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23. 홍염의 비기(2) >
시작은 아울베어였다.
이후부터는 시체 처리반이라고 불리는 놀(noil)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놀은 아울베어와는 다르게 D급밖에 되지 않는 몬스터지만, 피 냄새를 맡은 그들은 수십, 수백 마리의 무리를 지어 떼로 공격하는 습성이 있다. 그로 인해, 강민혁은 쉴 틈 없이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서걱!
베고.
또 베고.
강민혁의 검이 번뜩일 때마다 놀의 머리가 날아갔다.
얼마나 많은 놀을 죽였는지 숫자를 셀 겨를도 없었다.
결국 수백 마리의 놀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나서야, 강민혁은 숨을 돌릴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후훅, 후욱.”
숨이 차올랐다.
일단 강민혁은 최대한 안전한 곳에 몸을 숨겼다. 흙을 몸에 덕지덕지 문질러서 인간의 냄새를 옅게 만들었고,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클리스만이 자신에게 말한 시간은 6시간이다. 그 시간이 지나야 포탈이 다시 열린다고 했기에, 체력을 분배할 필요성이 있었다.
‘마나가 확실히 늘었어.’
아울베어를 처리할 때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미약한 양이었지만, 강민혁의 예민한 감각은 마나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포착했다.
다행히도 강민혁은 일기장을 챙겼다.
책장을 펼쳐, 미처 확인하지 못한 후반부의 내용을 확인했다.
[만약 네가 나를 위해서 장벽 너머로 넘어간다면, 예민한 너의 감각으로는 몬스터가 내 육체를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지. 그건 고대(古代) 마법의 효과다. 몬스터들을 죽이는 대가로, 그들의 생명력을 얻는 것이지. 이로 인해 나는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기반을 얻었다. 하지만 장점만 있는 마법은 아니다. 괴물들의 생명력을 얻으면 얻을수록, 내 정신은 점점 야성(野性)에 지배당하게 된다. 그러나 내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강해지는 것뿐이다. 강해지고 더 강해져서, 몬스터들을 모조리 몰살시키는 것이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고대 마법.
이해가 되지는 않으나,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
강민혁이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를 근거로 제시한다면, 강민혁으로서는 그저 믿는 수밖에 없다.
‘가족을 잃은 원한이 너를 이렇게까지 만든 건가.’
클리스만.
그의 정체는 모른다.
그가 정말 클리스만인지, 그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러나 클리스만이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클리스만은 인과율의 법칙을 어기면서까지 강민혁으로 하여금 자신의 몸에 빙의시켰고, 이번에는 고대 마법으로 강해지는 방법을 택했다. 그가 말하는 대가는 항상 자기 자신이었다. 자신의 안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다는 듯이, 클리스만은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장벽 너머.
수호 검법이라는 힘을 얻자마자, 클리스만은 강해지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대담한 선택을 내렸다.
강민혁은 강하다.
그래서 몬스터들을 상대로도 무사할 수 있었으나, 클리스만은 몸의 상처가 증명하는 것처럼 이곳에서의 시간이 절대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장벽 너머에서의 시간을 감내했다. 한 달 사이에 강해진 클리스만의 육체는, 그러한 시련을 대가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참 기구한 인생을 사는구나.”
한낱 인간.
수십억의 인구 중에, 클리스만은 겨우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다.
그런데 혼자 발악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행보를 알아주지는 않지만, 클리스만은 몬스터를 몰살키기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아픈 기억만 내려놓는다면, 그의 삶은 성공이 보장되어 있다.
본인이 알고 있는 마법 지식을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모두가 그를 떠받들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클리스만의 선택이다.
강민혁은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도록 도와줄 것이다.
탁.
검을 집었다.
남은 시간은 4시간 정도.
앞으로 4시간이 흐르면, 포탈이 다시 형성되며 숙소로 돌아간다.
‘그 시간을 허투루 쓸 수는 없지.’
짧은 시간.
그 안에 최대한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클리스만이 조금은 안전하게 장벽 너머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 테니까.
밤은 깊었고, 어둠이 강민혁을 집어삼키는 순간 강민혁은 아주 길고 긴 4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화악-
머리가 핑글 돌았다.
