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24. 두 문명이 싸우는 방식(2) >
예선전이 끝났다.
그리고 곧바로 공개된 성적에, 강민혁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마법 문명의 마법사들은 다르다 이건가.”
[클리스만]
[60위, 본선 진출]
60위.
64명만을 선발하는 결투 대회 본선에서, 간신히 끝자락에 걸친 기록이었다.
클리스만은 아르마딜로를 공략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클리스만의 육체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고, 때문에 자신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결과는 아슬아슬한 통과. 그것도 60위부터는 2~3초의 차이로 순위가 갈렸다. 65위로 탈락한 사람의 기록이 5분 4초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강민혁이 조금만 늦었다면 본선 진출에 실패했을 것이다.
재밌었다.
마법 문명의 마법사들이 기대 이상이라는 사실은, 굴욕감보다는 강민혁을 들뜨게 만들었다.
저들은 자신의 미래다.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목에 있는 사람들의 수준이 떨어졌다면, 강민혁은 오히려 실망했을 것이다.
1위의 기록.
그 참가자는 바로 ‘엘리샤’였고, 결과는 압도적이었다.
[1위 엘리샤]
[1분 38초]
피식, 웃음만 나오는 기록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빠르다 할지라도, 그리고 자신이 아니라 정판호가 시험을 본다 할지라도 저렇게 빨리 아르마딜로 30마리를 처리할 수는 없다. 그야말로 괴물 같은 기록. 그리고 강민혁보다 앞선 기록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4서클 마법사도 여럿 있었다. 확실히 다수의 적을 처리하는 데 있어, 강화 문명은 마법 문명의 마법사를 앞설 수 없었다.
그래도 통과해서 다행이었다.
마법사들의 실력을 조금이나마 확인하고 나니, 진심으로 그들과 붙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런데 웃긴 건, 강민혁이 마법사들의 기록에 감탄한 것처럼 마법사들은 그보다 더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탈락할 줄 알았던 강민혁의 합격에, 마법사들은 현실을 믿지 못했다.
“...클리스만이 본선에 진출했다고?”
“말도 안돼!”
“어떻게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고 아르마딜로 30마리를 4분 52초 만에 처리할 수 있지? 이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아르마딜로의 외피는 질긴 데다, 그 많은 아르마딜로를 처리하려면 못해도 10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텐데. 대체 클리스만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그들의 충격은 더했다.
강민혁은 양쪽 세계를 이해하고 납득하고 있다면, 그들에게 ‘강화 문명’은 너무나도 생소한 것이었다.
강민혁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래도 강민혁에게는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선전이야 어중이떠중이들을 걸러내는 과정이라면, 본선 진출자들은 정말 실력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진표]
[64강 클리스만 vs 크리스 카일(Chris Kyle)]
강민혁의 본선 상대.
그는 왕실 아카데미 졸업반에 속한 마법의 천재였다.
현재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인정하는 최고의 마법 천재는 바로 엘리샤다.
학생의 신분으로 6서클의 경지에 오른 그녀는, 화이트 캐슬의 입성 가능성이 벌써부터 논의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밑에.
압도적인 천재를 제외하면 어떤 인물이 있을까?
그중 하나가 크리스 카일이었다.
5서클 마법사이며 완벽주의자라고 불리는 그는, 엘리샤만큼은 아닐지라도 항상 최고의 성적을 보여주었다. 그의 예선전 기록은 2분 58초. 강민혁의 상대로는 과할 정도로 뛰어난 마법사였다.
본선 직전.
아카데미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영국의 자랑이다.
그곳에서 진행되는 행사는 모두 방송으로 내보내 지기 때문에, 출전자들의 감정과 포부 같은 것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래야, 사람들이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천재들을 보며 자긍심을 갖는다.
크리스 카일의 인터뷰.
MC가 물었다.
“상대가 검을 사용하는 클리스만입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깔끔하게 넘긴 올백의 금발 머리.
그 아래로 차가운 인상의 크리스 카일은, MC의 질문에 표정을 살짝 일그러트렸다.
“저는 어째서 클리스만 같은 녀석이 결투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린 드래곤 상황에서 클리스만이 좋은 활약을 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결투 대회는 마법사들의 축제입니다. 그건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려는 목적으로 부르는 명칭이 아닙니다. 마법사 외에는 감히 발을 들일 수 없기에, 그간 마법사가 아닌 이들은 결투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앞.
크리스 카일의 시선이 닿는 끝에는, 다음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는 강민혁이 있었다.
이건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자신의 상대가 강민혁이라는 사실이 공개되었을 때, 크리스 카일은 진심으로 자존심이 상했다.
