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23. 홍염의 비기 >
지독한 통증.
바짝 말라버린 입.
아직 시야가 되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강민혁은 고통에 신음했다.
‘설마 또 괴롭힘을 당한 건가?’
그건 아닐 것이다.
제임스 체스터와의 사건은 동급생들에게 강력한 임팩트를 선사했고, 그린 드래곤 상황 이후 클리스만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달라졌다. 검 한 자루로 A급 몬스터를 상대한 클리스만. 당시의 상황이 CCTV 영상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었기에, 동급생들은 눈만 마주쳐도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마침 시야가 회복되었다.
숙소라는 사실을 확인한 강민혁은, 그제야 자신이 왜 고통에 시달렸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이 상처들은?”
당황스러웠다.
클리스만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어디서 생겼는지 모를 상처들이 전신을 뒤덮고 있었고, 그중에는 아직 아물지 않은 큼지막한 상처도 있었다. 붕대를 둘둘 감은 부위는 피로 물들었다. 그곳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이 강민혁의 표정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었는데, 강민혁은 붕대를 살짝 풀어 그 안의 모습을 확인했다.
‘몬스터에게 당한 상처야.’
확실했다.
클리스만은 몬스터에게 당했다.
의료 마법으로 어느 정도는 치료한 것으로 보이나, 그런데도 상처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당시에는 상처가 대단했을 것이다. 살점이 거의 뜯겨나갈 정도가 아니라면, 이 정도의 흔적이 남을 리가 없다.
그리고.
“...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클리스만의 단전.
그 안에는 생각 이상의 마나가 차올라 있었다.
한 달 동안 10의 마나를 축적할 것을 예상했다면, 클리스만의 마나는 무려 30. 클리스만이 마나의 천재라는 전제 조건을 고려한다 할 지라도,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클리스만의 손은 딱딱한 굳은살로 가득했다. 겨우 한 달 만에 이 정도의 수준으로 성장하려면, 강민혁의 추측으로는 ‘수련’을 위해 아주 위험한 일을 경험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결국 해답은 클리스만에게 있다.
시선을 돌리니, 마침 책상 위에 일기장이 보였다.
강민혁은 곧바로 책장을 펼쳤다.
[강해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네가 가르쳐준 수호 심법, 수호 검법. 그것이 나를 살아 숨 쉬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성장 속도로는 만족할 수 없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검사가 성장하기에는 좋은 환경이 아니었고, 그래서 나로서는 선택할 필요성이 있었다.]
‘선택이라니.’
검사로서 빠르게 강해지는 방법.
그건 하나밖에 없다.
바로 전장(戰場).
그곳에서의 실전 경험이야말로, 검사를 발전시키는 좋은 자양분이 된다.
[나는 매일 아카데미 수업이 끝나고 장벽 너머로 이동했다. 그리고 강해지기 위해서 투쟁했다.]
“...장벽 너머라고?”
예상은 옳았다.
클리스만의 선택은 전장이었으나, 그게 장벽 너머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장벽.
몬스터 랜드와 인간들의 세상을 나눈 경계선.
그곳은 영국과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데다, 클리스만의 설명은 ‘장벽 너머’라고 말했다. 섬인 영국에서 매일 장벽 너머로 가는 것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장벽 너머는 인간들의 삶을 허락하지 않는 불모지(不毛地)다. 수많은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그 지옥의 땅을 매일 찾아갔다는 말을, 강민혁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장벽 너머로 이동하는 포탈(portal)이 열릴 것이다. 나를 위해 그곳 너머로 가라고 강요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곳에서의 시간이 나를 강하게 만드는 지름길이고, 혹여 ‘나의 몸’이 죽는다 할지라도 너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육체를 잃은 나의 영혼은 소멸되겠지만, 너는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니까. 그리고 장벽 너머에서 언제고 ‘심연의 악마’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건 너에게도 값진 경험이 될 거라 장담한다. 심연의 악마는, 이 세상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너의 세상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재앙일 테니까. ]
그때였다.
강민혁이 다음 페이지를 넘기려는 순간.
화악-
밝은 불빛이 일어났다.
숙소 안.
놀랍게도 그곳에, 클리스만이 말한 포탈이 생성되었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포탈.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도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만 사용할수 있다는 공간 마법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사용되었다. 그것도 그것을 사용한 마법사는 보이지 않았다. 강민혁의 눈앞에 포탈이 나타났을 뿐이고, 클리스만의 설명대로라면 포탈 너머에는 몬스터 랜드가 펼쳐질 것이다.
‘갈수록 너의 비밀은 그 무게를 더하는구나.’
어떻게.
항상 따라붙는 의문이었다.
마법은 클리스만의 힘이 아닐 테니, 그렇다면 그의 배경이 포탈을 형성했다는 것이 옳은 추측이다.
누구일까.
이런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 세력이.
그들은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도 미지의 영역이라 불리는 마법을 알고 있는 데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도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더욱 미스터리였다. 그런 사람들이 대체 왜, 마법을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을 택한 걸까. 그들에게는,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던 걸까?
고민은 답을 내놓지 못한다.
결국 지금은 선택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강민혁으로서는 클리스만의 메시지가 잊혀지지 않았다.
‘심연의 악마.’
다시 한번 거론되었다.
예전에, 클리스만은 그에 대해 말했었던 적이 있다.
[......예전에만 하더라도 나는 이 세상의 힘은 마법이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칼을 쥐고 몬스터와 싸우던 그 시절, 로브를 펄럭이며 마법을 사용하는 선택받은 자들의 모습은 내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도 새로운 길이 생겼다. 나는 수호문의 심법을 통해 강해질 것이고, 심연(深滿)의 악마들을 모조리 몰살할 것이다.]