정신을 차리자, 강민혁은 다시 숙소로 돌아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후욱, 후욱.”
숨이 진정되질 않았다.
포탈이 열리기 직전까지도, 강민혁은 몬스터들의 공격에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싸움을 거듭해야만 했다.
그러나 살았다.
하얀 불빛이 강민혁을 집어삼켰고, 강민혁만을 본래의 공간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현재.
강민혁은 일단 공용 샤워실로 이동해서, 피로 찌든 몸을 씻어냈다.
쏴아아아-
“...크윽.”
쓰라린 통증이 밀려왔다.
강민혁이라고 해서 무사했던 것은 아니다. 수도 없이 달려드는 몬스터들로 인해서 강민혁도 몸에 상처가 생겼고, 그 통증을 이겨내며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였다. 사실 상식적으로는 체력적인 문제로 쓰러지는 것이 정상이었던 상황. 그런데 ‘생명력’을 흡수하는 능력이 강민혁에게 대항할 여력을 부여했다. 그게 없었다면, 강민혁은 몸을 숨기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클리스만.’
거울 안의 모습.
낯설었다.
14살이었던 클리스만이, 지금은 2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성숙하게 변했다.
서양인이라 이렇게 성장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확실히 클리스만의 성장 속도는 빨랐다.
생명력의 효과 때문인 걸까.
이 정도면 노화(老化)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았다.
일단 클리스만에 관한 생각은 털어냈다.
그가 설명해주지 않는 이상, 강민혁이 아는 정보만으로는 알아낼 사실이 없다. 전에는 클리스만의 정체를 알아보겠다고 여기저기 알아보았으나, 현재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클리스만.
그는 이 세상에서도 미스터리였다.
샤워를 끝내자 피로가 밀려왔다.
하지만 강민혁은 휴식이 아니라, 책상에 앉아 한편에 있던 책을 펼쳤다.
지금부터는 클리스만의 메시지를 읽는 것이 아닌, 강민혁으로서 지식의 성장을 할 차례였다.
이번 빙의.
클리스만은 크게 분류해서, 총 네 가지를 준비했다.
[최상급 5서클 마법]
[최상급 6서클 마법]
[최상급 7서클 마법]
보통은 강민혁이 서클을 형성하면 그에 해당하는 마법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최상급 7서클 마법까지 해서, 무려 수백 개의 마법이 책에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정말 7서클 최상급 마법도 알고 있었구나.”
7서클.
하급이면 모르겠지만, 최상급 7서클 마법은 보물 중의 보물이다.
8서클 마법부터는 천외 천(天外天)의 세계이기 때문에, 사실상 최상급 7서클 마법이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법 중에는가장 강력한 수준. 그러한 지식을 클리스만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책에 기록해놓았다. 누가 이 책을 보았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 장난을 친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할 일이 많았다.
이걸 전부 익히려면, 향상된 두뇌 능력으로도 시간이 조금 걸릴 터.
강민혁은 마지막 네 번째 지식을 확인했다.
[정령 마법]
“...정령 마법이라고?”
정령.
예상치도 못한 단어였다.
강민혁의 세상에서 정령은 ‘몬스터’다.
이 세상을 위협하는 몬스터.
그런데 지금 클리스만은, 정령 마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강민혁이 페이지를 넘기자, 정령 마법에 관한 클리스만의 설명이 보였다.
[정령 마법은 원소 마법의 힘을 한 단계 강화시켜주는 매우 강력한 ‘힘’이다. 예로 들자면 포세이돈이라는 마법사가 있다. 그는 수 속성의 서클을 형성해서 물의 마법을 강화시키는 방법을 알아냈고, 정령 계약을 통해서 물의 지배력을 높였다. 주변에 존재하는 물을 다스리고 마법으로 변화시키는 능력. 그것이 바로, 정령 마법인 것이다.]
포세이돈.
그의 비밀은 강민혁이 궁금해하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클리스만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정확히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정령 마법이라.”
아무래도 해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았다.
포세이돈.
정령 마법.
그리고 수 속성 서클.
강민혁은 얼른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았다.
아카데미로 등교한 강민혁은, 곧바로 마법 도서관으로 향했다.
