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15. 마법사들의 생존 방식 >
강민혁은 수업 도중에 비상 대응 체계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비상 대응 체계란 무엇인가. 왕실 마법 아카데미 인근에 ‘게이트’가 생성될 경우, 학생들 전원을 동원해서 그에 대응하는 상황을 말한다.”
클리스만의 세상.
러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에 장벽을 세우며 몬스터와의 공존을 택했던 세상은, 게이트의 등장으로 평화로운 분위기가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는 사실상 공존이 불가능했다. 게이트를 통해서 장벽을 넘어 나타나는 몬스터들 때문에, 각 지역은 그 지역만의 대응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도 다르지 않다.
거대한 땅덩어리에 자리잡고 있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자체적으로 보호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그중 첫 번째.
“그린 드래곤은 게이트에서 나타난 몬스터가 왕실 마법 아카데미를 공격할 경우, 학생들은 지정된 위치로 가서 몬스터의 공격을 막아야 한다. 성벽 위로 올라오는 몬스터를 최우선으로 처리하며, 적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왕실 마법 아카데미를 수호하는 것이 주목적이다.”
진정한 의미의 수성전이었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하나의 요새다. 거대한 외벽으로 빙 둘러놓았기 때문에, 외벽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아카데미 안은 안전하다. 그린 드래곤은 바로 이 외벽을 지키는 대응 체계.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가장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상황이 그린 드래곤이기도 했다.
“두 번째 골드 드래곤은 비행형 몬스터의 출현을 알린다. 비행형 몬스터가 나타날 경우 외벽의 존재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그때는 대공(對空) 경계를 실시한다. 세 번째 블랙 드래곤은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아니라 인근 지역들이 공격을 당할 경우, 최소한의 수성 병력을 남기고 지원 병력을 편성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도와서 게이트가 없어질 때까지 몬스터를 완전히 소탕한다.”
그리고 마지막.
아직 한 번도 발동되지 않은 최후의 보루.
“네 번째 레드 드래곤은 최후의 항전을 뜻한다. 외벽이 무너지고 몬스터들이 아카데미 안으로 진입했을 때,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목숨을 걸고 적들과 싸운다. 후퇴란 용납되지 않는다. 왕실 마법 아카데미는 영국의 상징이고, 성역(聖域)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영국의 국민으로서 끝까지 포기해서는 안 될 의무다. 기억해라. 평화는 끝났고, 우리는 다시 몬스터들과의 싸움을 대비해야 한다.”
네 개의 대응 체계.
그중에서 다행히도 이번에 발령된 것은 그린 드래곤이었다.
지정된 위치에서의 수성.
강민혁은 빠르게 같은 반의 학생들을 따라갔다. 클리스만의 설명이 없었기에 어떤 위치에서 수성해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한 반이 같은 구역을 수성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일단 무기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아카데미의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무기를 지급했다.
“받아!”
탁.
그것은 수성전용 스태프였다.
스태프의 크키가 크고 무겁기 때문에 이동하는 상황에서는 사용이 어렵지만, 지금은 그린 드래곤 상황이다. 수성에는 그에 걸맞은 무기가 필요한 법. 스태프를 받은 학생들이 낑낑거리면서 힘겹게 자리로 이동했다. 강민혁도 마찬가지로 스태프를 받았고, 건물 밖으로 나가자 시야가 확 트였다.
그리고
“공격해!”
“인페르노(Inferno)!”
콰콰쾅!
화르르르르르륵!
전장의 소음.
전장의 냄새.
강민혁의 눈앞에, 치열한 전장의 한순간이 펼쳐졌다.
높디 높은 성벽 위 .
그 너머로 칠흑같이 어두운 게이트의 모습이 보였다.
합동 수업에서 경험했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고, 엄청난 양의 마력을 끊임없이 토해냈다. 그 안에서 나타나는 몬스터들. 그들은 분명히 B급 몬스터인 웨어 울프(Werewolf)였다.