클리스만의 일기에 나왔던 내용.
처음에는 심연의 악마라는 것이 그냥 몬스터를 말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도 그들을 모른다는 것을 보면, 단순한 몬스터는 아니라는 것일 터.
퍼즐이 흩뿌려졌다.
퍼즐의 형체가 짐작되질 않았다.
결국.
‘포탈 너머로 가야 하는 건가.’
클리스만과 그의 조력자.
그들에 대한 의문은 많다.
그리고 클리스만이 말하는, 죽음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친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다만.
“이게 네가 원하는 방식이라면, 기꺼이 은혜를 갚겠다.”
아직은 신뢰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강민혁은 클리스만을 위해 검을 들 것이다.
한편에 기대어있는 대검(大劍)을 챙긴 강민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포탈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화악-
밝은 불빛이, 그대로 강민혁을 집어삼켰다.
주변의 풍경이 변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허름한 숙소 안이었다면, 지금은 햇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우거진 숲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신경을 예민하게 자극하는 숲의 어둠. 그리고 코를 간질이는 퀴퀴한 냄새. 미지의 세상으로 알려진 장벽 너머는, 듣던 대로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정말 장벽 너머일까?’
장벽.
인간과 몬스터들의 땅을 나눈 지도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다.
철저하게 격리되었던 이 땅은, 얼마나 많은 몬스터들이 서식하는지 그 숫자가 예상되지 않을 정도.
확실한 건 추정치에 의하면 수억 마리의 몬스터들이 장벽 너머에 존재한다고 했다. 게이트 현상이 발발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몬스터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주기적으로 일제히 장벽을 공격하는 현상을 보였다. 그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2000년 만에 게이트 현상이 나타난 것처럼 차원의 균열로 인한 현상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몬스터들의 개체가 너무나도 많아지는 바람에 범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지의 땅.
강민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강민혁으로서도, 이곳에는 한치의 방심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때였다.
사삭-
‘뭔가 있다.’
수풀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처음에는 작은 소리를 내더니,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수풀이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사사삭-
‘온다.’
꽈악.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분명히 지금 인간의 냄새를 맡았다. 예민하게 돋아오르는 감각. 들썩이던 수풀에서 괴생명체가 튀어나오는 순간, 강민혁이 검에서 오라를 일으켰다.
크아아아악!
‘...아울베어(Owlbear)?!’
A급 몬스터.
매우 희귀한 개체로, 아울베어의 파괴력은 같은 A급 중에서도 상위에 해당하는 괴물 같은 녀석이다.
고로.
카앙-!
주르르르르륵.
“크윽."
아울베어의 앞발 공격에 강민혁이 그대로 뒤로 밀려났다. 그런데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 있던 풀숲도 들썩이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아울베어가 나타나 강민혁을 공격했다.
크아아악!
캉!
강민혁이 아울베어의 앞발 공격을 검으로 쳐냈다. 그리고 곧바로 아울베어의 외피를 베어버렸으나, 오라의 힘으로도 아울베어의 외피를 깊게 베어내지는 못했다. 살짝 베이며 피가 배어 나오는 정도? 강민혁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지는 순간, 아울베어가 동시에 강민혁을 덮쳤다.
카앙!
카카카캉!
속이 진동했다.
아울베어의 공격에 강민혁은 정신없이 뒤로 밀려났다. 올빼미의 얼굴을 한 아울베어의 아가리가 기괴하게 쩍 벌어졌고, 머리가 이리저리 회전하며 강민혁을 물어뜯으려고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장면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딱딱거리는 주둥이가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강민혁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아울베어의 공격을 전부 쳐냈다.
그리고.
화르르르륵.
콰앙!
크아아악!
순간적으로 일으킨 오라로 아울베어를 뒤로 밀어냈다.
단단한 아울베어의 외피조차도 쩍 갈라지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 순간, 강민혁의 검이 번뜩였다.
‘섬멸(織減).’
수호문의 비기.
오라의 힘을 강화시켜서 적을 단번에 베어버리는 일격필살의 기술. 현실에서의 강민혁으로서는 사용할 수 없었던 기술이 발현되며, 활활 타오르는 오라가 아울베어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러자 아울베어의 목이 갈라지더니, 얼굴이 바닥에 떨어지며 붉은 피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촤아아아아악!
피의 비.
그 안에서 또 다른 아울베어가 달려들었다.
그리고 치열한 접전 끝에, 강민혁은 마지막 아울베어의 목마저 베어버렸다.
서걱!
툭.
데구르르르.
목이 떨어져 나가는 아울베어.
A급 몬스터를 동시에 2마리나 처리한 상황에, 강민혁의 얼굴이 묘한 감정으로 얼룩졌다.
“...이게 뭐지?”
클리스만.
그의 몸은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그게 클리스만이 목숨을 걸고 수련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방금의 감각은 상당히 낯설었다.
아울베어.
그들을 처리하는 순간 분명히.
‘미세하지만 내 마나가 회복되었어. 정확히는, 마나의 절대량이 늘어났어.’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클리스만이 말했던 강해진다는 의미는, 단순히 전장에서의 경험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단어 그대로의 성장.
마치 게임의 퀘스트를 통해서 경험치를 얻는 것처럼, 몬스터를 처리하면 실질적인 보상을 얻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불쑥 떠오른 의문.
하지만 의문을 해소할 충분한 시간은 없었다.
이곳은 몬스터들의 땅.
크르륵.
크르르륵.
‘일단은 살아남는 것에 집중하자.’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소리에, 강민혁은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