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49화 (49/197)

49화.  < 14. 뒤바뀐 재능 >

책상 위.

덩그러니 놓여있는 한 권의 책에, 강민혁은 의자에 앉아 책장을 펼쳤다.

[수호문의 심법. 그걸 앞에 두고 한참 동안 고민했다. 이 수호문의 심법이라는 것이, 마법에 재능이 없는 내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줄까. 만약 이번에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나는 자괴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에 대한 가능성은 이미 체념한 사실. 괜한 기대감에 내 감정이 휘둘리기는 싫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이상 나는 수호문의 심법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익숙한 필체.

클리스만의 글이었다.

강민혁이 본래의 세상에 돌아가 있는 동안, 그는 본인의 행적을 일기의 형태로 기록해두었다.

[1일 차. 수호문의 심법을 사용했다. 심법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는 알겠으나, 아직은 마나가 내 의지대로 따라주지 않는다.]

심법의 기본.

마나를 움직이고, 마나로 육체를 단련하며, 마지막에는 일부의 마나를 단전(丹田)에 축적한다.

보통 이러한 과정에 적응하는 데 사람들은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마나라는 무형의 힘을 느끼고 움직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그것을 원하는 위치에 축적하려면 고난이도의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민혁은 클리스만에게 방향을 제시하되, 바로 성과를 얻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3일 차. 마나가 내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호문의 심법은 마나 명상과 비슷하면서도 모든 것이 다르다. 마나 명상은 마나를 심장 주변에 형성해서, 마법의 기반이 되는 서클을 단련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수호문의 심법은 ‘인간의 육체’ 그 자체를 단련시키고 있었다.]

‘벌써 심법을 운용한다고?’

놀랐다.

수호문 제일의 천재라고 불리는 이준호조차도, 심법에 완전히 적응하는 데 1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그에 반해 강민혁은 남들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었는데, 클리스만은 겨우 3일 만에 심법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나 명상과 출발점이 비슷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클리스만의 재능이 범상치 않기 때문인 걸까. 복잡해지는 머릿속을 가라앉히며, 강민혁은 다음 책장을 넘겼다.

[10일 차. 내 육체가 변하고 있다. 피부가 예전과는 다르게 단단해지고, 전신에서 힘이 넘친다. 스피드는 빨라졌으며, 시력이 떨어졌던 내 눈도 점차 회복되고 있는 것 같았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수호문의 심법은 내가 사는 세상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잠깐.’

육체 강화.

클리스만이 겪고 있는 현상은 강민혁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다.

굳이 심법이 아니라 할지라도, 강화액을 주입한 강화 전사들이 모두 경험하는 현상. 이를 인간에서 초인의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이라 말한다. 그런데 강민혁이 당황한 이유는 클리스만이 강화액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보통은 인체에 주입한 강화액을 통해서 육체를 강화시키는데, 클리스만은 어떠한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육체를 강화시키고 있었다.

문득,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말이 떠올랐다.

“수호문의 심법은 강화 문명 이전, 아주 오랜 역사로부터 비롯된 가문의 비기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강화액이라는 특수한 방법을 통해서 모두가 수호문의 심법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으나, 과거만 하더라도 수호문의 심법은 소수의 선택 받은 자들에게만 부여되는 특권이었다.”

특권.

그것은 재능을 말한다.

강화액이 아니라 할지라도, 심법으로 마나를 느끼는 축적하는 부류.

클리스만의 현상은 정확히 그에 부합했다.

‘설마.’

[20일 차. 이제는 확신이 생겼다. 수호문의 심법을 통해서 나는 강해지고 있다. 아직은 걸음마도 떼지 못한 수준이지만, 이것이 내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예전에만 하더라도 나는 이 세상의 힘은 마법이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검을 들고 몬스터와 싸우던 그 시절, 로브를 펄럭이며 마법을 사용하는 선택받은 자들의 모습은 내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게도 새로운 길이 생겼다. 나는 수호문의 심법을 통해 강해질 것이고, 심연(深滿)의 악마들을 모조리 몰살할 것이다.]

클리스만이 변하고 있었다.

강민혁에게 온전히 기대던 그가, 본인이 변화하길 바랐다.

그리고 마지막 장.

클리스만은 ‘강민혁’에게 말을 걸었다.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부탁.

조언자였던 클리스만이 태도를 바꾸었다.

[나는 내가 강해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보지 못했다. 태생의 한계란 그러했고,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네가 가진 힘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강해질 수만 있다면 나의 육체를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 부탁한다. 진심으로 너에게 간청한다. 내가 너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주었던 것처럼, 너도 나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기를.]

일기가 끝났다.

탁.

책장을 덮은 강민혁의 표정은, 처음과는 다르게 복잡한 감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클리스만.

그와의 관계는 참 복잡하다.

강민혁은 그를 은인이라 생각하지만, 그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일방적인 링크(link)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선뜻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었다.

수호문의 심법.

그건 그간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러나 직접 나서서 클리스만의 몸을 단련시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자신은 한때 수호문의 후계자였던 사람이고, 자신의 단련법은 모두 수호문으로부터 비롯된다. 그 말인즉, 이 결정으로 인해 수호문의 비기가 모두 클리스만에게 흘러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을 생각이라면 클리스만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클리스만을 도와줄 생각이라면, 머릿속에 있는 수호문의 비기를 모두 토해낼 결단이 필요하다.

고민했다.

수호문의 비기.

그건 강민혁의 것이 아니다.

수호문의 조상들이 피땀 흘려 일구어낸 것이고, 강민혁이 멋대로 사용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수호문의 가르침은 항상 대의를 위한다고 했어.’

대의.

수호문의 이름이 그리 명명된 이유는, 수호(守護) 그 자체의 단어적인 의미가 반영된 것이 컸다.

