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 20. 정판수와 정판호(2) >
처음 각인 마법이 개발되었을 때, 마법 문명의 사람들은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만약 5서클 마법사에게 7서클 마법을 각인하면, 5서클 마법사는 각인의 힘을 빌려 7서클 마법을 발현시킬 수 있지 않을까?”
문명의 발전은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된다.
각인이란 마법에 필요한 과정을 마법진이 모두 대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보였다. 그렇게 마법 실험이 진행되었다. 7서클에 오르길 강하게 희망하는 마법사들이 자발적으로 지원하였고, 국가적으로 진행된 프로젝트는 온 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그 결과.
[지원자 전원 사망]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7서클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서클이 파괴되었고, 역류(逆流) 현상으로 인해 마법사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고 말았다. 애초에 7서클 각인을 받아들인 마법사도 몇 없었다. 어떤 마법사들은 각인 도중에 불타오르는 등의 사고가 벌어지면서, 사람들은 초월 각인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현재에 이르러서 금단의 기술이라 불리는 영역.
클리스만은 그 영역에 발을 들였다.
강민혁의 육체에 각인시킨 ‘초월 각인’은 실패를 반복했던 것과는 다르게 매우 안전한 형태였다.
다만.
‘초월 각인에는 전제 조건이 있다. 바로 상위 서클을 감당할 수 있는 정신력과 단단한 서클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너는 그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클리스만의 기억.
그 잔재가 강민혁에게 확신을 주었다.
서걱!
“크아아악!”
수호문의 제자가 비명을 질렀다. 데스 나이트의 공격에 팔이 잘려나간 것이다. 검을 쥐고 있던 팔이 바닥에 떨어지자, 그로서는 데스 나이트를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희망을 잃어버린 눈빛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데스 나이트를 바라보는 그때, 강력한 화염이 일어나며 데스 나이트에게 작렬했다.
“룬 플레어.”
펑!
화르르르륵.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수호문의 제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미 전의를 잃어버린 그의 모습에, 강민혁은 상황을 반전시킬 강력한 한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초월 각인.’
화악.
마나가 빛을 발했다.
손등에서 타고 올라오는 빛이 강민혁의 서클로 흡수되었고, 서클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그건 강민혁이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회전수 였다. 7개의 서클로 감당해야 하는 회전이 4개의 서클에 부과되자, 강민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핏줄이 툭툭 튀어나왔다. 당장에라도 피를 토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끄으윽.”
이를 악물었다.
악다문 입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보통 사람은 버틸 수 없는 압력.
머리가 팽팽 돌았다.
7서클의 지식이, 정신력을 빠르게 갉아먹었다.
그러나 시련의 공간을 이겨낸 강민혁은, 핏빛으로 물든 눈빛으로 악착같이 초월의 압력을 버터냈다.
그러자.
확-
마나가 퍼졌다.
강민혁의 서클이 개방되며, 방대한 양의 마나가 화염의 속성으로 변했다.
“파이어 스톰.”
쿵.
쿠르르르르릉.
화르륵, 화르르르르르륵!
먹구름이 일었다.
바람이 휘몰아쳤고, 폭풍의 끄트머리에 화염이 일었다. 강력하게 일어나는 화염의 폭풍! 그것이 그대로 데스 나이트들을 덮쳤다. 7서클 마법의 위력은 A급의 데스 나이트조차 버틸 수 없었다. 화염의 폭풍에 빨려 들어간 데스 나이트들은 그대로 잿더미로 변했고, 주변에 있는 데스 나이트들조차 충격을 받았다. 어둠의 마력으로 구성된 그들의 피부가, 타닥타닥 타들어 갔다.
자연의 재앙.
엄청난 위력이었다.
파이어 스톰이 한차례 휩쓸고 가자, 데스 나이트의 숫자가 눈에 띄게 줄었다.
“이, 이게 대체.”
“파이어 스톰이라고?”
수호문 제자들의 시선이 강민혁을 향했다.
그들은 경악했다.
파이어 스톰이라니.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마법이 뿜어내는 엄청난 위력에, 그들은 이게 현실인지를 의심했다.
상식이 무너져 내렸다.
마법은 분명히 그 한계가 있는데, 강민혁의 마법은 한계라는 단어를 넘어서는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잠깐의 소강상태.
바닥에 쓰러진 강민혁이, 목소리를 쥐어짜며 외쳤다.
“정신 차려! 아직 끝나지 않았어.”
[크아아아악!]
[...죽인다, 모조리 죽인다!]
