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 24. 두 문명이 싸우는 방식(6) >
크리스 카일.
그와의 결투 이후, 강민혁은 그가 강화 문명에서 어느 정도의 실력자인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다.
‘정확히 어느 정도라고는 단정할 수 없어. 하지만 크리스 카일의 실력이라면, 황금 세대를 제외하고 웬만한 일급 제자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야. 강화 문명에서는 5서클의 마법사가 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그는 같은 5서클이라 해도 보여주는 파괴력이 전혀 달라.’
황금 세대.
강민혁을 시작으로 이준호로 이어지는 멤버들은 크리스 카일을 충분히 제압하겠지만, 그 밑에 일급 제자들은 조금 애매했다. 그만큼 크리스 카일은 강했다. 아직 전투의 미숙함이 보였지만, 강력한 마법으로부터 비롯되는 연계 공격은 강화 전사를 무너트릴 만한 힘을 갖추었다.
그렇다면 도미닉 그린은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최소 황금 세대와 동급이고,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펑!
화르르르륵.
화염 마법이 펑펑 터졌다.
피한다고 해서 숨을 돌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활화산처럼 분출되는 마나는 끊임없이 마법을 쏟아냈다.
사람들이 왜 5서클부터 한 단계 상승할 때마다 전혀 다른 세계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3서클 마법을 캐스팅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강력한 이점이었고, 도미닉 그린은 처음 위치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 강민혁을 구석으로 몰아붙였다. 마나를 두른 덕분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강민혁으로서는 섣불리 도미닉 그린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야 한다.’
화악-
오라가 일어났다.
마나의 파편이 도미닉 그린의 틈을 노림과 동시에, 강민혁은 마나를 다리에 집중시키며 땅을 박찼다.
그러나.
“그런 잔재주는 통하지 않아.”
쿵!
파바박!
도미닉 그린이 땅을 힘껏 밟자, 그라운드 웨이브의 효과로 돌멩이가 위로 튀어 올랐다. 그것들이 절묘하게 마나의 파편을 막아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교한 컨트롤이었고, 흔들리는 땅은 강민혁의 접근을 막아내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보았다.
장벽 너머.
그곳에서 도미닉 그린은 수많은 몬스터를 상대했다.
그러한 경험으로 인해,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을 얻을 수 있었다.
상대는 모른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마법을 사용하는지.
상대가 정신없이 마법에 휘둘리는 사이, 도미닉 그린은 상대를 무너트릴 판을 차분하게 만들어갔다. 6서클 마법을 캐스팅하고 미라지로 자신의 ‘환상’을 만들어내고. 상대의 검에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전혀 없었다. 장벽 너머에서는 항상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야만, 위기의 상황에서 오히려 상대의 목숨을 끊어내는 워 메이지로 완성될 수 있다.
펑펑펑!
화르르르르르륵!
폭발하는 마법!
도미닉 그린의 표정에 희열이 떠올랐다.
“마법사는 적을 상대함에 있어 도망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이걸 나는 매직 스페이스(magic space)라고 부른다.”
마법의 공간.
무빙 캐스팅?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
대체 왜 마법사가 도망가야 한단 말인가.
고정된 위치에서 오로지 마법에만 집중하는 것.
마법을 효율적이고 빠르게 사용하며, 그로 인해 상대가 다가오기도 전에 쓰러트릴 수가 있다.
마법의 폭격을 버텨내도 상관없다.
확-
기어코 또 다시 마법을 뚫어낸 강민혁.
그가 몸을 날리는 모습에, 도미닉 그린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찰나의 순간에 승부수를 거는 강철의 심장만 있다면, 마법사의 매직 스페이스는 상대에게 지옥을 선사한다.’
서걱!
파사사삭!
도미닉 그린의 몸이 흩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기가 라이트닝."
콰앙!
빠지지지지지직!
다시 한번, 6서클 마법이 강민혁에게 작렬했다.
도미닉 그린은 강하다.
인정한다.
도미닉 그린 정도의 실력자라면, 강화 문명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을 것이다.
문제는.
‘그는 아직 강화 전사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고 있어. 우리는 그가 상대했던 몬스터와는 달라.’
그러한 생각에서 차이점이 발생했다.
강민혁은 마법사를 잘 안다.
직접 마법의 길을 걷고 있기에, 마법사가 어떤 힘을 사용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도미닉 그린은 아니다.
그의 세계에서 강화전사의 힘은 낯선 것이고, 그래서 그는 강민혁을 몬스터와 비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장벽 너머에는 강민혁처럼 강한 물리력을 행사하는 몬스터들이 많을 것이다. 그중에는 강민혁보다 강한 몬스터가 존재할 수도 있으나, 그들이 강민혁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강화 문명.
