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19. S급 던전 암흑 도시(5) >
A급 몬스터.
이 세상에서 강함을 증명하는 경계선.
대다수 사람에게 ‘절대적인 공포’를 선사하는 그들이지만, 정판호 앞에서는 얘기가 달랐다.
카앙!
강력한 스파크.
데스 나이트가 휘두른 암흑의 검격이 정판호의 검에 막혔다. 데스 나이트는 강화 전사와 마찬가지로 ‘오라의 검’을 사용할 줄 안다. 오라의 힘이 약한 강화 전사의 경우에는 검과 몸이 그대로 잘려나갈 정도로 강력한 힘인데, 정판호의 오라는 그런 공격을 받아내고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오히려 충격으로 인해 데스 나이트가 뒤로 밀려났고, 정판호는 어둠으로 득실거리는 공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인간!]
[...공격하라!]
붉은 안광.
수십 마리의 데스 나이트가 눈을 번뜩였다.
그들의 검에서 오라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더니, 사방에서 정판호를 덮쳤다.
캉!
카캉!
난전(亂戰)이었다.
조금만 실수해도 죽임을 당하는 상황에서, 정판호는 단 한 번의 공격도 허락하지 않았다. 수호 보법은 활로를 찾아 끊임없이 움직였고, 정판호의 검은 간발의 차이로 상대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반격 .
“크아아아!”
콰득!
[그그그그그극]
쩍 갈라지는 몸뚱이에 데스 나이트가 몸을 떨었다. 정판호는 추가로 목을 베었고, 안에 있는 ‘마나의 심장’을 파괴해버렸다. 순식간에 소멸해버리는 데스 나이트. 마법사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데스 나이트라기에는 그 최후가 상당히 허무했지만, 지금은 그것에 감탄할 시간이 없었다.
수십 마리의 데스 나이트.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듀라한.
지금은 상대해야 할 적이 너무 많았다.
“제길! 아버지를 얼른 도와드려야 해.”
전투가 벌어진 직후.
정판호는 3조의 안전을 위해 데스 나이트 무리에게 몸을 던졌다. 덕분에 정판수를 비롯한 3조의 제자들은 수월하게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었다. 그들이 착실하게 몬스터들을 처리하면서 전진하는 사이에, 최전방에서는 정판호와 데스 나이트의 수십 대 일의 전투가 벌어졌다.
캉! 카카카카카캉!
엄청난 격돌이었다.
정판호는 사나운 기세를 보였다.
데스 나이트들을 상대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맹수처럼 호시탐탐 역으로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수호문의 호랑이.
수호검이라 불리는 강덕철이 ‘수비’에 특화된 검사라면, 정판호는 수호 검법을 공격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이다. 사실 강덕철과 정판호는 이번 토벌에서 힘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적당히 나선다 할지라도 토벌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겼다.
그래서 나섰다.
지금은 관망할 때가 아니라, 힘을 드러낼 때임을 알았다.
콰득!
[그그그그극!]
또 다른 데스 나이트가 소멸되었다.
그야말로 정판호의 무력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수십 마리의 데스 나이트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인데도, 그는 밀려나기는커녕 착실하게 상대의 숫자를 줄였다. 수호문의 호랑이라는 칭호는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시작부터 매우 힘든 상황에서 싸울 뻔했다.
“...이게 수호문의 위력이구나.”
알렉스.
그가 입을 떡 벌렸다.
대단했다.
수십 마리의 데스 나이트와 그보다 많은 듀라한.
드레이크 용병단을 사지에 몰아넣은 그들이, 수호문을 상대로는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수호문이 대단하다고는 들었으나, 문주도 아닌 장로의 무력이 이토록 강력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마법사는 대체 뭐야?”
알렉스의 바로 앞.
정판호와 마찬가지로, 강민혁의 존재감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도시의 그림자.
그 안에서 지옥의 악마들이 나타났을 때, 강민혁은 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번이라도 밀려나면 죽는다.’
이곳 암흑 도시.
끝없이 재생하는 망자들에게 매우 유리한 환경이다. 인간은 언제고 지칠 수밖에 없기에, 이번 전투에서 생존한다 할지라도 다음 전투에서는 이전에 쌓인 피로와 부상으로 궁지에 몰릴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 밀려서는 안 된다.
확실한 승리만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화악-
마나를 흩뿌렸다.
동시에 주변의 상황을 파악했다.
이전 전투에서는 단순히 공격에만 집중했다면, 지금은 ‘파티의 일원’으로서의 적절한 역할이 필요하다.
[...죽어!]
데스 나이트.
