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20. 정판수와 정판호(3) >
강화 문명에서 처음 마법이 개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게임 판타지 소설처럼 마법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크나큰 착각이었다. 마법은 생각보다 더 어려운 지식을 요구했고, 그중에서도 ‘육체의 회복’은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마나로 육체를 회복하는 행위.
말로는 간단해 보이는 일이지만, 그걸 어떻게 구현하느냐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마법 문명은 회복 마법 개발에 성공했고, 나아가 의료 마법이라는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냈어.’
의료 마법.
머릿속의 기억이 선명하게 살아났다.
[...회복 마법의 초창기 모델인 힐(heal)은 상당히 문제점이 많은 마법이었다. 낮은 서클로도 상처 부위를 회복할 수 있는 대신에, 부상자 체내에 있는 마나로 회복하는 과정에서 생명력(生命刀)도 같이 소모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래서 마법의 힘으로 육체를 회복한 사람의 경우에는 수명이 대폭 하락했다. 수명을 대가로 현재의 육체를 회복하는 행위. 그것이 의료 마법의 시작이었다.]
마법은 발전했다.
초창기만 해도 힐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마법이었으나, 마법 문명의 마법사들은 항상 정답을 찾아냈다.
[최종 형태의 ‘힐’은 4서클 이상 마법사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간단한 기술이 아니라, 상당한 컨트롤과 마나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가 필요한 영역. 의료 마법의 탄생은 인간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했다.]
정말 다행히도 강민혁은 의료 마법의 조건에 부합했다.
힐.
강민혁은 심법을 활용해서 자연의 마나를 끌어 올리더니, 정판수의 상처 부위에 마나를 스며들게 했다. 여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오로지 ‘자연의 마나’로만 회복하는 것이다. 초창기 모델은 매우 간단하게 재생력을 끌어올릴 수 있으나, 생명력을 깎고 회복 효과는 대단하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그에 반해 강민혁이 사용하는 회복 마법은 리스크가 없고, 그 효과도 크다.
물론 간단하게 사용하는 회복 마법도 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중상자를 치료할 때는, 고난이도의 회복 마법이 필요하다.
‘리커버리(recovery)를 사용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건 6서클의 영역.
아쉬운 대로, 강민혁은 아주 조심스럽게 마나를 움직였다.
‘의료 마법의 탄생은 현대 의학과 접목하면서부터 시작되었어. 새로운 체계로 회복 마법의 리스크를 떨어트리고, 현대 의학으로 최대한 효율적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의료 마법인 거지.’
화아악-
손에서 초록빛이 일었다.
자연의 마나가 움직일 때마다 빠르게 출혈 부위가 지혈되었고, 당장에 조치가 필요한 부위는 자연의 마나를 강하게 부여해서 생명력을 일으켰다. 필요한 만큼의 생명력을 사용하는 것. 그게 바로 의료 마법의 핵심이다. 무분별한 생명력 남발은 수명을 깎아내리지만, 적당한 양은 자연스럽게 회복할 수 있다. 강민혁은 아주 조심스럽게, 머릿속의 기억을 토대로 회복을 진행했다.
“후우.”
이마에 땀이 맺혔다.
사실 강민혁은 이미 몸 상태가 한계에 달했다.
머리는 현기증으로 어지러웠고, 바짝 마른 입은 마실 것을 간절하게 바랐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던 정판호의 눈빛을 생각하니, 강민혁은 희망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계속되는 치료.
그것은 기적이었다.
회복 마법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강민혁의 행위는 그야말로 기적처럼 보였다.
‘넌 대체...
정판호.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법으로 몸을 회복시킨다?
그런 마법이 있다는 사실은 살면서 들어본 적이 없다.