게이트라는 재앙이 처음 나타났던 그 시절.

수호문의 조상들은 수호문의 힘으로 세상을 지켜내길 바랐다. 그래서 수호문의 비기는 모두 지키는 것에 특화되었고, 사람들은 수호문을 어느 순간부터 한국의 희망이라고도 불렀다. 만약 수호문의 조상들이었다면, 몬스터에게 가족을 모두 잃어버린 클리스만을 외면했을까.

아니다.

애초에 수호문의 비기는 비밀이 아니다.

거대한 세력으로 변하며 폐쇄적인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 시작은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었다.

힘을 원한다면.

이 세상을 지키고 싶다면.

수호문의 조상들은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지금도 같다.

강민혁은 힘을 간절하게 바라는 클리스만을 외면할 이유가, 아니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클리스만.”

일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어떤 삶은 살았을까.

평범한 시민에 불과했던 그가, 어떤 세월을 겪었기에 지금 이렇게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일까.

강민혁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절망으로 가득했던 자신의 인생이 변했듯이, 그의 인생에도 한 줄기의 빛이 비추어지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옳을 일을 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아니, 정확히는 네가 몬스터들을 상대로 표출하는 적의(敵意)를 믿는다. 내가 너에게 수호문의 힘을 주면, 너의 힘은 온전히 몬스터들에게 표출될 테니까 말이야. 그래, 도와주지. 내가 너를 강해지도록 도와주겠다.”

책을 펼쳤다.

그리고 클리스만의 글이 끝난 그 지점에, 강민혁이 이어서 글을 썼다.

[너의 부탁을 받아들이겠다. 그러니, 앞으로 너에게 생길 변화에 적응해야 할 거야.]

강민혁과 클리스만.

둘의 관계가, 완벽하게 서로를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강민혁은 일단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앞으로 클리스만의 몸을 단련시키기 위해서는, 현재의 몸 상태가 어떤지 직접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다.

“후우."

숨을 깊게 내쉬었다.

혈관에 흐르는 피와 마나가 강민혁의 의지에 반응하며, 내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 달 전과는 많이 달랐다.

클리스만은 그간 심법을 열심히 운용한 모양인지, 신체 구석구석에 마나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물론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아직 심법이 능숙하지 못해서 마나로 인한 육체의 불균형이 일어난 상태였지만, 그 정도는 강민혁의 심법 한 번에 모두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일단 내부를 안정시키고.’

마나를 움직였다.

단전으로부터 비롯되는 마나를 혈관으로 유도하며, 신체 구석구석의 상태를 모두 재정비하였다.

단전의 마나.

그 힘은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을 말한다.

그리고 전신에 퍼져 있는 마나는 신체의 강화 상태를 유지 시켜주며, 일순간적으로 단전의 힘을 끌어올렸을 때 해당 부위에 있는 마나가 물리적인 위력을 증폭시킨다. 그래서 모든 마나를 단전에 축적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적절하게 전신에 마나를 퍼트려야만, 단전의 힘을 완벽하게 활용할 수 있다. 강민혁은 그러한 기초적인 단계를 다시 다잡고 있는 것이다.

정비가 끝나고.

강민혁은 심법을 본격적으로 운용했다.

정말 강화액이 없어도 마나를 축적할 수 있는지, 그 사실을 확인해야만 했다.

화악.

마나가 일었다.

자연의 마나가 피부에 예민한 자극을 주었고, 활짝 열린 모공을 통해서 일말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마나야.’

마나.

분명했다.

자연의 마나가 심법의 의도에 따라 흡수되고 있었다.

그 양은 많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인간의 힘으로 마나를 흡수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정말이었어. 클리스만은 수호문의 심법이 말한 재능을 타고 났어.’

경악스러웠다.

자신이 수호문의 후계자 자리를 포기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심법의 재능을 조금도 타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열등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마나가 반응하지 않았고, 때문에 수호문의 비기를 대부분 사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법을 익힐 당시에 기쁘면서도 복잡한 감정이 들었었다. 강민혁의 단전은 마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강민혁의 서클은 황당할 정도로 마나를 힘껏 빨아들였으니 말이다.

심법을 끝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티끌만 한 양의 마나가 늘었다는 사실에 강민혁은 허탈하게 웃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구나.”

강민혁.

클리스만.

강민혁은 강화 문명에서 살며, 평생 검을 위해 살았다.

그리고 클리스만은 마법 문명에서 살며, 2000년의 마법역사를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다.

서로 필요한 재능이 있다.

그런데 강민혁은 마법에, 클리스만은 검술에 재능을 타고 났다.

뒤바뀐 재능이라니.

정말 황당한 사실이었고, 강민혁은 이것이 신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서로 연결된 것은 결국 운명이었던 걸까.”

그렇게밖에 생각되질 않았다.

다른 차원.

서로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이, 서로에게 필요한 보완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건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극적인 미스터리는, 운명이라는 단어 하나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었다.

‘어쩌면 클리스만의 몸으로는 수호문이 말하는 궁극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때였다.

문득, 강민혁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마나 룸에서 수호문의 심법을 사용하면 어떻게 되지?”

마나가 척박한 세상.

이 세상에서도, 클리스만의 몸은 스스로 자연의 마나를 끌어들였다.

그런데 자연의 마나가 충만한 마나 룸에서 심법을 사용하면, 과연 클리스만의 몸은 어떻게 반응할까.

‘내가 살던 세상에서 10년은 걸려야 이루어낼 성취를, 겨우 1년 안에 이룰 수 있을지도 몰라.’

하나의 가능성.

그 가능성이 만들어낼 미래에, 강민혁은 순간 몸에서 소름이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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