그 역사는 마법 문명보다 훨씬 짧다.
그렇다고, 수많은 죽음을 대가로 탄생한 수호 검법이 그보다 무조건 약하다고는 할 수 없다.
파사사삭-
도미닉 그린이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강민혁이 자신이 파둔 함정에 제대로 걸렸고, 이제 곧 발현될 6서클 마법에 쓰러지고 말 것이라고.
“기가 라이트닝."
빠지지지지직!
확실히 위험한 힘이다.
하지만 그가 예상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강민혁은 한번 당한 패턴에, 또 당할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검막.’
팍!
빠지지지직.
일부러 기가 라이트닝에 뛰어들었다.
마법은 위력이 증폭되는 타이밍이 있다.
그런데 위력이 제대로 증폭되기도 전에 몸을 날리자, 기가 라이트닝이 이른 타이밍에 폭발을 일으켰다.
마나의 폭발!
전기의 충격이 생각만큼 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가 라이트닝의 위력은 검막을 뚫어버릴 정도로 강력했으나, 강민혁은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동시에, 수호문의 비기인 강철(鋼鐵)을 사용해서 체내로 파고드는 전기의 충격을 막아냈다.
마법을 정말 잘 알기에 내릴 수 있는 판단.
강민혁은 기가 라이트닝의 충격을 뚫어내고, 당황으로 얼룩진 도미닉 그린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
허를 찔렀다.
도미닉 그린으로서는 예상할 수 없었던 상황.
전기로 번쩍이는 세상을 뚫고 나오는 강민혁의 모습은, 그에게 마치 지옥의 사신처럼 보였다.
확!
피할 수 없다.
은 빨랐다
강민혁은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 순간.
“그레이트 실드(Great shield).”
카앙!
각인 마법.
도미닉 그린의 팔뚝에서 파란 불빛이 일어나며 거대한 방패를 형성하였다. 정말 간발의 차이로 강민혁의 공격이 막혔고, 강민혁이 후속타를 가하려고 했지만 전기의 충격에 그럴 수 없었다.
찌릿.
“크윽."
마비의 효과.
마비를 이겨내고 검을 휘둘렀을 때는 이미, 도미닉 그린이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블링크.”
공간 마법.
그가, 승리를 위해 본인의 자존심을 버렸다.
“빌어먹을.”
도미닉 그린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장벽 너머.
그곳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였지만, 매직 스페이스를 포기한 적은 딱 한 번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게 옳은 판단이었어. 초월급 몬스터는, 내 힘으로는 쓰러트릴 수 없는 상대였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클리스만?
그는 초월급 몬스터만큼 강하지 않다. 충분히 매직 스페이스 안에서 공략할 수 있다고 판단했는데, 허를 찌르는 공격에 당할뻔했다. 만약 그레이트 실드를 각인해두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반응이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칼에 맞은 도미닉 그린은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괴물 같은 녀석.’
찰나의 시간.
강민혁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승리를 위한 그 강렬한 의지를 목격하는 순간, 도미닉 그린은 자존심이고 뭐고 버릴 수밖에 없었다.
“라이트닝 랜스(Lightning Spear)."
빠지지지직.
전략을 바꾸었다.
상대는 기가 라이트닝에 제대로 노출되었다.
이제는 전기 마법으로 인한 피해가 상당할 터. 수십 발의 라이트닝 랜스가 발현되며 강민혁을 노렸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강민혁을, 이대로 끝내버리겠다는 필사의 의지가 보였다.
쾅!
콰콰쾅!
이미 강민혁은 자리를 박찬 뒤였다.
상황이 변했다.
도미닉 그린은 더 이상 매직 스페이스를 고수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강민혁에게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무빙 캐스팅과 블링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초감각.’
강민혁의 감각이 예민하게 변했다.
초월한 감각을 통해 주변의 정보가 빨려 들어오며, 강민혁은 괴물 같은 움직임으로 도미닉 그린을 따라붙었다. 정말 아슬아슬한 광경이었다. 강민혁이 간발의 차이로 마법을 모두 피해내는 모습에, 관중석이 웅성거렸다. 짐승 같은 움직임. 강민혁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
팽팽팽.
머리가 회전했다.
기습적인 공격은 도박이었다.
그게 실패함으로써, 강민혁은 상당한 피해를 받았다.
그런데도 재빠르게 반응할 수 있는 이유는, 초감각으로 받아들이는 정보를 두 개의 두뇌로 빠르게 처리하기 때문이었다.