‘신성한 무대에 근본도 모르는 녀석이 발을 들이다니.’
화가 났다.
4분 52초?
대단한 기록이다.
예선전을 통과한 것은 인정해줄 만하나, 마법사와의 1대1 대결을 전혀 다른 문제다.
"장담하는데 클리스만은 제 몸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이번 경기는 기대하지 마십시오. 일방적인 경기가 될 것이고, 의료팀은 부상당할 클리스만을 위해서 준비하고 계셔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터뷰가 끝났다.
상대에 대한 존중도, 상대를 쓰러트릴 전략 같은 것도 없었다.
보통은 결투의 예를 지키며 전략에 대해서 말하는데, 크리스 카일은 강민혁을 인정하지 않았다.
마법 문명.
마법이 고도로 발달된 이 세상에서, 2000년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 같은 강민혁의 모습은 학생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이곳이 만약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다면, 강민혁의 힘에 검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마법이라는 소수에게만 허락된 권한이 없는 사람들에게, 물리적인 능력은 동아줄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곳은 다르다.
결투 대회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서 치러지는 것이고,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마법사의 성지다.
수많은 대마법사가 탄생한 땅.
그러니, 강민혁의 존재는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강민혁의 차례.
MC의 질문은 전과는 달리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크리스 카일님의 마법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계십니까?”
이 세상의 상식.
마법에 맞으면 최소 중상이다.
그리고 아무리 몸놀림이 재빠르다 할지라도, 마법을 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
마법 문명의 마법사들은 빠른 캐스팅과 그리고 순간적인 상황을 대처할 충분한 능력을 갖추었다.
강민혁이 카메라를 보았다.
재밌었다.
이들의 감정이 들끓으면 들끓을수록, 강한 흥미가 돌았다.
“간절히 부탁하는데, 저를 상대로 제발 쉽게 쓰러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크리스 카일 선배님이 본인의 말처럼 대단한 마법사이길 간절하게 바랍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우승이 아니라, 뛰어난 마법사와의 좋은 승부입니다. 결투장 위에서 저에게 중상을 입히셔도 절대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좋은, 아니 재밌는 승부를 기대하겠습니다.”
".........?!"
MC의 눈이 커졌다.
과할 정도로 당돌한 발언.
고개를 돌리니, 아직 나가지 않은 크리스 카일의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도발이었다.
강민혁은 지금 크리스 카일을, 아니 왕실 마법 아카데미 전체를 도발했다.
화이트 캐슬의 보물?
탐난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명성만큼이나 그에 어울리는 보상을 내놓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강민혁에게 중요한 건 보물이 아니다.
바로 경험.
강민혁은, 마법 문명 마법사들의 진짜 실력을 보길 원한다.
‘이번 결투 대회는 내 성장의 자양분이 될 거야.’
그들이 싸우는 방식.
그들이 근접전에서 사용하는 마법.
그 모든 것을 기억할 것이다.
전력을 다해 그들을 쓰러트리고자 노력한다면, 그들 또한 본인들의 밑천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터.
그래서 도발했다.
그리고, 도발은 먹혔다.
“클리스만 선수는 사전 인터뷰에서 ‘크리스 카일’ 선수가 제발 전력을 다하길 원한다는 발언을 했었죠. 그래서 시작부터 많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크리스 카일 선수는 완벽주의자, 혹은 프로페서(professor)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는 마법사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수에게 전력을 다하라니요. 클리스만 선수는 지금, 잠자는 맹수의 코털을 건드렸습니다.”
결투장 위.
MC의 발언에, 결투를 지켜보러 찾아온 사람들이 흥미 어린 반응을 보였다.
강민혁의 도발로 경기에 스토리가 생겼다.
단순히 검을 사용하는 특이한 참가자의 도전이 아니라, 검과 마법의 대결로 상황이 변해버렸다.
“자, 그럼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삐익-
결투를 알리는 신호.
끓어오르는 마나를 억지로 억누르고 있던 크리스 카일이, 시작과 동시에 마나를 폭발시켰다.
“체인 라이트닝."
치지지지직!
파바박.
각인 마법.
그의 손등에서 하얀 불빛이 일어나며, 전기 다발이 그대로 강민혁을 덮쳤다. 곧바로 땅을 박차는 강민혁. 상대의 공격에 쉽게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순간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로 강민혁의 스피드는 빨랐고, 강민혁은 그대로 크리스 카일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때.
“어딜!”
확!
파바바박!
전기 다발의 방향이 변했다.
