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55화 (55/197)

55화.  <15. 마법사들의 생존 방식(5) >

전장 정리가 진행되었다.

형상 기억 마법으로 인해 성벽은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되었고, 의료팀이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부상자를 수습하였다. 사망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동급생들은 친구의 죽음에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게 전체의 분위기로 퍼져나가진 않았다. 이 세상의 평화를 무너트린 게이트 현상이 발발한 이후, 장벽 안의 사람들도 일상에서의 죽음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그나마 이번 전투는 다행이었다.

게이트 규모에 비해 사상자가 거의 없었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피해를 입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CCTV 영상 하나가 퍼졌다.

C-1 구역의 상황을 촬영한 영상이었는데, 당시 생생했던 순간의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게 클리스만이라고?”

“와."

"이게 가능한 일이야? 골렘 슈트를 입은 것도 아닌데, 마치 초인처럼 날아다니면서 몬스터들을 상대하고 있잖아. 상식적으로 이건 말이 되질 않는데. 영상이 잘못된 거 아닌가?”

학생들이 눈을 의심했다.

클리스만.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열등생이 엄청난 무력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떠나, 인간이 맨몸으로 A급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이 세상의 상식이 아니었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웨어 울프들을 상대로 전혀 물러섬이 없는 클리스만의 모습. 예전에는 학생 1로서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녀석이었는데, 영상 속의 클리스만은 거인(巨人)의 뒷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클리스만과 관련된 소문에 부채질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강민혁에게 도움을 받았던 해리 윌슨이었다.

"어떤 상황이었냐고? 그냥 막막했지. 웨어 울프가 방어벽을 뚫고 나를 공격하는데, 진짜 눈앞이 깜깜해지더라고.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 무빙 캐스팅으로 웨어 울프의 공격을 피하고 반격한다 할지라도, A급 몬스터에게 3서클 마법은 전혀 먹히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순간, 클리스만이 나타나서 내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했어.”

“정말?”

“클리스만이 널 구했단 말이야?”

경청하는 학생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였다.

그에 해리 윌슨은 당시의 상황에 젖어 들었다.

“어. 클리스만이 날 구해줬어. 그뿐만이 아니야. 혼자만의 힘으로 A급 웨어 울프를 기어코 쓰러트리더니, C-1 구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어. ‘지금부터는 제가 앞에서 막겠습니다.’ 캬아- 미쳤지 않았냐? 그러고 진짜로 클리스만 혼자서 몬스터들을 막는데, 순간 난 내 성별이 전환되는 줄 알았어. 내가 여자였다면, 클리스만의 모습에 반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클리스만의 활약은 가장 핫한 키워드.

CCTV 영상이 아니라 직접 눈앞에서 목격한 해리 윌슨은, 무용담(武勇談)을 전파하는 이야기꾼이 되었다. 이전에 클리스만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직접 도움을 받은 이후로는 태도가 완전히 돌변하였다. 강민혁을 직접 찾아가서 감사의 인사도 전한 해리 윌슨은,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서 강민혁을 찬양했다. 해리 윌슨의 부연 설명에 CCTV 영상이 한데 어우러지자,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학생들로서는 클리스만이라는 존재를 달리 볼 수밖에 없었다.

1서클 마법사.

아카데미의 열등생.

배경이 불분명한 녀석.

클리스만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스토리는, 이번 활약으로 단번에 스타로 떠오르기 충분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아직 복구가 다 끝나기도 전에,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모두 클리스만의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그러한 소문은 결국 ‘윗선’에게도 흘러 들어갔다.

백발을 올백으로 넘긴 중년의 사내.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총장인 아비드(Arvid)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눈앞의 학생을 바라보았다.

탁.

“클리스만, 너의 활약에 대해서는 들었다. C-1 구역은 상황이 제일 좋지 않았는데, 네가 나서는 덕분에 큰 피해가 없을 수 있었다. 참 대단해. 겨우 검 한 자루를 들고 A급 웨어 울프를 상대한다는 건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을 텐데.”

“아닙니다. 주변의 도움이 있어서 피해가 없었던 겁니다.”

사실 이 자리가 강민혁으로서는 상당히 의외였다.