불길이 사그라진 자리.
마지막 남은 데스 나이트들이, 불길을 뚫고 튀어나왔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역한 기운은 이제 참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웩.”
후두둑.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냈다.
오늘 무엇을 먹었는지 눈에 훤히 보였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데스 나이트.
고개를 들어 간신히 그들의 상황을 확인하자, 수호문의 제자들과 한데 얽혀있는 모습이 보였다.
“죽어!”
퍽!
[크르르르륵.]
그야말로 혈전(血戰)이었다.
몸이 성치 않은 수호문의 제자들이, 발악하며 데스 나이트들을 상대했다. 이미 그들은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다. 암흑 도시에 진입한 이후 수차례 전투를 벌였고, 공간 분리를 당하고서 연속적으로 데스 나이트를 상대했다. 중간에 휴식 시간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하루 안에 벌어진 상황에 그들은 정신과 육체적인 피로가 대단했다.
그런데도 아직 사망자가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뛰어난 실력도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수호문의 정신이 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리고.
“크아아아악!”
빠직!
데스 나이트 무리의 중심.
정판수가 상처 입은 맹수처럼 날뛰었다.
정판호가 없는 자리에는 그가 있었다.
수호 검법을 사용하며 적절하게 데스 나이트들의 시선을 집중시켰고,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물러나지 않았다. 어렸을 때의 정판수는 나약했다. 친구를 버리고 몬스터에게 등을 보였던 그는, 수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어엿한 전사가 되었다.
‘도와줘야 해.’
빠득.
이를 악물었다.
입은 바짝 말랐고, 서클에서는 허한 기운이 맴돌았다.
마나가 없었다.
등급 외 마법을 많이 사용하기도 했지만, 7서클 마법 한 방에 모든 마나를 사용하고 말았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검이라도 든다면 어떻게 싸워보겠지만, A급 데스 나이트에게는 자신의 검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민혁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데스 나이트는 검을 포기하게 만든 계기. 그에게 통하는 검을 쥐고 있었다면, 애초에 강민혁은 후계자의 자리를 내려놓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마법사로서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해.’
새로운 길.
자신은 마법사다.
강민혁은 역한 기운을 참아내며, 김성호에게 말했다.
“지금부터 심법으로 마나를 회복하겠습니다. 그러니 바로 곁에서 절 지켜주세요.”
“알겠어요.”
김성호 일행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힘든 기색이 역력했지만, 방패를 몸에 바짝 붙이며 강민혁의 곁을 지켰다.
곧바로 심법에 들어가는 강민혁.
그런데 문득,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잠깐.’
심법.
정신의 힘.
만약 하나의 두뇌로 마나를 받아들이고, 다른 두뇌로 그 마나를 곧바로 마법으로 발현시키면 어떻게 될까.
그건 가능성이다.
마나가 없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시도라도 해볼 만한 가능성.
‘분뇌.’
강민혁의 생각이 나누어졌다.
그리고 사용되는 심법.
주변의 마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월하 심법의 강력한 흡입력(吸入刀)이 자연에 떠돌아다니는 마나를 남김없이 빨아들였고, 강민혁은 또 다른 두뇌로 그것을 곧바로 마법으로 발현시켰다. 그건 독특한 종류의 방식이었다. 마나를 서클에 쌓는 것이 아니라, 서클에 한번 회전시키고 곧바로 마법으로 발현시켰다.
강민혁의 마나는 조금도 없었다.
자연으로 배출되는 마나를 강제적으로 활용하는 방법.
그로 인해 내부에서 충격이 일었고 마나도 제멋대로 날뛰었으나, 강민혁은 마나를 강압적으로 억누르며 마법을 캐스팅했다.
그러자.
“폭발."
콰앙!
콰콰콰쾅!
도박은 성공했다.
결과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캐스팅 시간은 길었고, 마법의 위력도 생각보다 약했으며, 마법의 충격으로 속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강민혁은 마법을 중단할 수 없었다. 자신의 마법은 수호문 제자들의 희망이다. 지금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만 한다.
분뇌.
머리가 한계치의 능력을 끌어올렸다.
한쪽은 심법, 한쪽은 마법.
본인의 마나를 사용할 때보다는 효율적인 방식이 아니나, 강민혁의 마법이 큰 도움이 되었다.
퍽!
서걱!
데스 나이트들이 쓰러졌다.
마법에 충격을 받은 그들은, 수호문 제자들이 휘두른 검을 버티지 못했다.
그리고 화룡점정.
