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97화 (97/197)

97화.  < 26. 수확의 계절(2) >

엘리샤에게 들었던 그대로였다.

정령계는 폐허가 되었다.

전설로 전해지던 푸르른 숲은 찾아볼 수 없었고, 황폐화가 된 땅이 넓게 펼쳐졌다.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땅바닥에는 수많은 몬스터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었으며, 시야가 끝나는 지점에 거대한 활화산이 보였다.

쿠르르르릉.

콰앙!

활화산이 폭발했다.

이곳은 적색의 땅이었다.

불의 정령왕 피닉스(Phoenix)가 지배하는 땅.

그의 권능에 따라 적색의 땅은 화염으로 넘실거렸다.

‘이게 정령계의 현실이라니.’

던전 밖.

정령계에서 풍기는 힘은 아직 건재했다. 그래서 엘리샤의 설명을 들었는데도 희망적인 그림을 상상했는데, 현실은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몬스터의 침공. 그것은 인간들에게만 닥친 재앙이 아니었다. 자연의 천국과도 같았던 정령계는, 몬스터들로 인해 이전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화르르르르르륵.

[인간......... 죽인다.........!]

바로 앞.

불길이 타오르더니 불의 정령 샐러맨더가 나타났다.

A급 몬스터.

도마뱀의 형태를 하고 있는 그것은, 강민혁을 발견하자마자 강한 적의를 표출하였다. 정령계의 샐러맨더는 현실에서 알려진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으며, 인간에게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가능했다. 샐러맨더는 죽이겠다는 의사처럼, 쩍 벌어진 입에서 불길을 토해냈다.

확!

화르르르르륵!

화염이 그대로 주변을 휩쓸었다.

강민혁의 ‘의식’은 한발 빠르게 샐러맨더의 공격을 피했다. 의식의 상태라지만, 소멸을 당한다면 충격이 대단할 터. 애초에 샐러맨더의 적의에 대해서는 들었기에, 강민혁은 상대의 공격을 미리 예상하고 피할 수 있었다.

엘리샤.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다.

“정령들은 인간에게 강한 적의를 가지고 있어. 그래서 인간을 발견하자마자 공격을 하는데, 이때 절대 반격해서는 안 돼. 그건 적이라는 확고한 인식을 심어주는 행위거든. 이러한 상황에서 정령을 달래고 계약하기 위해서는 2가지의 방법이 있어. 첫 번째는 나처럼 불의 지배력이 높아서, 정령이 알아서 수긍하고 따라주는 것. 하지만 그건 너로서는 불가능한 일이겠지.”

엘리샤는 타고난 천재다.

홍염의 마법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불에 대한 그녀의 지배력은 정말 대단하다.

그래서 엘리샤는 샐러맨더와의 반복된 만남으로 상대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샐러맨더는 불의 지배력을 타고난 엘리샤에게 강한 호감을 느꼈고, 본인을 공격하지 않는 모습에서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소 시간이 걸리는 방법이었지만, 덕분에 엘리샤는 안전하게 계약에 성공했다.

문제는 강민혁의 방법이었다.

“두 번째는 조금 위험한 방법이야. 바로 정령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 정령과 자신이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접 기억을 주입함으로써 설득시키는 거지. 만약 정령이 너의 생각에 공감한다면 적의를 거두겠지만, 반대의 상황이라면 너는 그 상태로 소멸을 당할 위험이 있어.”

위험한 방법.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망설일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강민혁은 어렸을 때부터 강해지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다. 몬스터에게 살이 찢겨나가고, 치열한 접전 끝에 피로 물든 검을 몬스터의 심장에 박아넣었다. 그런 삶을 살았던 강민혁에게, 대가만 확실하다면 목숨을 거는 행위는 언제든지 웃으며 행할 수 있다.

고로.

“내가 너의 적이 아님을, 기억을 통해 보여주마.”

화악!

의식이 날아갔다.

빠르게 샐러맨더에게 날아가더니, 샐러맨더가 불을 뿜어내기 직전에 그의 머리에 손을 갖다 댔다.

기억의 전달.

강민혁의 머릿속이 확정되며, 일부의 기억이 샐러맨더에게 전달되었다.

[퍽!]

[크르르륵!]

그 기억에는 클리스만이 있었다.

장벽 너머.

강민혁은 반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몬스터를 도륙했다. 강민혁이 찔러넣은 검에 몬스터가 피거품을 물었고, 강민혁은 망설이지 않고 몬스터의 목을 베었다. 얼마나 많은 몬스터를 처리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베고, 또 베고. 강민혁은 강해지기 위해서 악착같이 몬스터를 상대했다.

몸에 상처가 늘었다.

그러나 그만큼 강해졌다.