크르르륵.
캬악!
웨어 울프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들의 숫자는 정말 많았다.
언뜻 보아도 수백 마리가 훌쩍 넘어갈 정도였고, 그들은 성벽에 도착하자마자 폭발적인 점프력을 이용해서 곧바로 성벽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날카로운 발톱을 이용해서 성벽을 빠르게 올라갔다. 검은 형체들이 일제히 밀려드는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그때였다.
성벽에 위치한 마법사들이, 일제히 마법을 사용하였다.
“인페르노.”
“파이어 월(Fire Wall).”
“플레임(Flame).”
화르르르륵.
강렬하게 타오르는 화염.
동시에 성벽 바닥에서 밝은 불빛이 일어났다.
“화염 증폭 마법진 가동!”
지휘탑.
그곳에 위치한 마법사가 버럭 소리쳤다.
붉게 일어나는 마나가 마법에 그대로 흡수되었고, 동시다발적으로 사용된 4서클 화염 마법의 위력이 증폭되었다. 그리고 작렬하는 마법! B급 웨어 울프는 5서클 마법 정도는 돼야 데미지를 받는 몬스터지만, 마법진의 버프와 상급 마법의 조합은 그들의 외피를 새까맣게 태워버렸다.
크아아아악!
웨어 울프들이 괴성을 지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바닥에 떨어진 그들의 육체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찢겨나갔지만, 웨어 울프들은 동족의 상태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정도로 웨어 울프의 숫자는 많았다. 동족의 사체를 밟고서 새로운 웨어 울프들이 성벽에 달라붙었고, 위기는 끝나기는커녕 더욱 숨통을 조여왔다.
‘이 정도의 게이트라니.’
당황스러웠다.
게이트는 생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 수백 마리에 달하는 웨어 울프를 토해낼 정도라면, 이것은 재앙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다.
강민혁이 사는 세상에도 이와 같은 게이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절대 흔한 현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수호문의 후계자인 강민혁조차도 재앙급의 게이트는 경험해보지 못했는데,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급박한 상황에도 절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익숙하다는 듯한 표정. 그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학생들의 미숙함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파이어 웨이브.”
“파이어 버스트.”
“파이어 랜스.”
화르르륵!
콰앙!
강민혁의 동급생들.
그들도 침착하게 마법을 사용했다.
차례로 순서를 맞추어 사용하는 마법에, 웨어 울프들은 일정 높이를 통과하지 못하고 모두 떨어졌다.
이질감이 들었다.
클리스만의 세상.
그쪽 세상과 자신의 세상이 얼마나 다른지, 이제야 체감이 됐다.
‘2000년 동안 몬스터의 위협을 받은 세상. 이 세상은 게이트의 수준도 우리와 다르다는 건가.’
그럴 수밖에 없다.
강민혁이 사는 세상은 게이트를 통해서 나타나는 몬스터들이 전부인 반면, 클리스만의 세상은 한국을 시작으로 해서 러시아까지가 모두 ‘몬스터 랜드’라고 명명한 죽음의 땅이다. 그곳에서 엄청난 수의 몬스터가 주기적으로 유럽의 장벽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게이트를 타고 장벽 너머를 공격한다.
2000년.
그 시간은 마법이 발전한 만큼, 몬스터들 또한 더욱 위협적으로 변했다.
쿠르르르르릉.
성벽이 흔들렸다.
무저갱(無底坑)에서 기어 나오는 악마처럼, 불이 붙은 웨어 울프들이 악착같이 성벽 위를 올랐다.
창과 방패의 대결.
성벽은 언제 뚫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한 타이밍에.
“파이어 스톰(Fire Storm).”
대마법사의 등장은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파이어 스톰.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마법이다.
그게 몇 서클의 마법인지, 또한 어떠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강민혁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사실은, 파이어 스톰이 발현되는 순간 지옥의 화마(火魔)가 세상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휘이잉.
화르르르르르륵!