아비드.

마법 왕실 아카데미의 총장은 얼굴을 보기가 정말 어려운 인물이다. 7서클 대마법사라고 알려져 있는 그는, 게이트 사태가 발발했을 당시 아카데미에 없었다. 뒤늦게 도착한 그는 상황을 정리하고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진행했고, 그중 한 명으로 1학년생인 강민혁이 이례적으로 선정되었다.

타당한 선택이기는 했다.

아비드의 말대로 C-1구역의 상황은 정말 좋지 않았다. 몬스터가 과도하게 집중되는 바람에 조금이라도 조치가 늦어졌다면 참극이 벌어질 뻔했는데, 강민혁이 나서서 그러한 상황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자 오히려 1학년이라는 신분이 부각되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을 구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섰다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비드가 묘한 눈빛으로 강민혁을 훑었다.

아비드 또한 CCTV 영상을 보았고, 강민혁의 기술이 이 세상의 상식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나로 물리 데미지를 입히는 방법. 그건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총장인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생소한 기술이었다. 혹시 그걸 네가 직접 개발했나? 마법이 아니라, 검으로 싸우는 방법을?”

당연한 질문.

그렇기에 예상했다.

검을 들고 나서는 순간부터, 강민혁은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리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예. 아시다시피 저는 마법에 재능이 없는 편이라서, 제 재능을 살려서 싸울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굳이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자신의 기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의무는 없다.

딱 필요한 정도의 해명을 한 뒤에 강민혁은 입을 닫았고, 아비드는 차를 마시며 웃음을 지었다.

"참 재미있어. 사실 너의 입학 ‘청탁’을 받았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게 이런 결과를 낳다니. 클리스만. 넌 비록 마법에 재능이 없을지라도, 선구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타고났구나. 홀로 A급의 몬스터를 쓰러트릴 정도라면, 네가 발명해낸 기술은 이미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청탁.

그 단어에 꽂혔다.

클리스만의 입학을 부탁한 사람이 있다면, 아비드는 클리스만의 배경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되묻지 않았다.

아비드는 진실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만약 클리스만의 몸에 다른 영혼이 빙의되어 있다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면, 자신의 앞에서 청탁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클리스만도 당연히 청탁한 사람이 누군지 아는 것 같은 말투. 여기에서 청탁의 대상을 묻는다면, 의심을 받을 수가 있다.

일단은 의문을 참았다.

정답을 들은 것은 아니나, 이로써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있었다.

‘저번에 내 문제를 해결해주었던 배경. 그 배경은 아비드에게 청탁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존재였어.’

보통 배경이 아니라는 뜻이다.

아비드는 이 세상에서 최상위 계층의 사람이고, 그에게 청탁할 정도면 보통의 배경으로는 힘들다.

최소 대마법사와 동급의 존재.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그때, 아비드가 말했다.

“아카데미 장로들과 의논한 결과, 희생과 용기를 보여준 네게 적절한 보상을 해주기로 결론을 내렸다. 내게 특별히 바라는 보상이 있나? 그게 타당한 보상이라면, 이번 일의 보상으로 그것을 반영하도록 하겠다.”

보상.

아비드가 자신을 만나자고 했을 때, 강민혁은 상이 부여될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아비드란 그런 사람이었다.

공과 사가 철저한 사람.

실수는 용납하지 않으나, 공을 이룬 사람은 그에 타당한 보상을 내린다.

그래서 소문을 통해 아비드의 성향을 파악한 강민혁은, 고민 끝에 어떤 보상을 받고 싶은지 미리 생각해두었다.

강민혁이 말했다.

“보상으로 시련의 탑에 오르고 싶습니다.”

마법 도서관.

