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86화 (86/197)

86화.  < 23. 홍염의 비기(3) >

홍염의 마법.

대대로 내려지는 일인전승의 마법은 1000년 전만 하더라도 불의 정령 샐러맨더(salamander)와 같이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1000년 전에 있었던 차원의 폭발로 인해서 정령계와의 링크가 완전히 끊어졌고, 홍염의 마법은 반쪽만 남은 신세가 되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엘리샤는 정령이 없는 세상에서도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천재라고.

하지만 엘리샤 본인은 자신의 힘이 반쪽짜리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타고난 불의 지배력이 강해서 홍염의 마법을 어느 정도는 구현할 수 있었지만, 그건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서 항상 의문이 있었다. 포세이돈 또한 자신과 사정이 다르지 않을 텐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정령이 있던 시절’의 마법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정령과 연관 짓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수밖에 없는 근거가 있었다.

“포세이돈은 현재 세계를 대표하는 대마법사 중 하나. 그의 마법에,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포세이돈이 강력한 물의 지배력을 보이는 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그 누구도 정령과의 계약은 생각하지 않았어. 사람들이 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 1000년 전의 폭발로 정령계와의 링크가 끊겼기 때문에? 정확히는 폭발의 영향을 받았지만, 당시의 문제는 단순히 링크가 끊긴 것으로 끝나지 않았어.”

정령 마법사들.

홍염과 벽파와 같이, 정령 마법을 추구하던 이들은 정령계의 사고로 인해 서로의 힘을 합쳤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정령계와 링크가 끊어진 이유를 알아보았고, 그 결과 진실을 알게 되었다.

"링크가 끊긴 이유는 정령계가 이 세상과 닿을 수 없는 머나먼 곳으로 떨어졌기 때문이야. 고로 우리가 아무리 그들에게 말을 걸어도, 정령들은 우리의 부름에 응할 수 없었어. 단언컨대 정령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만약 그랬다면, 내 선조들이 어떻게든 그들과 연결하는 방법을 찾았겠지.”

사실 1000년 전만 하더라도, 정령 마법은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속성 분리라는 어려운 기술이 없다 할지라도, 정령과의 계약을 통해 특정 서클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령계와 링크가 끊어지며 정령 마법사들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속성 분리를 이용한 활용법이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들은 속성 분리로 정령 마법과 유사한 힘을 내는 마법을 알아냈고, 그들은 일인전승의 명맥을 유지했다. 원래는 정령 계약-속성 분리가 정상적인 테크트리였다면, 정령 계약이라는 과정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니 믿을 수 없었다.

포세이돈 또한 새로운 속성 지배력 방법을 찾았을 뿐, 정령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알겠어? 네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를 했는지? 그러니 그만 지껄이고 꺼져. 마음 같아서는 네 녀석을 확 불태워버리고 싶지만, 전장에서의 정을 생각해서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고 있는 거니까.”

화륵.

화르륵.

그녀의 주변에서 불길이 일었다.

불의 지배력이 강한 그녀의 감정에 따라, 불의 마나가 저절로 반응했다.

그런데 강민혁의 반응은 덤덤했다.

그녀를 통해 그간의 사정을 듣게 되었지만, 그것은 이해를 도울 뿐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얘기는 끝났습니까?”

“내 말 못 들었어? 꺼지라고!”

“그건 제 얘기도 끝나고 결정하시죠. 저는 홍염의 마법을 대가로, 정령과 계약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이건 약속입니다. 제가 제안한 것이기 때문에, 먼저 정령과 계약하는 방법을 알려드리죠. 그렇다면 엘리샤 선배님도 손해 볼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만약 시도했는데 거짓말이었다면, 지금 일으킨 그 화염의 마나로 절 태워버려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뭐?”

엘리샤가 당황했다.

거래.

강민혁은 아주 납득할 만한 조건을 걸었다.

엘리샤가 걱정하는 것이 정령 계약의 진위라면, 그녀가 먼저 확인하면 해결이 되는 일이다.

“그런데 만약.”

스륵.

강민혁이 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기세가, 엘리샤의 목에 서늘하게 감돌았다.

