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20. 정판수와 정판호 >
초월.
에픽의 권능(權能)을 타고나지 못한 A급 몬스터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을 때 도달하는 최종 단계.
그들은 강하다.
에픽 몬스터처럼 대군을 진두지휘하는 강력한 권능이 있는 것은 아니나, 단일 개체로서 초월급 몬스터는 상식을 벗어난 무력을 갖추었다. 보통 몬스터들의 힘은 등급의 기준치 안에서 한계가 정해지지만, 에픽과 초월급의 몬스터는 그 한계가 명확하지 않다. 성장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이, A급을 넘어서는 몬스터들이야말로 ‘진짜 공포’라고 불리는 이유다.
[...하찮은 인간들.]
초월급 데스 나이트.
그가 어둠을 뚫고 나섰다.
그러자 마치 고도로 단련된 무사가 발검(拔劍)하듯이, 암흑의 검기가 번뜩이며 공간을 갈랐다.
“위험해!”
타닥.
정판호가 땅을 박찼다.
초월급 데스 나이트의 공격은 정확히 수호문의 제자들을 노렸다. 그건 그들로서는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공격이 아니다. 수호문의 정예 병력이 아무리 A급 몬스터를 쓰러트릴 수 있는 실력자들이라지만, 초월급은 그보다 두세 단계 위. 정판호의 내부에서 강력한 마나가 휘몰아쳤다.
확-
콰앙!
“크윽."
검과 검의 격돌이 아니었다.
거대한 폭발음이 일어나더니, 정판호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엄청난 충격. 속에서 일어나는 역한 기운에 정판호의 표정이 일그러졌지만, 지금은 내부를 다스릴 여유 따위가 없었다. 정판호가 황급히 고개를 들어 전방을 확인하는 순간, 초월급 데스 나이트가 이미 지척에 도달한 상태였다.
[...인간을 처단한다.]
서걱!
어둠이 밀려 들어왔다.
정판호는 마나로 내부를 보호하며, 수호문의 비기를 사용했다.
‘철벽(鐵壁).’
마나로 인한 신체 강화.
정판호의 몸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
콰앙-
몸이 흔들렸다.
하지만 방금처럼 충격이 대단하지 않았다.
정판호는 끝까지 초월급 데스 나이트의 공격을 지켜보았고, 막아냄과 동시에 상대의 검을 흘려보내면서 그대로 목을 노렸다. 그러자 초월급 데스 나이트의 검이 빠르게 회수되었다. 보통은 방어를 도외시하는 언데드 몬스터들의 특성과는 달리, 그의 검술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캉-
검이 막혔다.
팔이 튀어 오르자, 정판호는 그대로 몸을 부딪쳤다.
퍽!
약간 벌어진 틈.
정판호의 검이 다시 한번 빛을 발했다. 활활 타오르는 오라가 공간을 갈랐지만, 초월급 데스 나이트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순식간에 수십 합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캉캉- 울리는 쇳소리와 함께 엄청난 마나의 파동이 주변에 휘몰아쳤고, 지켜보는 제자들은 그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짧은 시간.
하지만 그로 인한 충격은 대단했다.
제자들은 감히 둘의 싸움에 끼어들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에, 데스 나이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죽인다!]
[....몰살하라!]
“제길.”
캉!
카카캉!
정판호가 뒤로 밀려났다.
초월급 데스 나이트의 공격이 강한 것도 있지만, 제자들을 덮친 데스 나이트 중 몇몇이 정판호를 공격한 것이다. 초월급 데스 나이트 하나만을 상대해도 위험한 상황. 그런데 사방에서 다른 데스 나이트의 공격도 쇄도하자 그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빠르게 방어 초식을 펼치면서 그들의 공격은 막아냈으나, 그 끝에는 초월급 데스 나이트의 공격이 있었다.
퍼엉-
쾅!
정판호가 폐허 건물에 처박혔다.
곧바로 달려드는 초월급 데스 나이트.
정판호는 충격에 신음할 새도 없이, 입안 가득 차오른 핏물을 뱉어내며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퉷. 이런 개 같은 새끼가.”
후퇴?
그딴 것은 생각지도 않는다.
정판호는 후발대가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초월급 데스 나이트를 쓰러트리는 것만이 정답임을 알았다.
카앙!
격돌하는 두 존재.
정판호가 피로 얼룩진 입으로 발악하듯 소리쳤다.
