을 골랐다.

강민혁에게 들었다.

최병호는 철저하게 본인의 이득을 추구하는 인물이라, 상황에 따라서는 효율적인 카드가 된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아버지가 사채를 빌려 쓰는 바람에 30억이라는 빚이 생겼습니다. 학과장님도 사채업자가 누군지 아실 겁니다. 헌터 캐시의 주인인 박무철인데, 이 바닥에서는 매우 유명한 사람이죠. 그래서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부탁?”

최병호의 표정이 탐탁지 않은 감정을 드러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

만약 30억을 갚아달라는 목적이라면, 그건 최병호의 능력 밖이다.

30억?

없는 건 아니다.

최병호는 학과장의 자리에서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그는 자신의 돈을 30억이나 투자하면서 정상훈을 도울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다고 학과의 돈을 끌어다 쓸 수도 없는 일. 최병호는 정상훈의 설명을 더 듣기도 전에 거절을 마음먹고 있었다. 정상훈이 강민혁 다음으로 자신이 기대하는 재능이라지만, 그 정도만으로는 최병호의 적극적인 태도를 끌어낼 수 없었다.

그때.

정상훈이 말했다.

“부탁을 드리기 전에,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이번에 3번째 서클을 형성했습니다.”

“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최병호.

17살에 3서클.

정상훈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정상훈.

그는 강민혁과 지내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들었다.

처음에는 정말 놀랐다.

자신과 같은 나이의 학생이, 어린 나이에 벌써 마탑을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말이다.

대단했다.

만약 강민혁이 마탑주의 자리에 오른다면, 정상훈 자신은 강민혁의 1대 제자가 될 터. 정상훈은 강민혁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노력했다. 그러한 모습에, 강민혁은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네가 마탑의 얼굴이 되기를 바란다. 마탑주는 선망의 대상이지만, 마탑의 진정한 뿌리는 그 밑에서 마법을 배우는 마법사들이다. 나는 그 중심에 네가 있기를 바란다. 그러니 마법 학과를 다니는 동안 네 능력을 마음껏 펼쳐라. 정상훈이라는 마법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정상훈이 어떤 과정을 거쳤기에 이토록 성장했는지. 사람들이, 너에 대해 궁금하게 만들어라.”

마탑의 얼굴.

정확히는 제자들이 희망하는 현실적인 우상.

강민혁은 정상훈이 유명인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그간 3서클을 형성하느라 수련에만 매진했지만, 지금은 강민혁의 계획에 동참할 아주 좋은 타이밍이었다.

정상훈이 말했다.

“빚을 갚아달라는 게 아닙니다. 저는 30억이라는 막대한 빚을 남에게 떠안길 만큼, 그렇게 몰상식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잘못은 제가 짊어져야 할 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든 갚을 생각이지만, 최병호 학과장님이 마법 학과의 이름으로 박무철과의 거래에서 중간 다리 역할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원하는 건 그뿐입니다. 박무철이 빚을 가지고 장난질을 할 수 없도록, 빚을 청산하는 과정이 깨끗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그 이상의 도움은 바라지 않습니다.”

“흐음.”

최병호의 표정에 흥미가 돌았다.

정상훈의 부탁은 현실적이었다.

30억이라는 액수는 선뜻 나서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지만, 이름값을 빌려주는 정도는 문제가 없다.

다만.

“그로 인해 내가 얻는 것이 뭐지? 학생에게 이런 말을 하는 학과장이 속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 않나? 나는 마법 학과의 학생들이 좋은 환경에서 수업을 받길 원하지만, 그건 아카데미 안에서의 일. 아카데미 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별개의 문제지.”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최병호는 거래를 원한다.

강민혁과도 그러했고, 강민혁이 확실하게 보상을 해주면서 그는 든든한 우군으로 태도를 바꾸었다.

“마법 학과의 이름으로 모든 마법 대회에 출전하겠습니다. 반드시 우승해서 마법 학과의 이름을 드높일 것이며, 수상 인터뷰에서는 꼭 한 번 이상 학과장님의 이름을 거론하겠습니다. 제가 우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법 학과에서 가르치는 양질의 수업과 학과장님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고요. 그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요놈 봐라.”

최병호가 웃었다.

정상훈은 자신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예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자신에게 아주 적절한 보상을 제안했다.

이러면 얘기가 달라진다.

중간 다리?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다.

박무철이 아무리 사채 바닥에서 이름을 날린다지만, 헌터 아카데미는 체급이 완전히 다르다.

정상훈으로서도 일거양득(一擧兩得)의 제안.

강민혁이 의도하는 것처럼 자신의 명성을 드높이며, 빚 청산의 중계를 해줄 든든한 우군을 얻는다.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서, 정상훈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강민혁이라는 배경.

그에게 도움을 바라지 않았다.

이미 많은 것을 받았기에, 빚의 청산은 본인의 몫이라 생각했다.

최병호가 말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에 조건을 하나 걸도록 하지. 내일 성동구에서 작은 마법 대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나름 방송사의 주목을 받고 있는 대회라서, 마법 학과의 학생이 우승하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겠지. 그게 17살에 3서클을 형성한 마법사라면 더더욱. 그 대회에서 우승하고 와라. 그렇게만 한다면, 난 네 제안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중간 다리의 역할을 맡겠다."

“알겠습니다.”

거래는 성사되었다.

정상훈은 활짝 웃으며, 최병호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다음 날.

정상훈은 당당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최병호라는 든든한 배경을 확보했다.

“이런 쥐새끼 같은 녀석!”

빡!

신경질이 난 박무철이 책상을 내리쳤다.

강화 전사의 강력한 힘에 책상이 두 동강이 나버렸지만, 그 정도로는 분노가 좀처럼 가라앉질 않았다.