그곳에서 여러 책들을 읽으며, 강민혁은 우연히 ‘시련의 탑’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시련의 탑의 역사는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세상에 차원의 균열이 일어나며 몬스터가 나타났을 때, 장벽 안의 땅에서도 균열이 생겨났다. 그런데 그건 몬스터가 나타나는 균열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균열이었고, 그 안에 발을 들인 사람은 육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정신적으로 폐인이 되어 돌아왔다. 그래서 처음 수백 년간은 금지(禁地)로서 취급하였으나, 균열의 생존자가 나타나면서 균열의 용도는 변했다. 균열은 이곳과는 전혀 다른 ‘정신(精神)의 세상’에 발을 들이는 통로였고, 그 공간에서 일정 시간을 버티면 인간은 육체를 초월한 정신을 얻게 된다. 그건 곧 마법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 마법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으로 성취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정신력의 발전은 마법사를 새로운 경지로 인도하는 것이다.]

정신력의 발전.

차원의 균열이 시련의 탑이라고 명명되는 순간이었다.

이와 같은 효과를 가진 균열은 세상에 딱 세 개밖에 없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영국에 있었다.

시련의 탑은 평범한 사람은 출입할 수 없다. 대마법사의 자질을 가진 사람들은 시련의 탑을 일종의 성장 코스로 여기면서 정신력의 발전을 얻어서 돌아오지만, 평범한 사람의 능력으로는 폐인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시련의 탑 출입은 철저하게 관리되는데, 강민혁은 그곳의 출입을 바랐다.

‘성장을 위해서는 발판이 필요하다.’

이번 전투.

강민혁은 마법사들의 ‘진짜 위력’을 목격하였다.

그건 신선한 충격이었다.

결국 한계가 있었던 자신의 세상과는 다르게, 이곳에서 마법사의 가능성은 감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의 자신은 겨우 3서클 마법사고, 이 세상에서는 절대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는 경지다. 그에 반해, 클리스만의 육체는 수호 심법을 익히자마자 현실에서의 자신을 뛰어넘고 있었다. 물론 대단한 무력을 보여준 것은 강민혁의 정신이지만, 클리스만이 타고난 재능 자체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정도로 대단했다.

강해지고 싶었다.

더 높은 세상을 바라볼수록, 강민혁은 자신의 성취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타들어 가는 갈증에 목이 말랐고,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지 견뎌낼 준비가 되었다.

언제고.

강민혁은 강화 문명에서 세상을 위험에 빠트리는 몬스터 무리를 소탕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 시기가, 자신의 나이가 50이 넘어가는 머나먼 미래고 싶지는 않았다.

한시라도 빠르게.

마법사로서 당당히 나설 수 있는 위치에 오르려면, 평범한 방법으로 성장을 바라는 것은 힘들다.

그래서 시련의 탑을 경험하길 바랐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것이고, 자신이라 할지라도 통과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강민혁은 성장을 간절하게 바란다. 그리고 대마법사의 자질을 가진 사람들은 통과해내는 시련을 자신이 버텨내지 못한다면, 어차피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는 현실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시련의 탑 효과는 정신의 성장. 이쪽 세상에서 성취를 이루면, 현실에서의 나도 효과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충분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강민혁의 요구에, 아비드의 미소가 짙어졌다.

“영국에 있는 시련의 탑에는 이제껏 182명의 마법사가 도전했다. 그중 102명의 마법사는 폐인이 되어서 평생 정신병자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고, 나머지 80명의 마법사는 대마법사의 경지에 올라 마법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리스크가 크지만, 버텨만 낸다면 그 효과는 확실한 방법인 것에는 분명하지.”

최근에는 시련의 탑 출입이 금지되었다.

게이트가 발발한 이후로 시련의 탑의 힘이 강해졌고, 지원자가 있어도 출입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예외였다.

아비드의 특권은, 예외의 허용이 가능하다.

“네가 정신의 시련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지금으로부터 일주일 뒤에 시련의 탑 출입을 허용하도록 하겠다. 그러니 충분히 고민하고 다시 찾아오도록. 시련의 탑은 예전보다 그 힘이 강해졌고, 천재라고 불리던 사람들도 차원의 균열에 정신을 놓았다는 것을 명심해라.”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강민혁.

아비드는 강민혁의 태도에 확신했다.

‘일주일 뒤에도 클리스만의 선택은 달라지지 않겠지.’

강민혁.

강해지기 위해 평생을 생사(生死)의 경계선에서 살았던 그에게, 시련의 탑의 리스크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감내할 뿐.

강민혁은 일주일 뒤에, 아비드를 찾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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