듀라한과 같이 그들이 수호문 제자를 공격했다. 수호문 제자 또한 A급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지만, 문제는 상대가 너무 많았다. 사방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막으며 어지러워지는 손. 순간의 실수로 데스 나이트의 공격을 놓치는 순간, 수호문 제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때.
“라이트닝 스피어(Lightning Spear)!”
빠지지지직!
강민혁의 마법이 데스 나이트에게 작렬했다.
그 강력한 충격에 데스 나이트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4서클 마법으로 데스 나이트를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해도, 일시적으로 시간을 버는 정도로는 충분했다.
그리고 그 틈에.
빠각!
수호문 제자의 검이 그대로 데스 나이트의 목뼈를 박살 냈다. 이어서 데스 나이트를 마무리하려는 수호문 제자의 모습이 보였지만, 강민혁의 시선은 이미 다른 상황을 포착하고 있었다.
“룬 플레어.”
쾅!
화르르르르륵.
똑같이 위기를 맞이했던 수호문 제자가 강민혁의 도움에 숨을 돌렸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강민혁은 전장의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면서, 보조적인 포지션을 통해 전장의 밸런스를 지켰다.
그뿐만이 아니다.
확실한 화력이 필요할 때.
강민혁은 그러한 기대에 부응했다.
“폭발."
등급 외 마법.
상당한 양의 마나가 쑥 빠져나가더니,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앙!
쿠르르르르르르릉.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이번에는 데스 나이트조차도 예외가 없었다. 4서클 마법에는 아랑곳하지 않던 데스 나이트들이, ‘폭발’의 위력에는 몸을 휘청거렸다. 하지만 아직 상대해야 할적이 많았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모습에, 분뇌로 나누어진 머리가 하나의 마법을 캐스팅하기 위해 전력을 쏟았다.
“지진.”
쿠구구구궁.
또 다른 등급 외 마법.
땅이 뒤흔들렸다.
마치 7서클 마법인 어스 퀘이트(Earth Quake)를 사용한 것 같은 느낌이지만, 그 효과는 조금 달랐다.
쩍쩍.
땅이 갈라졌다.
득달같이 달려들던 몬스터 무리가 그대로 어둠의 구렁텅이로 추락하였고, 그들은 다시는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강한 떨림. 마치 땅을 양손으로 잡고 뒤흔들어버리는 것 같은 상황에, 몬스터들은 수적 우위를 발휘하지 못했다. 그건 재앙이었다. 수십 마리의 몬스터를 집어삼킨 무저갱(無底坑)은, 마나의 효과가 떨어지자 그 아가리를 닫으며 다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왔다.
빠직!
콰드드드득.
땅 아래서 몬스터들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부활의 능력이 있다 할지라도, 땅속에 있는 몬스터들은 영영 지상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서클은 쉴 새 없이 회전했다.
‘충분히 살아나갈 수 있어.’
문득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수호문의 후계자.
그 시절에 강민혁은 수호문 제자들을 진두지휘하는 입장이었다. 가장 최전방에서 이준호와 마찬가지로 적들을 상대하며 명령을 내리는 것이 후계자의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최후방에서 전장을 조율하는 것이 가능했다. 강민혁이 사용하는 마법에 따라 전장의 흐름이 변했다. 적절한 지원에 수호문 제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몬스터가 과도하게 몰리는 곳은 등급 외 마법으로 상황을 해결했다.
전장의 마에스트로(maestro).
최전방에 위치한 정판호가 시간을 버는 사이에, 강민혁은 그렇게 전장을 조율하며 적들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수호문 제자들은 알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강민혁의 도움.
그걸 직접적으로 받는 사람이 그들이니 말이다.
처음에는 우연이라 생각했다.
쾅!
화르르르륵.
데스 나이트에게 당하기 직전, 화끈하게 타오르는 광경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여유조차 없었다.
지금은 그만큼 급박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비슷한 위기에서 또다시 마법이 사용되자, 수호문 제자는 생각했다.
‘강민혁 도련님이 우리를 지켜주고 계셔.’
아직도 의문은 많다.
강민혁이 왜 후계자의 자리에서 내려왔는지, 그리고 짧은 시간에 어떻게 4서클의 경지에 올랐는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필요 없었다.
강민혁은 강민혁이다.
자신들이 기억하는 후계자로서의 강민혁이 능력을 발휘하는 모습에, 수호문 제자들은 더욱 공격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그만큼 강민혁의 보조는 대단했다. 시기적절하게 마법이 터졌고, 특히 등급 외 마법은 세상에 이런 위력의 마법이 있는지 의구심이 생길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뛰어난 강화 전사.
뛰어난 마법사.
두 문명의 조합은 폭발적이었다.
강화 전사들은 A급 몬스터들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았고, 마법사는 지켜준 만큼 그 값어치를 했다.
마침내 상황이 반전되었다.