강화 전사들이 단전의 마나를 소모해서 외상과 내상을 치료하는 경우는 많지만, 마법사들의 마법은 대부분 공격을 위해 사용되었다. 회복 마법은 미지의 영역. 그런데 그것이 강민혁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정판수의 몸은 분명히 회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는데, 점차 얼굴색을 찾아가는 모습에서 희망이 보였다.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배운 걸까? 아니야, 그건 불가능해. 애초에 회복 마법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문득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강민혁.
그가 마법 학술 대회에 나가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는 이야기.
남들은 상상만 하던 미지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말에, 정판호는 당시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 봤자 마법이잖아.”
그때 했던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리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는, 강민혁의 모습이 마치 거인처럼 보였다.
‘만약 회복 마법을 네가 직접 개발한 것이라면..........'
마법사.
그들의 영역이 확장된다.
원거리 지원도 가능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부상도 치료할 수 있다.
혁명이다.
마법사의 개념이 새로 잡힐 것이다.
‘넌 지금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고 있는 거야. 기존의 체계를 완전히 바꿀, 전혀 다른 마법 문명을.’
17년.
강민혁을 지켜본 세월이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도 강민혁의 진면목을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 정판호였다.
치료가 끝났다.
무려 1시간 동안이나 집중한 탓에 완전히 녹초가 되었지만, 강민혁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정판호.
그가,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급한 부위는 해결했어요. 문제는 상처가 너무 심해서 한 번에 전부 치료할 수는 없고, 판수의 생명력을 고려해서 여러 번 나눠서 회복을 진행시켜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현재 판수의 몸 상태로는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해요. 다른 제자들도 피로도가 한계에 달했으니, 일단 여기서 진지를 구축하고 휴식을 취하는 게 어때요?”
“그렇게 하지.”
덥석.
정판호가 강민혁의 손을 잡았다.
강민혁을 그리도 배척하던 그가, 지금은 강민혁을 생명의 은인으로 대했다.
“정말 고맙다. 내가 너에게 그리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잘 안다. 그간의 일은 진심으로 사죄하마. 나 정판호는, 앞으로 너에게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 평생을 노력할 것이다.”
“아니에요.”
사람의 관계란 참으로 묘하다.
평소에는 앙숙처럼 생각하던 둘의 관계가, 단 하나의 사건으로 악감정이 녹아내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진지 구축은 내가 맡겠다. 쉬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정판호가 자리를 떠났다.
이곳은 던전이다.
언제 또 다른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감정에 취해 있을 여유는 없었다. 다시 호랑이 정판호로 돌아온 그는 빠르게 바리게이트를 설치하였다. 그 또한 힘든 사정은 다르지 않을 텐데, 정판호는 위기의 상황에서 리더가 취해야 하는 태도를 정확하게 알았다. 피곤하더라도 내색하지 않고, 끝까지 의연하고 굳건해야만 밑에 있는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다.
강민혁은 쉬지 못했다.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으나, 아직 치료해야 할 제자들이 제법 있었다.
그만큼 어려운 싸움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정판수 만큼의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서, 간단한 방법으로도 치료할 수 있었다.
“힐."
화아악.
초록빛으로 일어나는 마나.
2서클 마법사도 사용할 수 있는 힐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이었다. 효과는 극적이지 않으나, 그래도 즉발 형태로 간단하게 회복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게 부상자들을 모두 챙기고서야 강민혁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텅텅 비어버린 서클에, 벽에 기대앉은 강민혁은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정신없는 하루네.’
많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힘도 얻었다.
초월 각인.
마법 문명에서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기술을, 클리스만은 개발하는 것에 성공했다.
대단한 사람이다.
그가 어떤 비밀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클리스만은 마법 문명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었다.
‘초월 각인을 자주 사용할 수는 없겠어. 리스크가 너무 커.’
3서클을 뛰어넘는 힘.
그 대가는 컸다.
