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 25. 변화의 바람 >
꿈을 꾸었다.
그건 급박했던 ‘마지막 순간’을 비추었다.
“자이언트 홀드.”
“기가 라이트닝
우뚝.
자이언트 홀드의 강력한 구속력에 강민혁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딱 1초.
1초의 여유만 더 있었어도 강민혁의 검은 도미닉 그린의 가슴팍을 갈랐겠지만, 도미닉 그린의 붉게 충혈된 눈빛은 기어코 강민혁을 멈추는 것에 성공했다. 마법의 힘이란 대단했다. 강화 전사의 능력으로도 구속을 풀 수 없었고, 하늘에서 들리는 쿠르르릉 소리가 후속타를 예고했다.
‘당하면 죽는다.’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미 피해가 누적된 상태.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하고 기가 라이트닝을 정통으로 맞는다면, 결투의 승패를 떠나 목숨이 위험하다.
생사의 경계선.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며, 강민혁은 그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생각했다.
‘검막은 사용할 수 없어.’
‘그렇다면 강철만으로 기가 라이트닝을 버텨야 하나?’
‘도미닉 그린의 기가 라이트닝은 파괴력이 대단해. 완전한 위력을 발휘하는 그것은 버틸 수 없어.’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자이언트 홀드의 구속을 풀어내면 검막과 강철을 모두 사용할 수 있어. 그렇게만 된다면, 기가 라이트닝을 정통에서 맞는다 할지라도 죽지는 않아.’
문제는 방법이다.
대체 어떻게?
강력한 구속력을 발휘하는 자이언트 홀드를 벗겨낸단 말인가.
강민혁은 크리스 카일과의 전투에서 ‘홀드 트랩’을 힘으로 벗겨낸 경험이 있다. 그때는 그것이 가능했지만, 홀드의 상위 마법인 자이언트 홀드는 달랐다. 강민혁이 마나를 일으키면 반발력이 더욱 강하게 몸을 구속하였고, 이대로라면 기가 라이트닝을 맞는 방법밖에 없었다. 도미닉 그린은 참으로 영리한 사람이었다. 매직 스페이스라는 본인만의 공간에서 마법의 화력을 최대한으로 사용하면서도, 3개의 각인 마법으로 본인의 안전을 대비할 방법은 마련해두었다.
찰나의 시간.
많은 고민.
실제로는 2~3초가 흘러가는 동안, 두 개로 나누어진 두뇌는 수많은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중 하나.
강민혁은 본능적으로 해결책을 행했다.
‘마나의 힘을 역으로 파훼한다.’
강화 전사이자 마법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강민혁은 자신의 마나를 자이언트 홀드에 불어넣었다. 그리고 자이언트 홀드의 마법 체계를 떠올리며, 그것의 역순에 따라 마나를 움직였다. 마법이란 ‘마나의 체계’가 형상을 이루며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역순으로 움직이는 마나가 구속력을 증폭 시키는 체계를 약화시키자, 강민혁은 힘으로 자이언트 홀드의 구속력을 풀어내는 기적적인 일을 성공시켰다.
팍!
자이언트 홀드가 풀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이미 기가 라이트닝의 강력한 전기 다발이, 그대로 강민혁을 강타한 뒤였다.
콰콰쾅!
쿠크르르르르르르릉.
간발의 차이였다.
강민혁은 검막과 강철을 사용했고, 남아있는 모든 마나를 끌어 올려서 기가 라이트닝의 힘에 대항했다.
엄청난 통증이 일었다.
“끄으으으윽."
울컥했다.
순간 수호문의 마지막 카드인 개방(開放)의 존재를 떠올렸으나, 강민혁은 그러한 생각을 억눌렀다.
이건 생사결이 아니다.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 아닌데, 리스크가 큰 개방을 사용할 수는 없다.
그렇게.
털썩!
파스스스스.
강민혁은 무릎을 꿇었다.
전투에 대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아직도 살아있는 눈빛은 도미닉 그린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고통에 정신이 날아갈 것 같은 와중에도 강민혁은 검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전기 계열의 마법은 2번째 이후의 공격부터 증폭되는 위력을 발휘한다. 내부에서 쌓인 데미지로 인해서, 강민혁은 쓰러지지만 않았을 뿐 움직일 힘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빠득.
이를 악물었다.
의지가 육체를 초월하며,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달려오는 의료진의 모습이 보였다.