“강민혁! 내가 초월급 데스 나이트와 둘만 싸울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
위기의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정판수가 아니었다.
강민혁.
그라면 정답을 찾으리라.
“어서!”
악에 받쳐 마지막 말을 내뱉은 정판호가, 이만 ‘주변’에 대한 신경을 끄고 초월급 데스 나이트에게 달려들었다.
콰앙!
강민혁의 상황도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데스 나이트 무리와 후발대가 격돌하는 순간, 강민혁의 마나도 강력한 화력을 뿜어냈다.
“폭발."
콰앙!
콰콰콰쾅!
등급 외 마법.
그 강력한 충격에 데스 나이트들이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상황을 해결할 수 없었다. 데스 나이트의 숫자가 워낙 많았고, 폭발은 A급 몬스터에게 먹히는 기술이나 그렇다고 압살(壓殺)시키는 파괴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 폭발의 피해를 받은 데스 나이트는 일부분. 수호문의 제자들과 데스 나이트들이 뒤얽히는 모습에 후속타를 준비하려는 그때, 정판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민혁! 내가 초월급 데스 나이트와 둘만 싸울 수 있도록 판을 만들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판호가 있는 곳을 확인하자, 그가 머릿수에 밀리는 모습이 보였다.
‘위험해.’
이번 싸움.
강민혁을 비롯한 후발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판호가 초월급 데스 나이트를 쓰러트려야만 한다. 자신의 마법?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서클의 위력을 보여주는 등급 외 마법을 수십 발 사용한다 할지라도, 초월급 데스 나이트는 아무런 충격이 없을 터. 지금은 정판호의 힘이 필요하다. 이 공간에서 그만이, 초월급 데스 나이트를 쓰러트릴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전장의 상황이 눈 속으로 빨려 들어오며, 빠르게 해답을 찾았다.
“정판수!”
강민혁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정판수가 데스 나이트를 뿌리치며 자신을 확인하는 모습에,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지금 당장 장로님 곁에서 일반 데스 나이트를 떨어트려! 당장!”
“씨발.”
정판수가 이를 악물었다.
강민혁.
정말 싫다.
하지만 그 또한 정판호와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의 목숨이 걸린 위기의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강민혁의 이름은 강한 신뢰를 부여했다.
지난 세월.
강민혁은 질투와는 별개로 믿음직한 후계자였다.
“알겠어.”
파박.
정판수가 몸을 날렸다.
그의 검에서 타오르는 오라.
마침 정판호를 공격하고 있던 데스 나이트들을 향해, 정판수가 그대로 몸을 날려 검을 내리찍었다.
“죽어, 이 개새끼들아!”
캉!
카카캉!
데스 나이트들은 호락호락 당해주지 않았다. 정판수의 공격을 막기 위해 검을 회수했고, 정판호를 공격하던 데스 나이트들이 모두 정판수를 상대했다. 일 대 다수의 대결. 정판수가 악에 받쳐서 그들을 몰아붙였다.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강민혁의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였다.
분뇌의 능력으로 ‘하나의 마법’에 집중한 강민혁이, 정판호와 정판수가 떨어지는 순간 마법을 사용했다.
“태산(泰山).”
쿠웅.
쿠르르르르릉.
땅이 뒤흔들렸다.
바닥이 치솟으며, 주변의 지형지물이 변했다.
지진과는 다른 마법.
태산은 주변의 지형지물을, 마법사가 원하는 형태로 변형시킨다.
‘둘을 위한 무대를 만든다.’
쿠쿠쿠쿵.
정판호와 초월급 데스 나이트.
그들이 위치한 땅이 높이 솟아올랐다.
그러자 다른 데스 나이트들은 더 이상 정판호를 공격하지 못했다. 둘이 싸우는 무대는 육체적인 능력으로 개입하기에는 너무 높았고, 정판호는 온전히 초월급 데스 나이트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무대는 만들었다.
하지만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득달같이 밀려드는 데스 나이트들의 모습에, 강민혁은 곧바로 다음 마법을 캐스팅했다.
“유성우.”
휘이잉.
콰콰콰콰쾅!
하늘에서 떨어지는 운석들.
그 강력한 충격이 데스 나이트들을 휩쓸었다.
강민혁은 서클을 활짝 열었다.
쉴 새 없이 회전하는 서클이 마법을 끊임없이 토해냈지만, 상황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정판호.
