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 23. 홍염의 비기(4) >
엘리샤가 말했다.
“현재에 이르러 홍염의 마법은 체계가 변했어. 예전과는 달리 화염의 서클을 형성해서 불의 지배력을 높이고, 단계별로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하지. 하지만 ‘불의 정령’과의 계약이 가능하다면, 사실 이와 같은 과정은 필요하지 않아. 정령과의 계약. 그 하나 만으로도, 너는 보통의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불의 지배력을 얻을 수 있거든.”
엘리샤는 특이 케이스다.
타고난 불의 지배력이 높아, 정령과 계약하지 않았음에도 상당한 불의 지배력을 보였다.
그러나 지금 엘리샤가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강민혁의 요구대로 근원을 잃지 않은 홍염의 마법이었다.
“불의 정령과 계약하면 2가지의 선택지가 생겨. 첫 번째는 소환. 말 그대로 불의 정령을 소환해서, 그가 직접 싸울 수 있도록 마나를 공급하는 거지. 그리고 두 번째는 지배. 속성의 지배력이 높아지면, 해당 속성들은 모두 마법사의 마나에 반응하게 돼. 직접 보여주자면.........."
바로 앞.
그곳에 모닥불을 피운 상태였다.
엘리샤가 손을 들어 올리자, 모닥불의 불길이 손길을 따라 움직이며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파이어 볼.”
화르르륵.
불길이 마법으로 변했다.
활활 타오르는 화구는, 시뻘건 불길을 날름거렸다.
“이처럼 지배력을 활용해서 주변에 있는 불길을 마법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 나는 정령과 계약하지 못해서 지배력으로 다룰 수 있는 불길에 한계가 있지만, 1000년 전만 하더라도 세상을 불태우는 화마(火魔)조차도 다룰 수 있다고 들었어. 이게, 내가 사용하는 홍염의 마법의 근간이야.”
지배.
불길을 다스리는 능력.
그로부터, 홍염의 마법은 세 가지의 특별한 기술을 사용할 수 있다.
"불길을 다스리는 것을 불의 권능이라고 표현한다면, 그 불길을 하나로 모아 위력을 상승시키는 기술을 염화(炎火)라고 불러. 만약 그 기반이 파이어 볼이라면, 염화로 사용한 마법은 흡수한 화력에 따라 배 이상의 위력을 보이지. 그리고 불길을 수많은 화염 마법으로 만들어내서 동시에 쏟아내는 것을 화우(火雨)라고 하는데, 이 기술이 위력적인 이유는 마법이 일어나는 위치가 불길이 있는 어디에서든 가능하다는 거야. 만약 사방에 불길이 일어난 상태로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 사방에 있는 불길이 모두 마법으로 변해서 적을 덮치게 되는 거지.”
불의 권능.
그로부터 비롯되는 염화와 화우.
듣는 것만으로도 홍염의 마법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었다.
엘리샤는 홍염의 ‘진짜 힘’을 사용하지 못하는데도, 영국 왕실 아카데미가 대표하는 마법사가 되었다.
마지막.
홍염의 마법에는 최종 단계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겁화(却火). 이 기술은 최대한 사용하지 않는 게 좋아. 화염의 서클에서 보유하고 있는 마나와 세상에 떠도는 모든 불의 원소. 그것을 폭발시켜서 세상을 화염의 지옥으로 뒤덮는 기술이거든. 이건 시전자도 보호해주지 않아. 만약 네가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찾아온다면, 혼자서 죽는 것이 억울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야.”
설명은 계속되었다.
엘리샤는 직접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보여주었고, 아닌 것들은 기록을 남겨주었다.
그녀는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강민혁이 정령의 계약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이상, 그녀도 자신의 약속에 충실했다.
설명이 끝났다.
엘리샤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로써 나는 네게 홍염의 마법을 모두 전수해주었어. 비기를 외부에 퍼트린 나는, 하늘나라로 갔을 때 선조들의 원망을 듣겠지. 하지만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나는 반드시 정령과의 계약에 성공해서, 진짜 홍염의 마법을 사용할 거거든. 대신 나랑 약속해줘. 내게 얻은 홍염의 마법을 절대 악행(惡行)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고. 그것만 약속한다면, 네가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을게.”