“제 거래를 응하고 정령 계약의 존재를 확인했는데도 약속을 어기신다면, 그때는 선배의 예우를 해드릴 수 없습니다. 원래 거래라는 것이 그렇거든요. 약속 불이행의 대가가 얼마나 확실한지를 보여주어야, 다음부터는 절대 거래를 우습게 보는 사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진심이었다.

팔 한 짝을 잘라버리겠다는 기세에, 엘리샤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양자택일.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

만약 후자를 택한다면, 강민혁은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아설 것이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일인전승의 마법이 오랜 역사를 지녔다면, 그만큼 근원에 대한 욕망은 강렬할 터.

“...알겠어. 네 거래를 받아들이지.”

결국, 엘리샤는 굴복하고 말았다.

강민혁이 방법을 말해주었다.

“선배님의 말대로 정령계와 이쪽 세상은 많이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요. 그래서 특정 속성에 대한 강한 지배력이 필요한 데, 화염 속성의 서클을 형성한 선배님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죠.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건 정령계와 연결하는 마법진이고, 그 안에는 좌표가 설정되어 있어요.”

방법은 간단했다.

하지만 정령계의 ‘좌표’를 찾는 일이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엘리샤는 강민혁의 말대로 따랐고, 마법진을 설치한 뒤에 화염의 마나를 일으켜서 계약을 시작했다.

그러자.

화르르륵.

불꽃이 피어올랐다.

마법진이 붉은 불빛을 발하더니, 엘리샤의 정신이 차원 너머로 사라졌다. 정령 계약이라는 것은 육체의 거래가 아니다. 바로 정신의 거래. 엘리샤의 육체는 마나로 일렁이는 마법진 안에서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이곳과는 머나먼 거리에 있는 정령계로 떠나간 상태였다.

찰나의 시간.

엘리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식은땀을 흘렸다.

순간 마나가 다시 회수되며,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화악-

“하악, 하악.”

엘리샤가 숨을 헐떡였다.

강민혁의 시점에서는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로서는 많은 것을 경험한 것 같았다.

“저, 정령과의 계약에 실패했어.”

실패.

예상치 못한 변수다.

엘리샤 정도의 친화력이라면 당연히 성공할 거라 생각했다.

사실 엘리샤와 거래한 이유는 ‘홍염의 비기’를 알아내기 위함도 있지만, 강민혁이 직접 실험해보기 전에 엘리샤라는 선례를 지켜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정령 계약은 정신의 거래. 클리스만조차도 확신하지 못하는 미완성의 가능성이기에, 무턱대고 실험하기엔 위험성이 크다.

이건 거래다.

강민혁은 엘리샤가 원하는 것을 충족해주는 대가로, 많은 것을 얻어갈 뿐이다.

“왜 실패했죠?”

"네 말대로 이 마법진은 정령계로 통하는 것이 맞아. 문제는..정령계가 내가 들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어. 대대로 내려오는 ‘기억’에 의하면, 정령계는 자연의 힘이 풍부하고 각자의 속성이 꽃을 피운 천국과도 같은 곳이라고 했어. 그런데 내가 본 것은 지옥이었어. 정령계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나를 발견한 샐러맨더는 비명을 지르며 불를 뿜어댔어.”

엘리샤가 공포에 떨었다.

그녀는 불의 지배력이 강하다.

샐러맨더의 감정에 같이 동화돼버리고 말았고, 그녀는 순간 샐러맨더가 느끼는 공포를 공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정령들은 ‘몬스터’를 두려워하고 있었어. 그들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몬스터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거야. 대답해줘. 대체, 정령계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거야?”

“그건.........."

강민혁도 모르는 일이다.

강민혁의 세상에서 정령은 몬스터에 불과했고, 정령계라는 것 자체도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

순간 강민혁의 머리가 활짝 열렸다.

흩어진 퍼즐 조각들.

그게 전체의 형상은 아니었지만, 일부의 그림을 완성시켰다.

정령.

강화 문명에서 그들이 나타났던 역사를 되돌아가다 보면, 그들에게서 일정한 체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령들은 항상 레드 게이트에서 모습을 드러냈어. 차원의 균열이 일어나면, 그들은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닥치는 대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공격했지. 나는 그것이 단순히 몬스터들이 표출하는 분노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는 지도 몰라.’