‘전기 다발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다.’
빠지지직!
세상을 밝히는 전기 다발.
강민혁은 그것이 발사되는 궤적을 모두 파악하고, 머리로 처리해서 가장 안전한 길을 찾았다.
“...이런 개 같은.”
도미닉 그린이 욕을 내뱉었다.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웬만해서는 상대가 쓰러져야 정상인데, 아직도 따라붙는 모습에 넌덜머리가 났다.
만약 이대로 싸움이 지속된다면, 마나라는 한계가 존재하는 마법사가 불리할 수밖에 없을 터.
도미닉 그린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그는 승부사다.
급박한 상황에서, 사냥감을 집어삼키는 방법을 알았다.
‘와라.’
화악-
마나를 퍼트렸다.
도망치지 않았다.
언제고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는 빠르게 캐스팅을 사용하며 상대가 달려들기를 기다렸다.
파박.
그러한 의도에 응하는 강민혁.
강민혁이 지척에 도달하는 순간, 도미닉 그린의 마법이 발현되었다.
“기가 라이트닝."
빠지지지지직!
강력한 전기가 일었다.
이번에도 제대로 얻어맞는다면, 강민혁이라 해도 버틸 수 없을 터.
그리고 강민혁은 상대가 승부수를 거는 지금의 이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
‘점멸(點減).’
파박.
순간적으로 스피드를 폭발시키는 기술.
강민혁의 몸이 흐릿해졌다.
마나가 폭발하며, 기가 라이트닝이 떨어지기 직전에 강민혁은 도미닉 그린의 눈앞에 나타났다.
강철을 활용한 기습적인 공격.
그건 사실 미끼였다.
상대가 가지고 있을 ‘방어 수단’을 없앰과 동시에, 이게 자신의 최선임을 알려주려는 허초.
통하면 결투가 끝나겠지만, 통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강민혁에게 차선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점멸.
공간을 파고드는 초고속의 공격은, 도미닉 그린으로서는 대항할 수 없다.
‘끝이다.’
“이런 씨.........."
도미닉 그린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의 코에서 코피가 터져 나오더니, 양쪽 손등에서 강렬한 빛이 일어났다.
각인 마법.
그가, 무려 2개의 각인 마법을 동시에 발현시켰다.
“자이언트 홀드(giant hold)."
“기가 라이트닝 3번째 각인 마법.
그 경지를 사람들은 ‘괴물’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도미닉 그린은 위급한 상황에 자신의 한계를 이끌어냈고, 그게 강민혁에게 그대로 작렬했다.
강력한 마나의 구속.
그리고 하늘에서 꽂히는 기가 라이트닝.
쾅!
콰콰콰파쾅!
드디어, 승부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털썩!
도미닉 그린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오르는 호흡에, 숨을 헐떡였다.
“허억, 허억.”
간발의 차이였다.
장벽 너머에서 생사의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던 그지만, 지금만큼 목숨의 위협을 느꼈던 적은 없다.
끝까지 자신을 노려보던 강민혁의 눈빛.
그 강렬함에 치가 떨렸다.
‘결투가 길어졌다면, 내가 졌을지도 몰라.’
마나가 바닥을 보였다.
자신의 최대치인 각인 마법 3개도 모두 사용했고, 사실 이 다음에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행히도 자신이 이겼다.
마지막 수에, 상대는 결국 굴복했다.
“의료진, 외료진!”
결투 대회의 관계자들.
그들이 황급히 무대 위로 올라왔다.
6서클 마법이 무려 4번이나 사용되었다.
혹시라도 강민혁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이 응급 처치를 시도하려고 했다.
그런데.
파스스스스.
연기가 걷혔다.
시야가 확보되자, 강민혁의 모습이 보였다.
".........?!"
도미닉 그린이 눈을 부릅떴다.
강민혁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피부는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은 채로 도미닉 그린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음 공격을 행할 여력은 없어 보였지만, 그의 손은 아직 검을 놓치지 않았다.
최후의 일격.
강민혁이 그조차도 버텨낸 것이다.
하지만 MC는 이미 판단을 내린 상태였다.
“아아, 정말 엄청난 승부였습니다! 도미닉 그린이, 클리스만을 쓰러트리고 결승전에 진출합니다!”
결투가 끝났다.
더 이상의 결투는 인명사고로 이어질 터.
판정이, 도미닉 그린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람들이 열광했다.
아비드의 예상은 옳았다.
결국 도미닉 그린이 승리하였으나, 귀빈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웃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