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22. 수호문, 그리고 영국 마법 협회(6) >
속성 서클.
그에 관해서는 이전에도 도전한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웨인 라피에르처럼, 마나에서 실제로 ‘속성’을 분리시킨 성공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분리된 마나. 그것을 토대로 물의 서클을 만들어야 해.’
강민혁이 연구 자료를 펼쳤다.
웨인 라피에르가 강민혁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주었고, 강민혁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물의 속성을 분리시키는 방법은 매우 위험하다. 만약 그 체계를 잘못 따라갈 경우 마나의 붕괴로 서클이 파괴되거나, 최악의 상황으로는 몸 안의 수분이 전부 증발해버린다. 고로 실험을 위해서는 충분한 시뮬레이션 훈련이 필요하며, 평소 물과 친근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속성 분리에 많은 도움이 된다.]
속성 분리의 위험성.
이러한 사실을 알아내는 데, 웨인 라피에르는 많은 연구자들을 잃었을 것이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마법사들.
보통 그들이 마법의 발전을 위해서 숭고한 희생을 택한다. 연구 자료에서 나오는 서클이 붕괴되고 수분이 증발되는 부작용은, 그들의 몸에서 직접 일어난 현상이라는 뜻이다. 확실히 힘의 근간은 화염의 서클과 다르지 않았다. 그 또한, 부작용으로 내부가 불타오르는 현상이 있었다.
곧바로 실험에 들어갔다.
강민혁은 자신의 생각을 시뮬레이션 훈련을 통해 구현시켰다.
‘일단은 속성 분리.’
그것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웨인 라피에르는 정말 안전한 방법을 찾았고, 문제는 지금부터 그 마나를 활용하는 방법에 있었다.
엘리샤는 말했었다.
“화염의 마나를 서클로 인도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작업이야. 화염의 마나를 하나의 생명처럼 대해야 하고, 아기처럼 어르고 달래야 말을 들어주거든. 그렇다고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어. 기존에 형성되어 있는 서클과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그건 아주 끔찍한 재앙을 의미하지.”
속성 분리.
그리고 서클로의 인도.
인도 과정은 다행히도 화염 속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민혁은 그것에 대한 입력값을 설정하였고, 실험 모니터에서 마나가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라락.
머릿속의 책장이 넘겨졌다.
마법 도서관에서 보았던 책 중 ‘인물 탐구:포세이돈’이라는 책을 펼쳤다.
엘리샤를 알게 된 이후, 강민혁은 속성 분리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에 대해서 알아보았었다.
[포세이돈이 어떻게 물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는 걸까? 그 기반은 속성 분리에 있다. 물의 속성만으로 서클을 형성하고, 포세이돈은
그것을 바탕으로 강력한 물의 지배력을 보인다. 속성 분리는 매우 위험한 방법인데...이러한 시도들을 해보았지만, 결국 성공할 수
없었다.]
책의 저자.
그는 속성 분리에 실패했다.
웨인 라피에르는 그만큼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 2000년의 마법 문명이 형성된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속성 분리는 매우 조심스럽게 대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었다. 당연히 성공한 사람이 생겨서 엘리샤와 포세이돈 같은 사람이 탄생했지만, 그것은 대중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만큼 희귀하고, 성공하기 힘든 마법이라는 것이다.
실패의 경험.
그건 강민혁에게 좋은 거름이 되었다.
강민혁은 비슷한 성공 사례를 알기에, 그때 저자가 말했던 실패 경험을 참고해 실험을 진행했다.
삑-
[실패했습니다.]
삑-
[실패했습니다.]
반복되는 실패.
시뮬레이션 상으로 가상의 서클은 계속해서 붕괴되었다. 그러나 강민혁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첫술에 배부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비슷한 성공 사례와 웨인 라피에르가 말해준 속성 분리 방법. 아무리 많은 성공 조건을 가지고 진행하는 실험이라지만, 둘의 결합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각 속성은 그 속성만의 고유 체계를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클리스만의 세상에 서도 두 가지의 속성 분리를 성공시킨 마법사는 없었다.
강민혁은 실험에 무섭게 빠져들었다.