그녀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이미 거래를 맺은 이상, 강민혁으로서는 약속을 추가할 의무는 없다.
하지만.
“알겠습니다.”
강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엘리샤의 표정이 밝아졌다.
엘리샤는 강민혁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짧은 시간이지만, 강민혁이라는 사람이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왔다.
강민혁은 당장 정령 계약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마법에 재능이 없는 클리스만의 몸으로는, 정령 계약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정령 마법 또한 마법의 한 갈래.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령 마법도 사용하지 못한다.
‘일단 정령 마법에 대해서 최대한 알아보자. 그러고 나서, 내 몸으로 직접 계약을 맺어보는 거야.’
불안 요소는 많다.
그러나 시도해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만큼 엘리샤가 말해준 홍염의 마법은 매력적인 요소가 많았고, 강화 문명에 정령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링크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걱정되는 부분은 그들이 인간을 적대하는 것. 그것은 미리 대비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결국 직접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한 교수가 나타나, 학생들에게 말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이번에 화이트 캐슬(White Castle)에서 주관하는 결투 대회가 진행될 예정이다. 보상은 화이트 캐슬의 보물. 참가 신청을 한 사람들은, 미리미리 준비하도록.”
화이트 캐슬.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강민혁은 학생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를 통해 정보를 유추할 수 있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 출신의 대마법사들. 그들이 소속된 단체의 이름을 화이트 캐슬이라고 불러.’
세계 3대 세력.
그중 하나가 바로 화이트 캐슬이었다.
화이트 캐슬은 왕실 마법 아카데미 출신만 받는다는 엄격한 제한을 두었고, 아카데미가 배출해낸 대마법사들은 내부 평가에 따라 화이트 캐슬의 선택을 받았다. 알려진 바로는 7서클 마법사만 해도 10명 이상인 데다, 화이트 캐슬의 리더는 무려 8서클의 경지였다. 그들은 세상의 정의를 수호하고 아카데미가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영웅이라 칭송받는 자들이다.
그 외에도 두 가지의 세력.
마녀 집단 블랙캣 (Black Cat)과 신비주의 세력 그레이 로브(gray robe)가 있다.
그들은 철저하게 본인들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며, 화이트 캐슬과는 다르게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지 않다.
당연히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화이트 캐슬이 제시하는 보상은 대단할 게 분명하니, 벌써부터 지원자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했다.
특히.
“화이트 캐슬이 주관하는 마법 대회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출신이며 7서클 아래의 마법사들은 모두 참가가 가능해. 그러니까, 현재 재학생뿐만 아니라 졸업한 학생들도 몰려든다는 의미지. 화이트 캐슬의 입성을 바라는 실력자들로서는 정말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어.”
주변이 떠들썩했다.
학생들이 결투 대회에 대해서 말했지만, 강민혁은 그에 신경 쓰지 않았다.
흥미로운 소식이기는 하나, 겨우 1서클에 불과한 자신이 참석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강민혁은 아비드의 호출을 받고 뒤늦게 알았다.
바로, 자신이 결투 대회에 참가 신청을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비드가 말했다.
“정말 참가할 생각인가?”
그가 내민 것은 참가 신청서였다.
한 달 전에, 클리스만은 화이트 캐슬이 주관하는 결투 대회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내가 참가하길 원하는 건가.’
결투 대회 기간.
자신이 빙의하는 시기와 겹친다.
그렇다면 클리스만은 본인이 출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참가하길 바란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결투 대회에 흥미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마법으로는 출전할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마법의 경지가 낮아서, 마법 실력이 뛰어난 선배님들을 마법으로 이길 자신이 없거든요. 그래서 궁금한 게 있습니다. 결투 대회는 그 명칭이 마법 대회가 아닙니다. 참가자들이 나와서 서로 승부를 보는 것이지, 마법만 사용하라는 규칙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혹시 검으로 참가해도 되는 겁니까? 그게 가능하다면, 저도 결투 대회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대회 규칙.