강민혁은 자신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결국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삑-
삑-
삐익-
“어어? 클리스만 환자가 일어났습니다!”
화들짝 놀라는 간호사.
강민혁이 꿈에서 깨어났을 땐, 병실의 하얀 천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의사가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정말 대단한 회복력입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고, 피부의 괴사(壞死)도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피부가 재생되고 있다니. 저희가 적절한 조치를 했다고는 하나, 이 정도의 회복력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료 마법.
죽기 직전이라면 그 어떤 중상자도 살려낸다는 그 힘이, 강민혁이 회복하는 것에 큰 도움이 되었다. 강화 전사의 생명은 끈질기다. 단전의 힘이 저절로 육체의 상태를 회복했는데, 그걸 감안한다 할지라도 클리스만의 육체 재생력은 확실히 대단했다. 옆에서 의사는 감탄 어린 표정으로 계속 떠들었지만, 강민혁은 그 말은 듣지 않고 ‘도미닉 그린’과의 결투에 대해 떠올렸다.
‘내가 졌어.’
패배.
결국 지고 말았다.
강민혁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지만, 결투가 끝나지 않았더라도 자신의 승산은 확신할 수 없다.
마지막 순간.
강민혁이 버텼다는 사실을 확인한 도미닉 그린은, 경악하면서도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긁어모아서 일으키는 반응 속도를 보여주었다.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비장의 수가 막혔다고 해서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강민혁에게 끝까지 대항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확실히 도미닉 그린은 강했다.
강민혁에게는 사용하지 않은 마지막 카드가 있지만, 그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개방.
그건 생명력을 갉아먹는 기술이다.
생사결도 아닌 결투에서 개방을 사용했다면, 승리한다 할지라도 강민혁은 전혀 기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왜 졌을까?’
상대가 강해서?
당연한 전제다.
하지만 강민혁에게는 분명히 승리할 만한 기회들이 있었고, 강민혁은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크리스 카일과의 결투도 마찬가지였다. 강민혁은 분명히 크리스 카일을 넘어서는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마법의 변칙적인 힘에 애를 먹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지(未知)의 힘. 알지 못하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어.’
홀드 트랩.
블링크.
미라지.
각인 마법 등등.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수법은 강민혁에게는 낯선 세계였다.
강민혁도 이론 공부를 통해 많은 마법을 배웠다. 사실 블링크와 자이언트 홀드와 같은 마법은 최근에 공부한 ‘5서클 마법’에 포함되어 있는 이론이었지만, 강민혁의 경험은 수백 갈래의 변수에 즉각적으로 대항할 수 없었다. 안다 할지라도, 상대가 어떤 마법을 쓸지는 모르는 것이다.
수백, 수천 개의 마법.
마법은 변수가 너무나도 많다.
결국 직접 경험해야만 했다.
어떤 마법인지 확인하고 나서야, 강민혁은 뒤늦게 대항했다.
‘애초에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어. 강화 전사들의 힘은 결국 물리력에서부터 출발하는 시작점에 공격을 예상할 수 있다지만, 마법의 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어. 서로의 힘이 비슷하다면, 강화 전사가 더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내 생각은 틀렸어.’
정보의 부재.
모르기에 졌다.
6서클 마법사의 전투 방식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았더라면, 이런 일은 벌이지지 않았을 것이다.
쓰라렸다.
패배는 기분 좋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패배했다고 해서 절망하고 나락으로 빠지는 게 아니라, 패배에서 발전의 가능성을 얻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민혁은 안다. 어릴 때의 강민혁은 매번 승리했던 것이 아니다. 무수히도 많은 패배를 경험했고, 그래서 패배가 쓰라리기는 하나 결국 발전의 발판으로 삼아 성장했다.
그게 강민혁이라는 사람이다.
‘마법에 대해 더 알아야겠어. 마법사로서 강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마법사에게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독기가 차올랐다.
승부욕이 들끓었다.
손에 닿을듯한 거리에서 도미닉 그린에게 무너졌기 때문에, 강민혁은 성장에 대한 열망에 차올랐다.
그리고 그날 오후.
병문안을 온 해리 윌슨이 호들갑을 떨었다.
"이런 괴물 같은 녀석! 기가 라이트닝을 몇 방이나 맞아놓고도 이렇게 멀쩡하다니. 아차차,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니지. 너 대박났어! 그린 드래곤 상황에서 있었던 CCTV 영상이 결투 대회 영상이랑 같이 방영되면서, 사람들이 모두 ‘클리스만’이라는 사람을 주목하고 있다고!”