머릿속이 활짝 열리며, 시련의 탑에서 강화되었던 두뇌 능력이 ‘물의 서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
강민혁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 수도 없이 실험을 반복했다.
그리고 존 웨슬리와 웨인 라피에르는,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웨인 라피에르가 말했다.
“...정말 대단하네요. 강민혁님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 정도로 빠르게 정답을 찾아가다니. 정녕 같은 인간인지 의심이 될 정도네요.”
일련의 상황.
연구가 진행되는 과정에, 웨인 라피에르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바로 옆.
존 웨슬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지금 잘 하고 있는 겁니까? 제 눈에는 실패만 반복하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실패가 반복되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시뮬레이션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완벽한 하나의 답을 찾아내기까지, 수천, 수만 번의 실패를 반복해야 하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실패 과정에서 어떤 결과를 얻느냐입니다. 보통은 수천 번 이상의 실험을 해야 성공률이 1% 정도 오르는데, 강민혁님의 실험 결과를 보십시오. 처음에는 속성 분리를 성공하고 마나가 폭주하는 바람에 성공률이 62%로 끝났습니다. 그것은 저희가 개발해낸 연구의 한계였고, 지난 1년간 62%에서 조금도 진척되지 못했습니다.”
62%.
영국 마법 협회의 연구자들은 그 수치를 마(魔)의 벽이라 불렀다.
그 벽을 조금만 넘으면 인도의 과정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매번 똑같은 단계에서 실패했다.
연구가 슬럼프에 빠졌다.
운디네를 연구해서 속성 분리를 성공시킨 것은 정말 대단한 업적이었지만, 원래 연구는 99%를 완성해도 나머지 1%를 완성하는 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것이다. 답보 상태에 웨인 라피에르는 상당한 답답함을 느꼈고, 그래서 강민혁에게 연구를 공개하는 것을 허락했다.
강민혁.
그라면 괜찮았다.
아무리 외부인이라지만, 그가 세상에 밝힌 지식의 값어치는 상당하지 않은가.
그와 같은 사람과 지식을 공유하고 발전하는 것은, 오히려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듣고 보니 정말 대단하네요.”
모니터.
그곳에는 강민혁의 실험 성공률이 나왔다.
존 웨슬리 또한 마법 지식의 수준이 대단하지만, 그는 실험실의 체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편이다. 그래서 모니터에서 올라가는 수치가 의미하는 바를 몰랐었다. 그런데 웨인 라피에르의 설명을 듣고 나니, 그 수치가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를 알 수 있었다.
삑-
[실패하셨습니다.]
[성공률 63%]
삑-
[실패하셨습니다.]
[성공률 64%]
성공률이 빠르게 올랐다.
실패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강민혁은 반드시 유의미한 결과를 얻었다.
웨인 라피에르가 넋을 잃었다.
마치 환상적인 마법 쇼라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그는 눈앞의 기적에 빠져들었다.
“이제야 강민혁님이 어떻게 그 대단한 연구들을 성공시켰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는 그냥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종류의 천재였던 겁니다. 영국 마법 협회의 엘리트들이 전부 달라붙어도 62%에서 조금도 연구를 진척시키지 못했는데, 설명을 조금 듣고 실험에 들어간 강민혁님은 벌써 우리보다 많은 성과를 이루어내지 않았습니까? 존 웨슬리 대마법사님.”
“말씀하시죠.”
"솔직히 말해서, 전 제가 세계에서 제일의 연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단언컨대 이 세상에서, 강민혁님보다 뛰어난 연구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물론이거니와, 제가 겪었던 모든 연구자들은 강민혁님과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가능성의 씨앗.
그것이 웨인 라피에르의 마음에 심어졌다.
언제 씨앗이 발아(發芽)할지 모르나, 그는 이제 강민혁이라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실험은 계속되었다.
존 웨슬리와 웨인 라피에르는 강민혁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되었지만, 오로지 실험에만 몰두하는 강민혁의 모습에 감히 말을 걸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해가 저물었고, 해가 떴다.
그리고 다시 해가 저물고, 다시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때.
탁.
“...끝났습니다.”
강민혁은 길고 길었던 실험의 종지부를 찍었다.
실험 모니터.