악착같이 몬스터를 학살하고 다니는 그 모습은, 샐러맨더에게 자신이 적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나도 너와같아. 몬스터의 침공을 받았고, 살아남기 위해서 빌어먹을 몬스터들과 싸워야만 했지. 그러니 너와 나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거야. 네가 만약 나에게 힘을 보태준다면, 내 기억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많은 몬스터를 처리할 수 있어. 내 목적은 몬스터의 멸살이고, 그건 겨우 수백 마리를 죽였다고 해서 만족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의식을 전달했다.

샐러맨더의 입에서 뿜어지던 불길이 점점 사그라지며, 그의 적의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같은 목적.

샐러맨더의 공감을 이끌었다.

정령은 인간에게 분노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게 직접적인 대상인 몬스터만큼은 아니다.

[네가 흘린...몬스터의 피를....믿겠다.....]

화악-

의식이 확정되었다.

샐러맨더의 불길.

그 힘이, 그대로 강민혁을 덮쳤다.

화염의 서클이 활짝 열렸다.

정령계로부터 비롯되는 화염이, 엄청난 화염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화염의 서클로 흡수되었다.

화륵.

화르르륵!

정령 계약.

그것에 성공하면, 해당 정령은 속성의 서클에 본인의 힘을 부여한다.

그로 인해 인간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속성 지배력을 얻고, 필요에 따라 그 힘을 발현시켜서 샐러맨더를 현실에 소환할 수 있다. 그리고 정령은 화염의 서클에 있는 마나를 흡수해서 점점 성장하며, 마법사의 마력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 발휘하는 힘도 달라진다.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

정령계에서 나름 긴 시간을 보냈지만, 현실에서는 겨우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서 강민혁이 눈을 떴다.

“성공했구나.”

서클.

그 안에서 화염의 힘이 느껴졌다.

이제는 자신도 불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

사방으로 튀는 불길을 마법으로 변화시키는, 도미닉 그린을 제압한 엘리샤의 그 막강한 힘을 말이다.

최상의 상황이었다.

명당을 찾았고, 심법은 완벽했으며, 정령과의 계악도 성공했다.

이제 남은 건 충분한 훈련.

강민혁은 원하는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당분간은 던전 안에서 폐관(閉關) 수련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최병호]

[강민혁입니다. 잠시 개인적인 일로 학교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시기가 얼마나 길어질지 확실히 말씀드릴 수 없어서, 이렇게 문자로나마 보냅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일단 학과장에게 연락.

그러자 답장이 곧바로 왔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반드시 필요한 일이겠지. 민혁아, 이 학과장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혹시 다른 단체로 이적할 생각이라면, 언제든 말만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그동안 네가 비워둔 자리는 이 학과장이 책임지고 지키고 있으마. 꼭 몸 건강히 돌아오렴.]

강민혁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최병호의 답장에는 애정이 뚝뚝 떨어졌지만, 강민혁은 무시하고 다음 상대에게 연락했다.

이어서 고영철과 정상훈 같은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고영철에게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그리고 정상훈에게는 앞으로의 수련 방법 같은 것을 설명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우더라도 계획은 착실하게 진행돼야 한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걸려 모든 문자를 돌리고 나서야, 강민혁은 오롯이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목표한 바를 이루고 돌아가자.’

반년.

클리스만에게 약속한 시간이다.

그 안에 유의미한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5서클이라는 첫걸음을 성공시켜야만 한다.

다시 심법에 집중하는 강민혁.

그렇게, 클리스만의 세상에서처럼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강민혁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뒤로 5개월이 지났다.

그간 정상훈은 정말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강민혁이 알려준 훈련 방법으로 인해, 그는 아카데미가 끝나면 강민혁의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 기술의 이름을 나는 소월(小月) 심법이라고 부른다.]

소월 심법.

그것은 월하 심법의 다운 그레이드 버전이었다.

덕분에 정상훈은 효율적으로 마나를 쌓을 수 있었고, 5개월이 지난 지금 마침내 성과를 이루었다.

“서, 성공했어!”

정상훈의 얼굴에 감격이 차올랐다.

3서클.

방금 3번째 서클을 형성했다.

다른 사람들은 졸업할 시기에 3서클을 형성해도 천재라고 불리는데, 그는 겨우 17살의 나이에 3서클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이는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사실 강민혁의 케이스가 비정상적인 성장이었을 뿐, 정상훈의 성장은 그의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강민혁은 정상훈의 성장에 기대를 걸었고, 정상훈은 보란 듯이 3번째 서클로 기대가 옳았음을 증명했다.

“하아.”

감정이 벅차올랐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정상훈은 자신의 성장이 강민혁의 덕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노력이 성장을 이루어낸 것은 맞지만, 강민혁이 없었다면 3서클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황급히 핸드폰을 들었다.

빨리, 이 상황을 강민혁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띠링!