[정령(精靈)]
한권의 책.
강민혁은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령은 미스터리한 존재다. 몬스터가 세상에 나타난 직후, 몇몇 마법사들은 ‘정령계’라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차원의 균열을 통해 드러난 새로운 세상.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접근하지 못하며, 정령은 인간들에게 강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세상에 나타나는 정령의 경우에는 인간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정령의 강력한 권능을 활용할 방법이 있다고 말하며 실제로 결과를 보이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1000년 전의 일. 이 세상에서는 이제 정령이 없다. 어쩌면 그 세상으로 통하는 방법을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으나, 확실한 건 정령은 더 이상 세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정령.
그들은 클리스만의 세상에서 ‘과거의 기억’으로 남았다.
정령은 사라졌다.
강민혁의 세상에서는 몬스터로라도 나타났으나,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는 아예 멸종한 존재가 되었다.
그 말인즉.
‘포세이돈은 이제는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정령과 계약에 성공한 케이스야.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수 속성의 서클을 형성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물의 지배력을 높였는지 알지 못하는 거지.’
포세이돈의 마법을 탐구한 사람들.
그들의 연구가 정령의 영역까지 닿지 못한 이유였다.
이미 멸종되었다고 알려진 정령과 계약했다는 가설은, 멸종 1000년이 지난 지금 말이 되질 않았다.
클리스만의 지식.
그것은 정령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정령 계약.
그들의 차원이 위치하는 좌표와, 어떻게 하면 그들과 계약할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설명을 덧붙였다.
[정령을 활용하는 다양한 방법 중에 포세이돈은 벽파(善波)의 마법을 사용한다. 그에 대해서는 나도 알지 못한다. 정령 마법은 일인전승으로 내려지는 것이고,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정령과 계약하는 방법뿐이지. 하지만 난, 이것만으로도 네가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클리스만이 알려준 것은 정답이 아니다.
그는 강민혁에게 ‘미완성의 가능성’을 말해주었다.
정령과 계약하는 방법을 알았지만, 강민혁으로서는 정령의 힘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몰랐다.
수많은 책을 읽었다.
정령과 포세이돈과 관련된 책을 모조리 읽었으나,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지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들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추측할 뿐, 결국 명확한 대답을 내놓는 사람은 없었다.
강민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문은 책에서만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다.
책에 답이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는 일이다.
강민혁.
그가 한 인물을 찾았다.
그의 방문에, 상대는 상당히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뭐야? 한달 동안 날 아는 체도 하지 않더니, 왜 이제와서 아는 척이야?”
상대는 바로 엘리샤였다.
엘리샤는 강민혁이 찾아오자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지난 한 달.
엘리샤는 강민혁에게 강한 관심을 표출했다. 이성적인 관심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고 있는 강민혁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었다. 그런데 강민혁은 엘리샤의 말에도 전혀 반응해주지 않았다. 그로 인해서, 엘리샤는 강민혁에 대한 호감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까칠한 반응.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예상이 되었다.
그러나, 강민혁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선배, 이번에도 제가 거래를 제안해도 되겠습니까?”
“거래라고?”
“예."
“네가 뭘 제시하든 간에 난 승낙할 생각 없어. 그러니까 당장 꺼......."
“일인전승으로 내려오는 홍염(四葬)의 마법. 일인전승의 규율을 어기고, 그것을 제게 알려주십시오.”
“이 새끼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엘리샤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강민혁은 생각을 전환했다.
엘리샤의 서클 형성 방법으로 수 속성의 서클을 형성한 것처럼, 엘리샤의 지식을 알게 된다면 홍염의 마법은 물론이고 벽파의 마법도 알 수 있다. 홍염과 벽파는 모두 정령 마법으로부터 비롯되는 지식. 그렇기에, 강민혁은 그녀가 승낙할 수밖에 없는 제안을 내걸었다.
“대신, 제가 정령과 계약하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령 계약.
홍염과 벽파는 사정이 다르다.
벽파는 물의 정령을 찾아 계약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홍염은 그 힘의 근원을 잃어버린 상태.
“뭐, 뭐라고?”
엘리샤의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