‘그 새에 최병호를 끌어들이다니.’

바로 어제.

정상훈과의 거래를 끝내고 그는 기분이 정말 좋았다.

정상훈과 같은 인재를 활용할 수 있는 거래는, 잘만 활용하면 30억 이상을 벌어들이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어제만 하더라도 정상훈을 어떻게 활용할지 행복한 상상에 빠져들었는데, 오늘 청천벽력과 같은 연락을 받았다.

최병호.

강민혁의 앞에서는 한없이 부들부들하던 사람이, 박무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압적인 태도로 말했다.

“나 헌터 아카데미 마법 학과장 최병호요. 우리 아이가 당신에게 큰 빚을 진 모양인데, 내가 중간 다리 역할을 맡기로 했으니 빚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법에 어긋나는 행위만 하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나설 일은 없을 겁니다.”

행복한 상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30억이라는 빚을 활용해 정씨 가문을 완전히 집어삼키려고 했는데,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씨발.”

헌터 아카데미.

그건 절대 개인의 세력으로 대적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한국의 희망이라고 불리는 헌터 아카데미는, 적어도 국내에서는 엄청난 권력을 자랑한다.

특히 정부와 강력한 연결 고리가 있기에, 자신과 같은 직종의 사람들은 더욱 기피해야만 한다.

화가 났다.

이대로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정상훈의 모습을 떠올리니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그래서 그렇게 순순히 물러났던 거였어. 애초에, 나와의 거래를 유리하게 이끌 자신이 있던 거지.”

영악한 녀석이었다.

자신이 계약에 강제적인 조항을 넣지 못하도록, 정상훈은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다. 보통은 아버지가 30억이라는 빚을 물려주면 난리를 피우기 마련이다. 그런데 정상훈이 생각보다 금방 현실을 수긍하고 거래를 제안하는 모습에, 현실적인 녀석이라 생각하고 덥석 받아들이고 말았다.

머리를 굴렸다.

최병호가 나선 이상 손을 쓸 방법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대로 물러나는 것은 입맛이 씁쓸했다.

똑똑-

“사장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정상훈과 관련된 일이라고 하는데, 안으로 들여보낼까요?”

“정상훈?”

박무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자신에게 이렇게 빅엿을 먹여놓고, 그 일로 또 찾아오다니.

‘오냐, 어디 한번 해보자 이거지.’

오기가 치솟았다.

그는 품에 있는 단검의 위치를 확인하더니,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들여보내.”

“예."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내가 들어왔는데, 그 사내의 얼굴이 매우 익숙했다.

“...넌?"

개인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마법 혁명으로 인해 세계적인 스타가 된 인물.

“강민혁이라고 합니다.”

강민혁이, 5개월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강민혁이 소파에 앉았다.

박무철의 소굴인데도, 강민혁은 전혀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

".........."

강민혁의 바로 뒤쪽.

그곳에는 박무철의 부하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강민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차오르는 상황에, 박무철은 차를 홀짝이며 침착함을 되찾은 음성으로 물었다.

“여긴 무슨 일입니까? 당신 같은 귀한 인물이.”

“상훈이가 당신에게 빚을 졌다고 들었습니다. 그 빚을 제가 사고 싶습니다. 박무철 사장님이 원금과 이자의 회수를 바라는 것이라면, 거기에 5억을 얹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일시불로 결제하겠습니다.”

박무철의 표정이 굳었다.

입술이 뒤틀렸다.

그렇지 않아도 정상훈 때문에 짜증이 났는데, 강민혁의 등장은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입니다.

“그쪽이 정상훈과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건 싫습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 겁니까?”

“그럼 상훈이를 불러서 빚을 갚게 할 수도 있습니다.”

박무철과 정상훈의 관계.

강민혁은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고영철.

그의 정보력은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당연히 자신의 사람에 대한 정보는 필수였고, 정상훈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은 오래전부터 알았다.

그러나 정상훈에게 경고하지 않았다.

일부러 기다렸고, 지금에야 나서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

박무철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팔기 싫었다.

정상훈의 가치를 알기에, 어떻게든 그를 붙잡을 묘수를 생각하고자 했다.

그러나 강민혁의 말처럼, 정상훈을 데려와 30억을 대납해버린다면 사실 이번 문제는 끝나고 만다.

박무철이 말했다.

“당신은 지금 제 빚을 사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빚을 대신 갚아준다는 게 아니라, 빚의 권리를 원한다는 뜻이겠죠. 그럼 얘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그런 복잡한 과정을 원하는 거라면, 저도 2배 이상의 금액을 요구할 권리가 있겠죠. 정상훈은 아주 매력적인 먹잇감이지 않습니까?”

히죽, 웃어 보였다.

60억.

그 정도를 받아내면 물러날 의향이 있다.

헌터 아카데미가 중간 다리로 끼어든 이상, 어차피 막대한 이득을 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강민혁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말을 툭, 내뱉을 뿐이었다.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무슨 후회를 말하시는 겁니까?”

“저는 기회를 드렸습니다. 저와 거래할 기회를.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습니다.”

“당신이 어떤 인물인지 잘 압니다. 마법 혁명을 일으킨 대단한 마법사님이죠. 만약 아직도 수호문의 배경이 건재하다면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는 저를 압박할 수 없습니다. 저 헌터 캐시의 박무철입니다. 이 바닥에서 닳고 닳은 제가, 당신의 협박에 순순히 따라줄 것 같습니까?”

어깨를 폈다.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이 거래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확신을 표출했다.

“알겠습니다.”

강민혁은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았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박무철을 마주 보는 상태에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시작해.”

[알겠어.]

뚝-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박무철의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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