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91화 (91/197)

91화.  < 24. 두 문명이 싸우는 방식(4) >

사람들의 환호성.

MC의 격정적인 목소리.

경기장에서 내려오자, 점점 옅어지는 소음이 터널의 침묵에 잡아먹혔다.

“...내가 지다니.”

크리스 카일.

경기장으로 통하는 긴 터널을 그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걸었다. 경기 전에 인터뷰를 진행할 때만 하더라도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지 못 했다. 클리스만이 그린 드래곤 상황 때 얼마나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었는지는 들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의 승리를 의심하진 않았다.

그게 당연한 일이다.

자신은 5서클 마법사다.

그것도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일반 학생이라고 볼 수 없는 뛰어난 마법사.

그런데 패배하고 말았다.

결투의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 많았다.

‘클리스만은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어. 골렘 슈트를 착용한 것도 아닌데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육체적인 능력을 보여주었고, 마나의

활용법도 모든 것이 상식을 벗어났어. 특히 블링크로 공간 이동을 하자마자 따라붙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처음 겪어보는 절망감이 들었어.’

괴물.

다른 단어로는 표현되지 않았다.

패배의 무력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때, 크리스 카일의 길목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나랑 얘기 좀 할까?”

“...넌?"

바로 강민혁이었다.

강민혁은 결투가 끝나고, 곧바로 크리스 카일을 찾아왔다.

크리스 카일의 표정에 적의가 떠올랐다.

강민혁이 왜 자신을 찾아왔겠는가.

경기 전에 내뱉은 말이 있으니, 당연히 그 대가를 치르려는 것일 터.

“마음껏 조롱해라. 내뱉은 말을 지키지 못했으니, 네게 조롱당하더라도 나로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럴 의도로 찾아온 건 아닌데.”

“그럼 왜지?”

강민혁이 피식 웃었다 크리스 카일은 예민했다.

절망으로 얼룩진 표정은,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일단 난 네가 매우 뛰어난 마법사라고 생각해. 솔직히 말해서 내가 조금만 부족했어도, 이 결투에서 패배한 사람은 나였겠지.”

“놀리는 건가?”

“아니. 나는 너의 능력을 진심으로 인정하기에 대화를 나누어보고 싶었어. 나는 마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 그래서 네가 나를 상대할 때, 어떤 방식으로 마법을 사용했는지 알고 싶어. 만약 너도 내가 사용한 기술에 대해서 알길 원한다면, 나 또한 기꺼이 말해줄 의향이 있어.”

크리스 카일에 대한 감정은 잊었다.

결투는 끝났다

원래 결투라는 것은, 시작 전에는 상대를 철천지원수처럼 생각하는 법이다.

무대에서 내려온 강민혁은, 크리스 카일에게 지난 일의 감정이 아니라 앞으로의 발전을 말했다.

강민혁은 이번 대회를 발전의 자양분으로 삼고자 한다. 그러니 크리스 카일에게 직접, 본인이 사용한 마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왜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마법 트랩과 같은 것은 어떤 타이밍에 설치를 했는지. 그게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 카일이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라면, 오히려 자신이 내미는 손을 뿌리치지 못할 확률이 높다.

정정당당한 대결.

순수하게 실력으로 붙어서 패배했으니, 그도 결과를 부정하는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긴 싫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에 대해서 알고 싶겠지.’

강화 전사.

이들에게는 낯선 세상이다.

강민혁이 크리스 카일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크리스 카일 또한 강민혁을 바라보는 눈빛이 흔들렸다.

이미 답은 정해졌다.

패배를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느냐.

패배를 부정하고 현실을 외면하느냐.

크리스 카일은 적어도, 현실을 인정하는 삶을 살았기에 남들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제길.’

인정하기 싫은 상대.

패배의 쓰라림이 사라지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지만, 크리스 카일은 퇴보가 아니라 발전을 택했다.

“네 제안을 승낙하지.”

크리스 카일이 말했다.

“좌표를 수정하는 방법은 간단해. 마법을 발현한 이후, 마법과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추가적으로 새로운 좌표 값을 입력하는 거야. 그럴 경우에 추가적인 마나 소모가 생기지만, 대신 마법이 빗나간다 할지라도 상대의 움직임을 끝까지 따라갈 수 있지.”

심화 이론이었다.

보통 한 학년은 올라가야 배우는 것인데, 크리스 카일을 통해서 유용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법 트랩은 ‘오토 캐스팅’을 이용했어. 마법 트랩은 마법진의 한 종류. 마법진의 형태에 따라 마나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면, 마나는 마법 트랩의 형태를 기억하게 돼. 나는 너와 싸우는 도중에 오토 캐스팅으로 마법 트랩을 형성했고, 네가 나에게 접근하자마자 그것을 바닥에 흘려보내서 마법 트랩을 발현시켰지. 그리고 블링크. 사실 이 방법으로 난 네가 쓰러질 거라고 생각했어. 홀드 트랩과 썬더 캐논의 연계는, A급의 몬스터라고 해도 버틸 수 없거든.”