혹시 몰라서 읽어두었다.
하지만 강민혁은 자신의 논리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법사가 주류인 이 세상에서, 마법이라는 규칙을 명시하지 않은 것은 암묵적인 룰이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도 지켜야 할 선.
그래서 결투에서 마나가 떨어지는 상황에도, 참가자들은 절대 물리적인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걸 안다.
거절당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클리스만이 의도한 일이라면 도전이라도 해봐야 했다.
아비드가 웃었다.
“원래대로라면 불가능한 일이지. 결투 대회의 역사를 보더라도, 그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너의 참가가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결투의 규칙에 그런 조항이 없는 것은 사실이고, 무엇보다도 결투 대회의 참가자들이 너의 출전을 원하고 있는 상황이거든.”
“...예?”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결투 대회 참가자들.
그들이 왜 자신의 참가를 원한단 말인가.
강민혁이 클리스만으로서 이런저런 일을 벌였다지만, 그동안 인간관계는 그렇게 넓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
그건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다.
“네가 검으로 웨어 울프를 쓰러트리는 순간, 자부심 높은 마법사들의 상식이 무너져 내렸다. 당연히 마법이 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마법사들에게, 너라는 돌연변이가 처음 나타난 거지.”
그린 드래곤 상황.
그 여파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그것은, 새로운 상황을 만들었다.
“네가 결투 대회 참가 의사를 밝혔다는 소식을 듣고, 다른 참가자들이 내게 찾아와서 말하더군. 클리스만, 네가 마법의 힘을 무시하기 때문에 무모한 도전을 하는 거라고. 그러니 네가 현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참가 신청을 반려하지 말라고 강조했어. 어차피 네가 결투 대회에 참가한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클리스만의 세상.
이곳은 강화 문명과 다르다.
마법이 주류고, 강화 전사들이 마법사를 배척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만이 옳다고 굳게 믿는다.
강민혁은 그 판을 깨트렸다.
A급 몬스터를 쓰러트린 활약은, 단순히 감탄만으로 끝난 일이 아니었다.
‘그랬던 건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실력에 대한 감탄.
그런데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질투심이었다.
마법이 아닌 힘.
그것을 전면에 내세운 강민혁의 행보는, 주류인 마법사들로서는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어이가 없군.’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결국 어떤 세상이나 인간은 똑같았다.
강화 전사들은 그들이 나쁜 사람이기에 마법사들을 배척한 걸까?
아니다.
힘을 가진 자들의 인간성일 뿐이다.
강화 전사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우위를 만끽하는 것일 뿐이고, 마법사들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위치기에 비주류의 현실에서 만족했다. 그건 상황이 부여하는 인간성의 진면목. 만약 그러한 입장이 뒤바뀐다면, 마법사는 강화 전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클리스만의 세상과 같은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 힘을 가진 자들은, 언제나 그 밑의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이 현실이다.
“재밌네요."
강민혁의 표정에 흥미가 돌았다.
이전까지는 클리스만의 의도를 따라주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참가 의사가 생겼다.
“그래? 그래도 참가하겠다는 의미인가?”
결정권을 넘겼다.
강민혁이 선택을 내린다면, 아비드는 결투 대회 최초로 검사의 참가를 허락할 것이다.
모두가 동의한 일.
이제는 강민혁의 선택에 달렸다.
‘마법 문명의 마법사들.’
사실 그간 궁금했었다.
그들이 얼마나 강력한지.
근접전에도 자신감을 보이는 그들을 상대로, 강화 전사인 자신의 힘이 얼마나 통할 것인지를.
이번 대회는 기회였다.
두 문명의 힘을 비교해볼 기회.
그리고, 분명히 결투 대회에는 워 메이지라 불리는 부류들도 나타날 것이다.
대답은 이미 정해졌다.
“예, 참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