아주 오래전.

A급 몬스터 샐러맨더가 나타나 서울숲을 불태웠다.

사람들은 샐러맨더를 무찔렀고, 폐허가 되어버린 땅 위에 ‘헌터 아카데미’라는 희망을 건설했다.

이후에도 그런 경우는 많았다.

웨인 라피에르가 영감을 얻었던 A급 몬스터 운디네 또한, 무차별적으로 주변을 공격하는 상황에 헌터들이 출동했었다. 생각해보면 공통점이 있었다. 정령들은 적아(敵我)를 구분하지 않았다. 만약 인간을 공격하는 과정에 몬스터들이 있다면, 그 몬스터들 또한 같이 공격하는 것이다.

하나의 가능성.

이전에는 미처 알아보지 못한, 새로운 가능성이 떠올랐다.

‘엘리샤의 말대로 정령계가 몬스터의 위협을 받고 있다면, 정령들은 인간뿐만 아니라 몬스터에게도 강한 분노를 표출한 것일 수도 있어. 샐러맨더가 서울숲을 불태웠던 사건. 사람들은 그게 단순히 샐러맨더가 자신의 힘을 표출한 거라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서울숲 밑에는 수많은 던전이 있었어. 만약 그 던전이 샐러맨더의 분노를 자극한 거라면? 굳이 서울숲을 전부 불태워버렸던 사건이, 정령계를 공격한 몬스터들에 대한 앙갚음일 수도 있어.’

그건 진실이 아니다.

아직 전체적인 그림이 완성되지 않은, 일부의 퍼즐만으로 유추할 수 있는 가설일 뿐이다.

강민혁이 말했다.

“선배님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2000년 전 차원의 균열이 일어나며, 이 세상에는 몬스터가 나타났고 동시에 정령계가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냈어요. 그때의 정령들이 인간에게 적의를 가진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정령의 입장에서는 인간 또한 이방인이었을 테니까요. 그러나 1000년 전에 있었던 차원의 폭발은 그들 또한 우리와 같은 재앙을 겪게 만들었는지도 몰라요. 정령계와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기던 그 날부터, 그들은 몬스터의 위협을 받은 것이죠.”

“...이 재앙이 우리만 겪는 게 아니라는 말이야?”

재앙.

엘리샤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위협하는 이 악마 같은 몬스터들이, 이 세상뿐만 아니라 정령계도 위협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녀와는 다르게 강민혁은 그러한 사실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강민혁이 사는 세상 또한, 몬스터들의 위협을 받고 있지 않은가. 이미 2개의 세상이 처한 현실을 알고 있기에, 또 다른 세상이 위협을 받는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였다. 강화 문명의 사람들은 정령을 몬스터로 규정했지만, 그것은 어쩌면 이성을 잃어버린 정령의 분노에 인간들이 죽어 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가설은 아니다.

정령계가 그토록 위태로운 상황이라면, 포세이돈이라는 존재는 의문투성이였다.

‘포세이돈은 어떻게 정령 마법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었을까? 그도 나처럼 정령계의 좌표를 알고 있고, 분노한 정령들을 설득해서 계약에 성공한 걸까? 그의 존재는 미스터리야. 언제고 그를 만나게 된다면, 그가 알고 있는 사실들을 확인할 필요성이 있어.’

일단은 현재.

지금이 중요하다.

가설을 어느 정도 정리했지만, 명확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거래는 이미 체결되었고, 강민혁은 약속을 지켰기에 대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약속대로 저는 정령과 계약하는 방법을 알려드렸어요. 분노한 정령을 달래서 계약하는 것은, 지금부터 엘리샤 선배님이 감당해야 할 문제죠. 그러니 약속을 이행할 차례에요. 제게 일인전승의 마법인 홍염의 비기를 알려주세요.”

엘리샤.

그녀는 얻은 것이 없다.

정령 계약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설로만 알고 있었던 정령계를 목격하는 순간 이미 결단을 내렸다.

“알겠어. 알려주도록 하지.”

홍염의 마법.

일인전승의 규율은, 오늘부로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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