병실에 있던 그 시간.
밖에서는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패배.
강민혁은 4강전에서 떨어졌지만, 사람들은 패배보다는 ‘그 과정’을 보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결투 대회 방송.
해당 방송의 MC가 말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경기였습니다. 도미닉 그린은 장벽 너머에서 명성을 떨친, 그야말로 실력이 검증된 워 메이지입니다. 엘리샤와 같이 강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그를 검 한 자루로 밀어붙이다니. 사람들은 검사(劍士)가 2000년의 역사와 같이 사장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클리스만이, 이 세상에 마법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MC는 격정적으로 강민혁을 띄워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 카일과 도미닉 그린은 함정을 겹겹이 파서 강민혁을 공략했지만, 강민혁은 그것을 뚫고 끝까지 상대를 위협하는 괴력을 보여 주었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인간의 물리력이 마법에 대항하는 장면은, 2000년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것. 새로운 힘이 탄생했다는 사실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마법은 몬스터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힘입니다. 그래서 마법에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전투에서 배제되고 일반인의 삶을 택합니다. 가끔 육체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디펜더의 길을 택하나 그것은 극소수의 경우. 그런데 지금 클리스만은 새로운 형태의 ‘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도미닉 그린이라는 강자를 밀어붙인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열광했다.
검사.
그 끝에는 길이 없다고들 생각했다.
그래서 무기가 아니라 농기구를 들었던 사람들이, 강민혁을 보면서 검사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수련하면 강민혁처럼 강해질지도 모른다.
그러한 꿈에 부풀었다.
얼른 강민혁의 공식 인터뷰가 진행되길 바라는 그 시기에, 강민혁은 수많은 손님을 맞이했다.
“저희 마탑에 클리스만님을 영입하고 싶습니다.”
“방송을 보며 클리스만님의 힘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저희와 같이 검술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연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지원해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클리스만님을 검술 교사로 초빙하고 싶습니다.”
다양한 세력들.
그들이 강민혁에 대한 욕심을 보였다.
나름 밖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달콤한 보상을 내밀며 강민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이 보기에 강민혁은 검술의 선구자였다. 검술이라는 것이 마법만큼 대단한 문명을 이루지 못할지라도, 마법에 재능이 없는 이들의 차선책만 되어도 그것은 엄청난 힘과 문명을 이룰 것이다.
기존의 세력들.
그들이 권력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그중에는 아비드도 있었다.
"시련의 탑을 통과한 사람이 마법이 아니라 검을 택하다니. 그린 드래곤 상황에서 네 힘의 중심이 검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 힘이 이토록 발전했다는 사실은 의외구나. 대체 너의 힘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냐? ‘그들’이 너에게 알려준 것이냐, 아니면 스스로 창조해낸 힘인 것이냐?”
그는 질문이 많았다.
그러나 강민혁은 입을 닫았다.
어떤 제안도 승낙하지 않았고, 아비드가 원하는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강민혁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일반인들은 내 힘에 열광하나, 마법사들은 나를 경계하고 견제하고 있어.’
주류.
단 하나의 힘이 세계를 지탱하는 상황에서, 검술의 탄생은 기존의 세력들을 자극했다. 그래서 강민혁을 영입해서 끌어안으려고 하거나, 아니면 실험을 명목으로 분석하려고 하거나. 그리고 아비드처럼 많은 질문을 통해서, 검술이라는 것의 시작점이 무엇인지 알아보려는 사람이 많았다.
경계의 대상.
달갑지만은 않았다.
재앙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권력이 약해지는 건 바라지 않았다.
‘정말 한심하구나.’
무려 2000년.
게이트 사태가 일어나기 전만 하더라도, 마법 문명의 사람들은 강력한 힘을 지니고도 공존을 택했다.
그 성향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들에게 최우선의 목적은 인류의 안전이 아니라 본인의 안위.
찬란한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의식이 퇴보(退步)한 인류처럼 보였다.
그래서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 자신의 행보.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된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용할지 말이다.
그리고 며칠 뒤.
["결투 대회의 우승자는 엘리샤로 결정되었습니다!”]
도미닉 그린이 엘리샤를 상대로 쓰러지는 모습에, 강민혁은 생각을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