강력한 바람을 동반한 화염.
화염의 폭풍이 수십 마리의 웨어 울프를 단번에 집어삼켰다. 웨어 울프의 단단하고 질긴 외피는 이번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외피가 타버렸으며, 폭풍에 휩쓸린 웨어 울프는 허공 높이 떠올랐다가 바닥에 추락해서 육체가 그대로 터져버리고 말았다.
“빈 로즈(Vin Rose)님이다."
“드디어 오셨구나.”
빈 로즈.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자랑하는 대마법사 중 한 명.
7서클의 경지에 오른 그는, 파이어 스톰으로도 모자란 모양인지 다시 한번 7서클 마법을 사용하였다.
“어스퀘이크(Earth Quake)."
쿠쿠쿠쿵.
콰콰쾅!
땅이 뒤집어졌다.
땅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웨어 울프들을 집어삼켰고, 바닥에서 튀어나오는 가시 바위들이 웨어 울프의 육체를 찢어발겼다. 단 두 번의 마법. 빈 로즈가 사용한 마법에 수백에 달하는 웨어 울프들이 학살을 당했다. 지상에 있는 웨어 울프들은, 빈 로즈의 마법에서 무사할 방법이 없었다.
'..........'
강민혁은 그 모습에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7서클.
그건 ‘수호문’이라는 넓은 세상에서 살았던 강민혁에게도 충격적인 위력이었다. 세상에 저런 마법이 있다니. 2000년의 마법 문명이 새로운 경지의 마법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대마법사의 위력은 강민혁을 충격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만약 자신이 사는 세상에서도 저런 위력의 마법이 있었다면, 마법사는 절대 비주류의 대우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강민혁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었다.
클리스만의 서클은 겨우 한 개의 고리만이 생성되어 있었기에, 강민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마법사의 등장.
그로 인해 상황이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때, 날카로운 소리가 모두의 귀를 파고들었다.
캬아악!
캬우우우우우우우!
“제길!”
"....설마."
학생들도 당황하는 눈치였다.
게이트 바깥.
거대한 형체의 웨어 울프가 등장하였다. 사자처럼 자라난 거친 갈기에 사람 팔뚝만 한 거대한 발톱. 그는 등급 외, 에픽(epic) 몬스터인 웨어 울프 로드였다. 웨어 울프들의 왕. 그가 등장하자 웨어 울프들이 일제히 하울링을 토해냈다. 거대한 울음이,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울려 퍼졌다.
캬우우우우!
캬우우우!
상황이 반전되었다.
로드의 등장은 웨어 울프들을 강하게 만든다.
로드의 고유 특성으로 인해 몇몇 웨어 울프들이 A등급으로 상향되었고, 그들이 성벽으로 달려들었다.
에픽 몬스터.
그들의 위력은, 전장의 판도를 바꾼다.
“파이어 캐논(Fire Cannon)."
콰앙!
화르르륵.
마법이 먹히지 않았다.
적중당하기 직전 A급의 웨어 울프들이 몸을 날렸고, B급과는 다르게 정말 빠른 속도로 성벽을 탔다. 마법이 계속해서 작렬했다. 성벽 위에 있는 마법사들은 웨어 울프들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타이밍을 맞추어서 마법을 사용했지만, 그것만으로는 A급 웨어 울프를 모두 처리할 수 없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강민혁이 위치한 구역에도, 웨어 울프 한 마리가 거의 성벽을 올라오기 직전이었다.
‘나도 싸워야 한다.’
꽈악.
손에 잡힌 스태프의 감촉이 묵직하다.
하지만 이런 무기로는 싸울 수 없다.
겨우 1개의 서클을 가지고 있는 이 몸뚱이로, 웨어 울프를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저거다.’
예비용으로 준비되어있는 검.
강민혁은 한편에 진열되어있는 검을 하나 뽑았다.
그리고 그때.
확!
캬아아아아악!
A급 웨어 울프.
그 강력한 괴물이, 성벽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