수호문의 제자들이 우위를 점했다.
결국 후방의 몬스터들을 대부분 처리하였고, 뒤늦게 최전방에 위치한 정판호를 도와주려고 했다.
그런데.
콰득!
데스 나이트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정판호.
그는 이미, 혼자만의 힘으로 10마리가 넘어가는 데스 나이트를 처리한 상태였다.
전투가 끝났다.
알렉스는 살아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수호문의 저력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전투 직후.
수호문 제자들이 강민혁에게 다가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강민혁 도련님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대체 언제 마법을 그 정도로 익히신 거예요? 보통 실력이 아니시던데요?”
상황이 변했다.
강민혁은 이번 전투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수호문의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으면서 강민혁에 대한 불만이 생겨났지만, 목숨을 구제받은 상황에서도 끝까지 불만을 고수할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강민혁은 마법으로 무려 A급 몬스터를 쓰러트렸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기에, 강민혁을 바라보는 수호문 제자들의 눈빛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강민혁.
수호문의 후계자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찾고 있었다.
그 광경.
수호문 제자들이 돌아서는 모습에, 정판수는 짜증이 일었다.
‘씨발.’
그는 예전부터 강민혁이 싫었다.
이유?
특별한 건 없었다.
정판수는 항상 대우를 받고 싶어 했지만, 강민혁이라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그와 비교당할 때면 정판수는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재능은 강민혁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니었고, 정판호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강민혁이 자신의 아들이길 바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쌓여온 감정이다.
그래서 강민혁이 후계자의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 정판수는 너무나도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자신이 강민혁보다 앞섰다.
어린 시절의 강민혁은 대단했을지 몰라도, 대기만성(大器攻成)형인 자신이 결국 승리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강민혁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그의 모습에, 잊고 있었던 질투가 치솟았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남들처럼 강민혁에게 한마디 말이라도 건넬 수 있었지만, 정판수의 자존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 나섰다.
“이번 전투에서 너의 도움이 매우 컸다.”
".........."
정판호.
바로 그였다.
평소에는 마법을 신랄하게 깎아내리던 그가, 확인된 사실 앞에서는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정판호의 시선이 김성호 일행을 향했다.
“그리고 너희.”
“예?”
“방패로 몬스터들을 막기만 하던데, 너희의 역할이 강민혁을 지키는 건가.”
“...맞습니다. 강민혁님이 마법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면, 전투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살짝 눈치를 보았다.
강화 전사.
이 세상의 갑(甲)이 마법사의 밑으로 들어갔다.
비난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좋은 성과를 보여주었기에, 정판호의 앞에서도 김성호는 최대한 당당해지려고 노력했다.
“좋은 판단이었다. 너희들은 앞으로도 맡은 본분에 충실하고, 3조의 조원들도 상황에 따라서 강민혁이 위험에 빠질 경우 최우선으로 보호하라. 이번 전투에서 강민혁은 그만한 가치를 보여주었다. 마법사가 활약할 수 있는 최상의 환경을 만들어준다면, 우리는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다.”
정판호의 변화.
사람들이 얼떨떨해할 정도였다.
강함의 기준.
오로지 그것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정판호에게 있어, 강민혁은 활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단순히 그뿐이었다.
그래서 마법사를 받아들였다.
기존의 생각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 정판호는 알고 있었다.
정판수는 그릇이 작아 현실을 인정하지 못할 테니, 자신이 나서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자란 녀석.’
정판수를 달래지 않았다.
애지중지 키우는 자식이지만, 지금 그를 챙기는 것은 수호문 제자 전체를 잃을 수도 있는 일이다.
“우리는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이 난관을 해결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 정판호를 믿어라. 너희가 그간 따라왔던 이 정판호가, 너희를 바깥으로 무사히 보내줄 것이다. 그러니 힘들어도 참아라. 본대와 합류할때까지, 지금부터는 전력을 다해 이 난관을 돌파한다.”
그는 리더였다.
강덕철의 밑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위기의 상황에서 정판호는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희망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데스 나이트 무리’를 만났을 때, 3조의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저건 설마.”
무리의 중심.
그의 형태가 일반적인 데스 나이트와는 달랐다.
주변에 일렁이는 암흑의 오라와 날카로운 기운.
그것은 분명히 에픽 몬스터 직전에 해당되는 초월(起越)급의 몬스터였다.
‘이것 때문이었구나.’
S급 던전.
이곳에 도전했던 자들은 전부 실력자였다.
그런데도 그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공간 분리와 예상치 못한 초월급 몬스터라는 변수 때문이었다.
S급을 넘어서는 난이도.
‘...이곳에서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사지(死地).
정판호는 물론이고, 이번에는 강민혁조차도 희망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