그곳에는, 삼일의 결과가 떠올라 있었다.
[성공률 98%]
대단한 결과다.
완벽한 성공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웨인 라피에르는 잔뜩 흥분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대체 어떻게 마나의 인도에 성공하신 겁니까? 저희가 수도 없이 반복했던 실험에서는, 속성 분리에 성공한 마나가 서클의 마나와 부딪쳐서 폭주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겨우 이틀 만에 안전한 인도 방법을 찾아내시다니. 그 비결을 알고 싶습니다.”
비결이란 건 없다.
강민혁은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반복했고, 결과가 나왔을 뿐이다.
강민혁이 말했다.
“웨인 라피에르님이 가장 중요한 속성 분리를 성공하신 덕분입니다. 제일 위험한 과정이 해결되었고, 그래서 자료를 토대로 실험을 반복하니 정답을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아무런 기반이 없이 실험을 진행했더라면, 결코 짧은 시간에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을 겁니다.”
“아닙니다. 그래도 강민혁님은 성공하셨을 겁니다.”
웨인 라피에르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은근히 상대를 띄워주는 강민혁의 화법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98%의 성공률이 눈이 확 박혔다.
성공률 100%.
완벽한 결과가 나와야만, 본격적으로 임상실험을 진행할 수 있다.
시뮬레이션은 결과를 예상하는 과정일 뿐이지, 실제로는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래도 대단한 결과임에는 확실했다.
속성 분리 임상실험을 성공하고서는 조금의 진척도 없었는데, 드디어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제 한계는 여기까지입니다. 서클에 문제가 생겨서 마지막 2%는 충족시키지 못했지만, 그건 웨인 라피에르님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해결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2%.
사실, 강민혁은 실험에 성공했다.
그런데도 실험에 적용시키지 않은 이유는, 그 2%라는 변수가 일어나는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마나로 형성한 서클. 그걸로는 결국 2%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강화 문명.
이 세상은 강화액이라는 특수한 방법으로 빠르게 강해진다. 마법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마나를 몸에 주입하고, 그것으로 인위적으로 서클을 형성한다. 강민혁과 같이 자연의 마나로 직접 형성한 것과는 달리 단단하지 못한 서클은, 물의 서클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2%의 변수를 일으킨다. 고로 이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라면, 서클 강화에 대해서도 말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딱 여기서 멈추는 것만으로도, 저들은 충분히 감사함을 느끼고 많은 대가를 받을 것일 테니 말이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존 웨슬리.
그가 고개를 숙였다.
특별한 대가를 제시한 것도 아닌데, 연구를 도와준 강민혁의 모습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이번 연구.
강민혁은 ‘정답’을 이 세상에 공개한 것이 아니다.
웨인 라피에르의 마나 분리 방법과 엘리샤의 화염 속성 서클 형성 방법. 좋은 정보들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 정보를 조합해서 정답을 만들어내는 것은 강민혁의 능력이었다. 클리스만에게 지식을 전달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월하심법.
등급 외 마법.
그것들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진짜 마법사로서 무엇인가를 이루어냈다는 생각에, 강민혁은 쾌감이 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양쪽 세계의 지식을 알고 있다면, 그 지식을 토대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어. 수호 심법을 토대로 월하 심법과 등급 외 마법을 만들어내고, 웨인 라피에르의 마나 분리와 엘리샤의 화염 서클 생성법으로 물의 서클의 형성 방법을 알아낸 것처럼 말이야.’
마법사.
진정으로 마법사가 된 기분이었다.
영국행은 옳은 선택이었다.
자신의 권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웨인 라피에르에게 가능성의 씨앗을 뿌렸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을 모두 떠나서, 연구를 스스로 성공했다는 사실이 가장 크게 다가왔다.
‘지금부터는 가능성을 열어두자. 있는 지식을 수동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내가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자세도 필요해.’
몸이 달아올랐다.
얼른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날 저녁.
한국에 도착한 강민혁은, 물의 서클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연구실 밖을 빠져나오지 않았던 그는, 며칠 뒤 클리스만과 약속한 날을 맞이했다.
빙의.
이제는 클리스만으로서 눈을 뜰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