정판수의 검에서 오라가 활활 타올랐다.
이번 전투로 한 단계 발전한 그의 검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데스 나이트들의 목을 베었다.
“다 죽어!”
서걱!
머리가 날아가는 데스 나이트.
강민혁이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제는 정말 얼마 남지 않은 데스 나이트의 모습에, 강민혁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끝났어.’
다행이었다.
결국 살아남았다.
이제는 마지막.
정판호와 초월급 데스 나이트가 남았다는 것을 떠올리는 순간, 위에서 절망에 물든 목소리가 들렸다.
“판수야아아아아!”
‘..?!’
고개를 들었다.
암흑의 검격.
그것이, 데스 나이트의 목을 베고 있던 정판수의 몸에 그대로 꽂혔다.
콰앙!
쿠르르르르르르릉.
엄청난 폭발.
자욱하게 일어나는 어둠의 마나가 가라앉자, 혈인(血人)이 되어버린 정판수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정판호.
그는 대단한 무인이었다.
기어코 혼자서 초월급 데스나이트를 제압했지만, 그는 죽기 직전에 마지막 수를 사용했다.
[...선택하라, 인간이여.]
암흑의 검격.
초월급 데스 나이트의 공격이 정판수를 향했다. 오라 웨이브 형태의 원거리 공격이 정판수를 노림과 동시에, 초월급 데스 나이트는 육체의 재생을 시작했다. 마나를 소비하여 몸을 회복하는 기술. 양자택일(兩者擇一)을 강요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정판호는 망설임 없이 결단을 내렸다.
‘데스 나이트를 처리한다.’
서걱!
퍽!
머리가 날아갔다.
이로 인한 대가는 안다.
자신이 곧바로 암흑의 검격을 막지 않는다면, 정판수가 그 공격에 맞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렇다고 초월급 데스 나이트를 마무리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만약 그를 처리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다면, 그로 인해 수호문의 제자들은 모두 전멸을 당할 것이다.
지독히도 현실적인 선택.
정판호는 초월급 데스 나이트를 처리하자마자, 곧바로 정판수에게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해피 엔딩이란, 현실에서는 허락되지 않았다.
콰앙!
쿠르르르르르르릉!
정판수가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널브러진 그의 모습에, 정판호가 실성한 사람처럼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 안돼. 이렇게 죽으면 안 된다, 판수야!”
그의 눈동자가 길을 잃었다.
정판수는 그야말로 넝마가 되어버렸다.
어디를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정판수의 상태는 정말 최악이었다.
덜덜덜.
정판호의 손이 떨렸다.
눈에서는 물기가 차올랐다.
그는 황급히 품에서 비상용 포션을 꺼냈고, 눈을 뜨지도 못하는 정판수의 입에 억지로 흘려보냈다.
“제발, 제발 죽지 마라.”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포션을 제대로 삼키지도 못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정판호의 무너져내리는 가슴을 대변했다.
“아, 아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익숙한 상황.
익숙한 구도.
정판호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렸다.
애타게 불러도 반응하지 않는 정판수의 모습에, 그는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장로님.”
탁.
강민혁이였다.
이미 탈진 상태에 빠져버린 강민혁이, 힘든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정판호의 손을 잡았다.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포기를 강요하는 것 같은 행동에 정판호가 분노를 토해내려는 순간, 강민혁이 힘겹게 말했다.
“제가, 제가 치료해보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네가 치료한다고?”
“예."
정판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치료라니.
이걸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
정판호와 강민혁.
둘은 앙숙의 관계다.
서로가 서로를 싫어한다.
그런데 수호문의 호랑이라 불리는 정판호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을 하더니, 강민혁의 손을 움켜쥐었다.
“제발, 제발 부탁한다. 무엇이든 해다오.”
간절한 음성.
강민혁은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정판수를 내려다보았다.
‘살려내야 한다.’
강민혁은 정판수가 싫다.
자신을 시기 질투하고, 틈만 보이면 깎아내리려는 그가 좋을 리는 없다.
하지만 개인의 감정을 떠나 그는 동료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싸웠던 정판수라는 용감한 전사가, 이렇게 떠나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다.
사라락.
기억에 저장된 책장이 빠르게 넘겨졌다.
극도로 활성화된 두뇌 능력.
그것은 예전에 왕실 마법 아카데미 ‘마법 도서관’에서 보았던, 하나의 책에서 정확히 멈추었다.
[의료 마법]
지금은 막연한 기적이 아니라, 정확한 해결책이 필요한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