마법 트랩.

새로운 정보였다.

마나의 기억이라는 것은, 마법이라는 넓은 분류 안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크리스 카일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던 크리스 카일도, 진지하게 경청하는 강민혁의 태도에 눈빛이 바뀌었다.

‘이 녀석, 진심이야.’

처음에는 의심했다.

어쩌면 이것이 자신을 놀리는 하나의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런데 강민혁의 태도는 진지했다.

상대방이 자신을 깎아내렸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발전을 위해 지난 일을 잊었다.

강민혁이란 그런 사람이었다.

강민혁에게는 선이 있다.

그 선만 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든 간에 ‘이득’에 따라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크리스 카일이 했던 일.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전사에 대한 편견에, 그리고 승부에 대한 욕심에. 경기 전에 상대를 도발하는 것은 매우 흔하다. 중요한 것은 경기가 끝난 이후의 태도고, 크리스 카일은 결국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강민혁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강민혁의 어린 시절.

후계자로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싫은 사람을 모두 배척할 수는 없었다.

정판수를 끌어안고 그와 같이 다녔던 것처럼, 강민혁은 싫어하는 사람도 상황에 따라 활용하는 법을 알았다.

크리스 카일의 설명이 끝났다.

이제 강민혁의 차례.

강민혁이 말했다.

“네가 제일 궁금한 건 블링크의 이동을 따라잡은 방법이겠지. 그건 사실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야. 체내에 있는 마나를 각 신경에 부여해서, 감각을 최대한 예민하게 만들면 ‘초감각의 경지’에 들어서게 되지. 이때 나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어. 네가 내쉬는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감각이 극한으로 발달하거든. 덕분에 나는 마나의 흐름이 보였어. 블링크가 사용된 직후, 그로부터 이어지는 마나의 끝이 네가 도착할 지점인 게 확실했거든. 덕분에 곧바로 따라잡을 수 있었지.”

강민혁의 설명.

경악의 연속이었다

강민혁은 초감각, 검막, 오라 웨이브에 대해서 말했다.

굳이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이들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그 기반이 되는 단전의 힘, 그리고 각 기술의 체계를 모른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이건 정보의 거래다.

자신의 것을 알려준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강민혁은 새로운 것을 얻어 더욱 발전한다.

‘..대단해.’

크리스 카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강민혁의 기술.

그건 상당한 체계를 갖추었다.

그냥 어중이떠중이들이 사용하는 기술 같은 것이 아니다.

마치 마법처럼, 오랜 세월 공을 들여 완성한 하나의 체계.

이런 대단한 기술을 강민혁이 직접 만들었다고 생각하자, 크리스 카일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이 녀석은 진짜 괴물이었어.’

새로운 세상.

새로운 문명.

그것이 ‘클리스만’이라는 사내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남들은 마법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에서, 그는 새로운 길을 직접 개척하고 있었다.

‘이래서 엘리샤가 클리스만을 조심하라 했던 건가.’

엘리샤.

크리스 카일이 아무리 발악해도 따라잡지 못한 왕실 마법 아카데미 최고의 재능. 사실 강민혁을 인정하지 못한 이유는 엘리샤의 탓도 있었다. 엘리샤가 그런 말을 하면서, 크리스 카일은 강민혁을 반드시 쓰러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 엘리샤가 강민혁을 인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대화는 끝났다.

강민혁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자,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은 대화.

짧은 만남.

시작은 좋지 않았으나, 강민혁은 크리스 카일과의 대결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개월 전.

처음 마법 학과에 입학했을 때, 강민혁은 솔직히 마법을 무시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헌터로서 난 끝났어.’

검을 버렸다.

아버지는 항상 힘을 강조했고, 그의 말처럼 마법사는 도구로서의 역할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상은 불가능하다.

A급 몬스터조차 쓰러트리지 못하는, 그리고 강화 전사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마법사는 결국 한계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크리스 카일.

그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 최고가 아니다.

이번 결투 대회 우승 후보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마법사를 상대로도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에, 자신도 모르던 ‘편견’이라는 것이 사라졌다.

‘마법사는 강해.’

크리스 카일과의 결투가 끝나고.

강민혁은 곧바로 숙소에 틀어박혔다.

결투 대회는 넉넉한 기간을 두고 진행된다.

그 안에 결투의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고 싶었다.

