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20. 정판수와 정판호(4) >
그날의 사건은 재앙이었다.
에픽급 몬스터 뱀파이어 로드(Vampire Lord).
거대한 피막의 날개를 펄럭이는 그 괴물은, 강화 전사를 처리할 때마다 상대의 피를 흡수해서 강해졌다.
그때.
그들을 막아섰던 사람들이 바로 수호문이었다.
쾅!
콰르르르르릉.
“빌어먹을!”
“너무 강해!”
뱀파이의 로드가 발현한 피의 폭풍에, 수호문의 제자들이 일제히 휩쓸렸다.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노련한 강화 전사들도 이번만큼은 절망적인 기색을 보였다. 대체 저 괴물을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뱀파이어 로드가 소환된 곳은 수호문 인근.
그에게 패배한다는 것은, 수호문과 그 식솔들이 뱀파이어 로드에게 몰살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덕철.
당시 그는 젊은 문주였고, 그의 곁에는 과거 수호문의 영광을 이루었던 정판호와 같은 신성들이 있었다. 결국 그들이 나서야만 했다. 일반 제자들에게 뱀파이어 로드의 발을 묶으라는 것은 자살하라는 것과 같기에, 강덕철은 뒤로 숨는 것이 아니라 검을 쥐고 앞으로 나섰다.
“앞으로 10분. 딱 10분만 버티자. 그 안에는 지원 병력이 도착한다.”
“씨발, 오늘이 내 제삿날이구나.”
정판호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정판호는 희생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검 밖에 없었고, 강덕철이라는 사람이 좋았기에 그냥 따랐을 뿐이다. 그리고 동생인 정판수의 영향도 있었다. 상당히 불만이 가득한 정판호의 모습에, 정판수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뒈져도 형이 뒈지진 않을 거야. 형수가 곧 애를 낳을 텐데, 형이 죽으면 내가 어떻게 그 얼굴을 봐?”
그리고 전투가 벌어졌다.
치열한 혈전이었다.
수호문의 제자들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갔고, 강덕철을 비롯한 수호문의 핵심 자원들은 목숨을 던졌다.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죽음의 대상이 정판수가 되었을 때, 정판호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아아.”
바닥에 쓰러지는 정판수.
그가 숨을 헐떡였다.
그 구도.
그 모습.
그때의 기억이 정판호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았다.
뒤늦게 도착한 다른 세력들의 도움으로 결국 뱀파이어 로드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정판수를 살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수호문에서 남자다운 것으로 유명했던 정판호가, 그날은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어댔다. 강덕철에게 정판수를 살려달라고 떼를 쓰기도 하고, 주변의 사물을 모두 부수면서 정판수를 돌려놓으라고 하늘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나 죽음은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동생은 죽었다.
그것도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겠다고, 나름 한발 앞서서 싸운 것이 그의 사인(死因)이었다.
“미안하다, 판수야. 내가 더 앞에서 싸웠더라면, 내가 저 빌어먹을 괴물보다 강했더라면 네가 죽는 일은 없었을 텐데. 정말 미안하다. 정말, 정말 미안하다.”
오열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그때부터 한동안 폐인처럼 지냈다.
그런 그를 다시 ‘사람’으로서 살게 해준 것은, 시끄럽게도 울어대는 작은 생명체의 탄생 때문이었다.
“당신 아들이에요.”
지금은 떠나간 아내.
그녀가 힘겹게 아이를 건넸다.
어릴 때부터 우량아로 태어났던 아들은,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목청이 찢어져라 울어대고 있었다.
그 순간.
정판호는 삶의 이유가 생겼다.
“판수, 네 이름은 지금부터 정판수다.”
하나뿐인 아들.
정판수는 그렇게 자라났다.
가만히 얘기를 들어주었다.
이제야 정판호 부자에 관련된 의문이 풀렸다.
‘그래서 같은 항렬(行列)이 아닌데도 같은 돌림자를 썼던 거구나.’
정판호.
정판수.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왜 형제의 이름을 쓰느냐고 물었다.
수호문 내부에서 아는 사람들은 아는 얘기였지만, 모르는 이들이 물을 때면 정판호는 아픈 기억을 말하는 대신 아들을 정말 사랑해서 그러는 거라는 두리뭉실한 대답으로 상황을 넘겼다.