[네가 정문성의 아들이냐? 네 아비가 아주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아비를 잃기 싫으면 빨리 집으로 와라.]

한 통의 문자.

그것이, 정상훈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정상훈의 가문.

정씨 가문은 몰락한 마법의 명가다.

정상훈의 아버지인 정문성은 그에 책임감을 느끼고 가문의 부흥을 위해 이런저런 일을 벌였는데, 문제는 그 일이 전부 실패하면서 시작되었다. 마법 사업에 투자한 돈을 모두 날려버렸고, 정문성을 따라서 가문의 부흥을 외치던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은 돈을 들고 튀었다.

그러자 남은 것은 산더미 같은 빚이었다.

그나마 정씨 가문의 이름값을 믿고 돈을 빌려주었던 사람이, 안색을 돌변하고 그를 찾아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상훈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난장판이 된 뒤였다.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정문성의 모습에, 정상훈이 살의가 담긴 눈빛으로 한 사내를 보았다.

중년의 사내.

그는 사채업을 하는 헌터인 박무철이었다.

그의 사업체인 ‘헌터 캐시’는 나름 이 바닥에서 알아주는 세력인데, 그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이긴. 네 아버지가 내게 빌린 돈을 갚지 못해서, 이자를 포함해 무려 30억의 빚이 밀렸어. 그러니 나로서는 돈을 받아 내기 위해서 이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거고. 보아하니 너도 돈 나올 구석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래?”

그의 기세는 험악했다.

박무철은 강화 전사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헌터들도 강화 전사기에, 그들의 무력은 이 험악한 분위기에 강제성을 부여했다.

정상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채.

아버지가 사채를 썼다면, 그건 박무철의 잘못이 아니다.

빌린 사람이 돈을 갚지 못한 것이 잘못이고, 박무철은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려고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30억이라니..........'

너무나도 큰 액수였다.

학생에 불과한 정상훈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

문득, 강민혁의 집에 수북이 쌓여있던 붉은 마나석의 존재를 떠올렸다.

‘그걸 판다면 30억은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어.’

붉은 마나석.

지금으로부터 몇 개월 전에, 사람들은 붉은 마나석의 정체를 알아냈다.

시장에서 특정 세력이 붉은 마나석을 휩쓰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마침내 비밀을 밝혀낸 것이다.

그때부터 붉은 마나석의 가격은 폭등하였다.

파란 마나석보다 질적으로 더 좋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붉은 마나석을 찾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특정 세력이 붉은 마나석 시장을 90퍼센트 이상 독점한 이후였다. 개인의 거래는 모르겠지만, 집단의 거래는 모두 그 세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정상훈은 추측하길, 그 세력이 강민혁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스승님은 붉은 마나석의 비밀이 밝혀지기 이전부터 붉은 마나석을 사용했어. 아마, 비밀을 미리 알고 시장을 독점했겠지.’

정상훈이 매일 훈련에 사용하는 마나석.

그것만 해도 억소리가 나는 값어치를 자랑한다.

그래서 사실 훈련을 며칠 빼먹고, 붉은 마나석을 팔아버린다면 강민혁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스승님을 배신할 수는 없어.’

강민혁.

그는 정상훈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대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강민혁을 위해 많은 일을 해야겠지만, 지금만 보자면 강민혁은 정상훈에게 퍼주기만 했다. 마나 룸과 소월 심법이라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기술들을 말해주고, 정상훈의 성장을 도와주기 위해서 붉은 마나석을 마음껏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단, 훈련에 한해서만 말이다.

정상훈은 그렇게 성장했다.

강민혁과의 인연은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컸다.

절대적인 신뢰.

그 관계를 깨부수고 싶지 않았다.

정상훈에게 있어, 강민혁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은 죽어도 저지르기 싫은 실수다.

정상훈이 말했다.

“저랑 거래하시죠.”

“거래?”

"예. 저는 3서클 마법사입니다. 당장 30억이라는 큰돈을 갚을 수는 없겠지만, 3서클 마법사라면 시장에서 어떻게든 돈을 벌어들일 방법이 있겠죠. 그러니 빚을 갚을 때까지 3서클 마법사인 저라는 사람을 활용할 권리를 드리겠습니다.”

“호오.”

박무철이 흥미를 보였다.

마법 혁명.

강민혁이 새로운 시대를 열면서, 의료 마법을 배운 마법사들의 가치는 폭등하였다.

실력 있는 마법사의 경우에는, 3서클 이상부터 하루 고용하는 액수가 수백, 수천만 원이 들 정도.

정상훈의 말은 옳다.

3서클, 그것도 17살의 나이에 3서클에 올랐다면 정상훈의 가치는 크다.

박무철이 활짝 웃었다.

“네 제안을 승낙하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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