크리스 카일이 사용했던 기술을 분석하였고, 마법사로서 자신이 익힐 수 있도록 머릿속에 넣었다. 그리고 강화 전사로서 그 기술들을 공략할 방법을 찾았다. 처음 겪는 상황이라 당시에는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제는 절대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말이다.

수호문.

그곳에서 강민혁은 많은 것을 경험했다.

실수도 했고, 실패도 맛보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강민혁이 동기들 중에서 최고로 올라설 수 있었던 이유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경험.

그게 실수든, 실패든.

그리고 자만에 빠질 수도 있는 승리의 경험이든.

강민혁은 어떻게든 ‘발전의 가능성’을 얻고자 노력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강민혁은 자존심을 버리고 크리스 카일에게 먼저 다가감으로써, 발전의 가능성을 얻었다.

남들이 어떻게 보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모든 과정은 결과로 평가받을 테니까.

결투 대회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강민혁은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다음 상대도 차례로 쓰러트리는 강민혁의 모습에, 결투 대회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아니, 정말 엄청나다니까? 마법사들이 상대가 되질 않아.”

“난생 이런 광경은 처음 봐. 마법사들의 마법이 적중하지도 않는 데다, 이상한 막 같은 것을 형성하더니 마법도 막아내더라고. 블링크? 에이, 이 사람아. 클리스만은 블링크를 사용해도 개 코가 달렸는지 귀신같이 따라붙는 능력이 있어. 마법사는, 클리스만을 상대로 도망가지 못해.”

“어쩌면 클리스만이 우승할지도 몰라.”

소문이 부풀었다.

그만큼 강민혁의 활약은 충격적이었다.

다음 상대들.

그들은 크리스 카일보다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다. 5서클 마법사이기는 하나 다소 능력이 떨어지는 부류였고, 크리스 카일과의 결투로 많은 발전을 이룬 강민혁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그래도 크리스 카일은 강민혁을 몰아붙이기라도 했지, 그들은 마법을 몇 번 사용하지도 못하고 항복을 선언했다.

연전연승.

마침내 8강전이 이루어졌다.

상대는 제법 실력이 있다고 알려진 5서클 마법사였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팍!

“크악!”

오라의 파편.

그것을 정확히 마나의 흐름에 작렬시켰다.

블링크로 사라지려던 상대는 큰 충격을 받았고, 강민혁은 곧바로 달려들며 상대를 궁지에 몰았다.

상대는 끝까지 발악했다.

각인 마법을 발현시켰으나, 이미 패색(敗色)은 짙었다.

관중석의 중심.

위에서 경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비드에게, 옆에 있던 마법 학과의 교수가 말했다.

"총장님은 클리스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녀석은 이 세상의 상식을 무너트리는 괴물입니다. 마나도 서클이 아니라 단전에서부터 비롯되며, 마나를 사용하는 방식이 이 세상의 상식과는 모두 다릅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나타난 겁니까?”

경악에 찬 목소리.

아비드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결투 대회 참가를 승인한 것은 아비드였으나, 그렇다고 이런 결과를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대체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

클리스만.

그는 시련의 탑에 도전했었다.

그곳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그리고 마법이 아니라 왜 검을 사용하는 것일까?

머릿속의 정보들이 서로 어긋났다.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그들이’ 클리스만을 주시하고 뒤를 봐주는 것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비드가 말했다.

“위험한 힘이다. 마법은 몬스터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고, 그렇기에 사람들은 마법을 중심으로 하나의 문명을 이루었다. 그런데 만약 클리스만이 결투 대회에서 우승하면 어떻게 될까? 상식이라는 것이 무너지겠지. 사람들은 더 이상 마법만이 이 세상의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을 테고, 마법이 아니라도 차선책을 택하는 사람이 생겨날 것이다. 어쩌면, 마법이 최선책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수장.

그로서는 바라지 않는 일이다.

마법의 힘이, 마법의 문명이 유지되길 바란다.

그러나 걱정하진 않았다.

적어도, 이번 결투 대회에서 클리스만이 우승할 일은 없을 테니까.

“8강이 끝이다. 크리스 카일을 상대로 보여준 모습이라면, 4강전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엘리샤.

그녀의 결승전 진출은 확정적이다.

그리고 강민혁의 4강 상대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졸업생이자, 장벽에서 워 메이지(War Mage)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다.

게다가.

‘6서클 마법사이기도 하지.’

사람들은 말한다.

5서클부터는 모든 단계가 전혀 다른 세상이라고.

강민혁이 4강전에 진출한 것은 분명히 대단한 일이나, 모두가 이번만큼은 그의 탈락을 단언했다.

전장에서 닳고 닳은 6서클 워 메이지.

온실 속의 화초인 크리스 카일과는 다르다.

그는 강력한 우승 후보이자, 마법 문명에서도 강자로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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