정판수는 그렇게 컸다.
정판호는 아들에게서 동생을 투영했고, 아들이 엇나가는 모습을 알면서도 질책할 수가 없었다.
다만, 동료를 버리는 행위는 용납하지 못했다.
아무리 현실적인 판단으로 버린 것이라 할지라도, 그 버려진 사람에게는 가족이 있을 테니까.
정판호가 말했다.
"내게는 판수가 삶의 희망이었다. 그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진즉에 죽어버렸겠지. 하지만 난 내 아픔을 그리 티 내고 싶지 않았다. 현재 수호문을 이루고 있는 세대는 모두 각자만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나도 그렇고, 문주님도 똑같지. 아니, 몬스터로 인해 지옥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참, 빌어먹을 세상이거든.”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런데 아들이 똑같은 일을 겪고 나자, 오늘만큼은 수호문의 호랑이가 감성에 젖어 들고 말았다.
“아버지를 너무 원망하지 마라.”
".........."
“네 아버지 또한 나와 같은 아픔을 겪으신 분이다. 누군가를 잃었고, 그렇기 때문에 삶의 가치를 힘에 두었던 거지. 그게 네게는 너무나도 가혹한 시련이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이 세상에서 힘이 없다면 그보다 더한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다.”
안다.
너무나도 잘 안다.
그래서 아버지와 선을 그었음에도, 수호문과의 관계를 끊어내지는 못했다.
수호문.
자신에게는 가혹했고, 너무나도 힘든 어린 시절로 기억되는 곳. 하지만 수호문이라는 이름이 대한민국에서는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영웅들. 길거리에 나가면 일반인들이 수호문의 제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고, 어떤 이들은 고마운 마음에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가지고 있는 전부를 내주었다. 수호문과 같이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서 고생하는 사람들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강덕철이 추구하는 힘.
그건 개인의 안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강덕철은 힘을 가졌고, 그 힘으로 수호문과 주변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졌다.
수호(守護)라는 단어의 의미에 걸맞게, 강덕철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우직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그런 걸 알더라도, 강덕철은 너무도 잔인한 아버지였다.
딱딱하게 굳은 강민혁의 표정을 보았던 걸까.
정판호가 어색하게 웃었다.
“푸후, 내가 너무 심각한 얘기만 했지? 그런데 마법은 대체 언제부터 익힌 거지? 겨우 몇 개월 만에 이룰 수 있는 정도의 성취가 아니던데.”
애써 화제를 돌렸다.
강민혁도 표정을 풀고 답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고?”
정판호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강민혁의 모습은, 운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이 세상에서 마법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A급 몬스터를 쓰러트릴 수 없다는 약점은, 백 년의 세월 동안 마법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지. 그런데 넌 A급 몬스터인 데스 나이트를 ‘마법’으로 쓰러트렸다. 그뿐만이 아니야. 마법으로 판수의 몸을 치료시키기도 했지. 난 살면서 네가 사용한 마법을 그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 말은 네가 이루어낸 그 모든 것들이 너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그건 결코 단순한 성취를 의미하지 않는다.”
확고한 음성.
강화 전사만이 절대 갑(甲)이라 생각하는 정판호조차도, 지금은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었다.
“너로 인해 새로운 마법 문명이 창조되고 있다. 넌 그냥 마법사가 아니라, 마법의 선구자인 거지.”
마법사.
정판호는 그간 그들을 비주류라 말하며 무시했었다.
참 멍청한 이들이라 생각했다.
힘이 간절한 이 세상에서, A급 몬스터도 쓰러트리지 못하는 학문에 목을 매는 것은 멍청해 보였다.
만약 그들이 자신과 같은 일을 겪는다면.
그따위 마법으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겁에 질려 벌벌 떠는 마법사들을 수도 없이 보았던 정판호기에, 마법사를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강민혁을 보고, 그는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였다.
“지금처럼만 나아가라. 그렇다면 세상도 마법을, 아니 너라는 ‘마법사’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날의 대화.
그건, 서로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정판수는 좀처럼 일어나질 못했다.
하루 정도 쉬었을 때.
후발대를 맞이한 것은 희망찬 하루가 아니라, 붉은 안광을 토해내는 데스 나이트 무리였다.