마나 소모량이 지나칠 정도로 많았고, 정신력도 한계에 도달했다. 초월 각인을 사용한 이후부터는 사실상 강민혁은 탈진 상태에서 정신력만으로 버텼다. 그리고 7서클 마법의 위력도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 A급 데스 나이트를 처리할 정도의 위력임은 분명했으나, 클리스만의 세상에서 직접 7서클 마법을 목격한 강민혁으로서는 위력이 조금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 서클의 한계 때문인 거겠지.’
각인을 통해 초월한 힘을 사용할 수 있었으나, 4개의 서클로 뿜어낼 수 있는 출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초월 각인에 내장된 마법은 최상급일 터. 난 그 일부의 힘만을 사용한 거야.’
그래도 좋은 무기를 얻은 것임에는 분명하다.
초월 각인을 확인해본 결과 쿨타임이 무려 한 달에 달했지만, 7서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쿨타임의 경우에는, 서클이 상승할수록 줄어들 것이다.
눈이 감겼다.
아직 생각을 정리할 게 많았지만, 눈꺼풀이 감기는 것을 도무지 막을 수 없었다.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일까.
강민혁의 눈이 그대로 감겼다.
정말,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잠을 오래 자지는 못했다.
주변에 도사라는 위험.
그건 잠을 자는 도중에도 강민혁의 신경을 예민하게 건드렸다.
그래도 몇 시간 잤기 때문일까.
나름 상태가 괜찮아진 강민혁은, 바리게이트 뒤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정판호에게 다가갔다.
“아직도 경계를 서고 계십니까?”
잠들기 직전.
정판호는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경계를 서고 있는 것을 보면, 그동안 정판호는 조금도 쉬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애들이 많이 힘들어하니까.”
짧은 대답.
그러나 그의 마음이 보였다.
정판호는 호랑이였다.
본인이 힘들어도, 크게 내색하지 않고 피곤함과 싸우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경계를 맡기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다. 혹시라도 초월급 데스 나이트가 부활해서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그는 제자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혼자 경계를 맡았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A급 이상의 몬스터들은 부활하지 않는 것을 보면.”
“불행 중 다행이지.”
후발대로서는 희소식이었다 .
가장 불안했던 부분이 몬스터의 부활이었다.
처음에 그로 인해서 상당히 애를 먹었기에, A급 몬스터가 부활했다면 사실상 후발대는 그대로 전멸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크 리치의 권능에도 한계가 있었고, 그로서도 A급 몬스터를 부활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덕분에 후발대는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 근방에 있는 몬스터들은 모두 처리해버린 상태이니 말이다.
강민혁이 정판호의 옆에 앉았다.
가만히 어둠으로 내려앉은 공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정판호가 말했다.
“판수는 내 아들이지만 참 모자란 녀석이야. 질투심이 많아서, 친구라 할지라도 자기보다 뛰어난 녀석이 있으면 참질 못하지. 그래서 널 싫어했을 거다. 그리고 그런 판수를 위해서라도, 나는 널 싫어할 수밖에 없었고. 너라는 사람은 인정하지만, 난 내 아들이 더 중요했다.”
".........."
몰랐던 사실이다.
정판호가 강민혁을 배척했던 이유.
그 시작은 정판수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들을 키우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정판호에게 정판수는 너무나도 소중했다.
“나는 강해지기 위해서 한평생을 수호문에 바쳤다. 내 아내는 그런 내가 괴물 같다면서 10년 전에 집을 나가버렸지. 이해해. 나는 남편으로서는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판수가 내게는 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게 남은 유일한 혈육(血肉)이자,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자식이니까.”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들은 모른다.
강덕철과 정판호의 시대에서 새로운 세대로 넘어가는 지금, 정판호의 이야기는 옛날 일이 되었다.
그래서 굳이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
티 낼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동생.
정판수를 아낄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 이면에는, 부자 관계를 넘어서는 특별함이 있었다.
“그리고, 내 동생의 이름이 바로 정판수였다.”
정판수.
그 이름은 아픈 기억을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