그가 빠짐으로써 화력이 부족했다.
A급 데스 나이트 수십 마리를 상대로도 밀려나지 않은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마냥 희망적이지는 않다. 시간은 후발대의 편이라고 할 수 없다. 혹시라도 정판호가 초월급 데스 나이트에게 패배한다면, 후발대는 그대로 전멸을 당한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빨리 지상의 데스 나이트들을 정리하고, 고군분투하고 있을 정판호를 도와야만 한다.
강민혁이 머리를 쥐어 짜냈다.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마법이라는 변수의 힘이 간절했다.
‘마법은 한계가 있어.’
마나.
그것이 바닥을 드러내면 끝이다.
그러니 효율적으로, 최대한 강한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
분뇌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마법의 캐스팅도 포기하고, 양쪽의 두뇌가 현재 상황에 걸맞은 최상의 해결책으로 찾으려고 했다. 그러다 머릿속에서 이상한 이질감을 발견했다. 전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이질감.
강민혁이 그것을 건드린 순간.
화악-
'.........?!'
정신의 확장.
강민혁이 눈을 부릅떴다.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고, 주변의 소음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리고.
“네가 ‘기억의 편린(片織)’을 건드렸다는 것은 힘이 간절하다는 의미겠지.”
클리스만.
그가 눈앞에 나타났다.
빙의.
강민혁의 정신이 클리스만의 몸에 빙의했을 때, 클리스만의 정신은 어디에 있었을까?
본인의 몸?
그렇다면 강민혁의 몸은?
영혼이 없는 몸은 죽어갈 수밖에 없다.
만약 강민혁의 몸이 영혼 없이 존재하고 있었다면, 그 후유증은 어떤 방식으로든 남았어야 한다.
그 말인즉.
“네가 나의 몸에 빙의하고 있을 때, 나 또한 너의 몸에 머물고 있었다.”
클리스만이 말했다.
의식 속의 존재.
거울에서만 보았던 클리스만을 직접 마주한다는 것은, 강민혁으로서는 너무나도 낯선 경험이었다.
“하지만 난 강민혁으로서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설명할 시간이 없다. 내가 인과율(因果律)의 법칙이 허락하는 한에서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강민혁이라는 인간을 직접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너의 몸에 특별한 문양을 남기는 것. 나는 그것에 성공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인과율의 법칙이라니.
그렇다면 그간 강민혁이 해온 일은 어떻게 된단 말인가?
클리스만이 강민혁으로서 침묵했던 것과는 다르게, 강민혁은 클리스만으로서 많은 일을 했다.
그건 강민혁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만약 클리스만이 강민혁에게 미리 경고했더라면, 강민혁은 허름한 숙소 안에서 절대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클리스만은 그 어떠한 방식으로도 경고하지 않았다. 클리스만으로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했고, 자연스럽게 사건 사고가 따라왔다. 그에 대한 문책도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인과율의 법칙을 생각하지 않았고, 이걸 단순히 육체와의 빙의라고만 생각했었다.
차원을 넘나드는 빙의.
그것의 이면에는 조금 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그러나 클리스만은 그것에 대해 해명할 이유도, 해명할 의지도 없었다.
“궁금한 게 많겠지.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 몸은, 이미 인과율의 법칙에서 자유로운 상태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클리스만의 모습은 기억에 남겨져 있는 편린. 그것은 클리스만이 강민혁의 의식에 심어놓은 ‘기억’일 뿐이다. 머릿속에 저장되어있는 영상을 재생시킨 것과 같은 이치기에, 궁금증을 해소할 방법은 없었다.
클리스만의 몸이 흐릿해졌다.
사라지기 직전, 그가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는 내가 성공한 기술을 초월 각인(起越刻印)이라 부르기로 했다.”
화악-
공간이 머릿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엄청난 현기증이 머리를 어지럽히더니, 강민혁은 눈을 뜨며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현실을 직시했다.
“허억, 허억.”
숨이 차올랐다.
옆에 있던 정민철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괜찮으세요?”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손등으로부터 찌르르 올라오는 전율.
강민혁이 손등을 확인하자, 그곳에는 난생 처음 보는 형태의 마법진이 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강민혁은 그것의 정체를 알았다.
자신의 기억이, 아니 클리스만의 기억이 말해주었다.
‘7서클 마법 파이어 스톰(Fire Storm).'
초월 각인.
클리스만은, 상상 속의 지식을 현실로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