“적이 나타났다!”
“전투 준비!”
생존.
그것을 위한 사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처음과는 조금 달랐다.
처음에는 단순히 백병전(白兵戰)으로 부딪쳤다면, 지금은 강민혁을 지키는 포메이션을 구성했다.
“민혁이가 마법에 집중할 수 있도록 최대한 보호한다. 명심해라. 우리의 목적은 무리하게 적을 쓰러트리는 것이 아니다. 자리를 지키고,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두어라.”
본대와의 합류는 포기했다.
지금의 전력으로 전진은 무모한 선택.
결국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본대가, 지금의 상황을 해결해주기를 말이다.
[...죽인다!]
[...하찮은 인간 녀석들!]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정판호가 있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초월급 데스 나이트와의 전투.
그 여파는 하루 만에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몸이 무거웠다.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정판호는 이를 악물며 데스 나이트의 목을 베었다.
“죽어, 이 개새끼들아!”
서걱!
아들이 태어났을 때.
정판호는 다짐했다.
절대 몬스터에게 굴복하지 않겠다고.
반드시 강해져서, 동생의 몫까지 아들과 무병장수(無病長壽)하겠노라고 말이다.
“폭발.”
쾅!
콰콰쾅!
뒤에서 마법이 사용되었다.
강민혁의 마법에 휩쓸려가는 데스 나이트의 모습을 보자, 괜히 히죽 웃음이 나왔다.
‘강민혁.’
그 이름.
그게 왜 이렇게 든든한지 모르겠다.
아들은 아비를 닮는다고 했던가.
정판수가 가려진다는 이유로 강민혁을 외면했던 것은, 그 또한 옹졸한 마음가짐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강민혁은 정판수를 외면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간 어른답지 못한 행동을 했다고는 하나, 소중한 것을 지켜준 강민혁에 대한 마음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을 무조건 살려보내주마.’
타닥.
땅을 박찼다.
[...죽어라!]
[...인간!]
수많은 데스 나이트.
그들을 모조리 죽이리라.
검에서 활활 타오르는 오라가 그들과 맞부딪치려는 순간,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어?”
“이, 이게 무슨.”
파사사사삭.
여기저기서 당황한 음성이 들렸다.
데스 나이트가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먼지처럼 변하며 흩어지는 그들의 모습에, 방금까지만 해도 악에 받쳤던 정판호의 몸에 긴장이 풀렸다.
언데드.
그들의 소멸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결국 성공했구나.”
공간 분리를 당하지 않은 선발대.
그들이, 다크 리치를 쓰러트림으로써 S급 던전 암흑 도시의 클리어를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이번 토벌.
K 방송사에서 실시간 방송을 맡으면서, 토벌의 과정은 사람들에게 모두 공개되었다.
다크 리치를 쓰러트린 이후.
밖으로 나온 리포터는,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수호문이 토벌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만, 문주인 강덕철과 그의 후계자 이준호의 활약으로 던전의 악마를 결국 쓰러트렸습니다. 포천 시민 여러분은 이제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여러분들을 괴롭히던 던전의 악마는,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방송은 대박이었다.
수호문의 토벌 영상.
수호문의 활약은 대단했고, 그로 인해서 실시간 시청률이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상승했다.
‘이번 방송으로 이준호는 확실하게 수호문에서의 입지를 다지겠지. 그의 무력은, 정말로 대단했어.’
생각만으로도 몸이 떨렸다.
다만, 아쉬운 게 있었다.
후발대가 공간 분리를 당하면서, 방송의 송출에 문제가 생겨 후발대의 영상을 내보내지 못했다.
후발대는 살았다고 한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방송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녀로서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온 후발대의 카메라맨을 만나자마자,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 대박이에요!”
“뭐가 대박이야? 알아듣게 설명해.”
“후발대에 마법의 신이 있었어요. 강민혁, 그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라 마법의 신(神)이었다고요!”
"...?!"
급박했던 상황.
알렉스를 부축하는 와중에도, 카메라맨은 프로 정신을 발휘했다.
전부를 찍어내진 못했다.
그런데 그의 카메라에 담긴 몇몇 장면만 하더라도, 세상을 발칵 뒤집어엎기에는 매우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