전기 다발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강민혁을 따라잡았고, 강민혁은 황급히 뒤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미 사용한 마법의 좌표를 바꾸다니. 크리스 카일은 실시간으로 체인 라이트닝의 좌표를 새로이 입력하며, 강민혁과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무빙 캐스팅.
근접 전투의 기술들이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더블 캐스팅으로 하나의 마법을 더 사용하려고 하자, 강민혁의 검에서 마나가 일었다.
확!
사사삭!
오라 웨이브.
강민혁이 크리스 카일의 캐스팅을 방해했다.
정확히 마나의 흐름을 끊는 공격이었는데, 크리스 카일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순식간에 회수되는 체인 라이트닝의 힘. 5개의 서클이 팽팽 회전하며, 2서클 마법을 캐스팅 없이 완성시켰다.
“실드(shield).”
카앙!
카카카캉!
오라의 칼날이 막혔다.
그러나 강민혁도 그러한 사실을 예상했다.
근접전에 자신을 보인 크리스 카일이, 제임스 체스터처럼 허무하게 당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빠르게 접근하는 강민혁.
결국 결투의 관전 포인트는 명확했다.
강민혁의 검이 닿느냐, 크리스 카일의 마법이 먼저 강민혁을 무너트리느냐.
그 사이 크리스 카일의 손에 불길이 일어났다.
“파이어 버스트(Fire Burst)."
콰앙!
화르르르르륵!
불길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뿐만이 아니라, 크리스 카일은 마나를 일으키며 캐스팅이 필요 없는 2서클 마법을 연속적으로 사용했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작렬하는 마법. 거의 3서클의 위력을 발휘하는 2서클 마법의 위력에, 강민혁은 섣불리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마법의 폭격이 얼마나 대단한지, 강하게 타오르는 화염으로 인해 피부가 화끈거릴 정도였다.
서클의 상관관계.
캐스팅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생기면서, 마법 문명의 마법사는 근접전에 약하지 않았다.
더블 캐스팅과 즉발 마법.
크리스 카일은 양손의 검을 적극적으로 휘둘렀다.
“썬더 캐논(Thunder Cannon)."
치지지지직!
5서클 전기 계열 마법.
시야를 가득 메울 정도로 강력한 전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크리스 카일은, 동시에 강민혁의 주변으로 마법을 뿌리며 그가 피할 수 있는 길을 제한했다.
그렇다면 택할 수 있는 길목은 딱 하나.
그곳에, 썬더 캐논이 작렬했다.
쾅!
치지지지지지지직!
엄청난 위력이었다.
MC가 격양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정말 대단합니다! 역시 크리스 카일 선수입니다. 완벽주의자라는 별명답게, 촘촘하게 연계되는 마법으로 클리스만 선수를 밀어 붙입니다. 이대로라면 클리스만 선수의 충격이 매우 클... 어?!”
확!
강민혁이 번개 다발을 뚫고 나타났다.
당황으로 얼룩진 MC의 표정.
어떻게 피했냐고?
‘마나를 안력(眼刀)에 집중하면 마나의 흐름이 보인다.’
간발의 차이.
강민혁은 마나가 움직이는 흐름을 파악했고, 마나가 작렬하기 직전에 몸을 먼저 피했다. 2서클 마법의 위력은 몸으로 버텼다. 아무리 3서클의 위력을 보인다고는 하나, 마나를 두른 피부는 그 정도로는 충격이 크지 않다.
선택과 집중.
그게, 사람들에게는 썬더 캐논을 버틴 것처럼 보였다.
전기 다발을 뚫고 나타나는 강민혁의 모습에, 관중석에서 감탄성이 들렸다.
‘대단해.’
상대를 인정했다.
크리스 카일.
그는 뛰어난 마법사였다.
각인 마법과 좌표 컨트롤로 선공을 시도한 그는, 폭발적으로 이어지는 연계 공격으로 강민혁을 궁지에 밀어붙였다. 보통의 강화 전사였다면 그 공격에 당할 것이다. 상대가 5서클 마법사라고는 하나, 웬만한 강화 전사들은 감히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순간적인 공격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건방진 새끼.”
크리스 카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법의 실패?
그걸로 포기하는 눈빛이 아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언제든 강민혁을 압살할 수 있다는 확신에 찬 표정.
곧바로 마나를 일으키는 그의 모습에, 강민혁은 마법사가 이 세상의 주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 대회에서 우승하고 싶어졌어.’
확실했다.
이 세상은 달랐다.
진짜로 싸울 줄 아는 마법사들.
이들과의 경험은, 마법사로서의 자신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터.
‘아니, 반드시 우승한다.’
타닥!
강민혁이 땅을 박찼다.
지금부터가, 진짜 승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