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9. 변화(2)
“끄으으·········.”
제임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흘러내리는 코피를 손으로 막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는 피는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정적.
지켜보던 학생들의 머릿속이 굳었다.
항상 조용했던 클리스만의 변화는,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때였다.
탁!
“이런 씨발!”
“제임스!”
소식을 듣고 다른 반에서 제임스의 친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피를 흘리는 제임스와 그를 내려다보는 클리스만. 상황 설명이 굳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떤 전후 사정이 있었든 간에, 제임스의 친구들인 그들로서는 클리스만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개자식이.”
화악-
마나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캐스팅에 들어간 그들의 모습에, 강민혁이 곧바로 땅을 박찼다.
타닥.
책상을 넘어섰다.
몸을 날려 공격하려는 강민혁의 모습에, 2명으로 이루어진 제임스의 친구들이 양쪽으로 피했다.
“무식한 새끼.”
그중 한 명.
각진 얼굴의 사내가 움직이면서 캐스팅을 이어나갔다. 그건 강민혁의 세상에서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보통 캐스팅 도중에 움직이면 마나가 전부 흩어지는데, 그의 마나는 안정적인 체계를 이루었다.
‘무빙 캐스팅?’
순식간에 완성되는 마법.
그들의 캐스팅 속도는,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라이트닝 볼트.”
치지직!
1서클 전기 계열 마법.
강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불빛이, 그대로 강민혁을 덮쳤다.
툭.
파파팍!
하지만 상대가 의도한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강민혁은 간발의 차이로 발로 책상을 위로 띄웠고, 그것을 내던짐으로써 라이트닝 볼트를 앞에서 막았다. 아직 상대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반대편으로 도망친 노랑머리의 사내가 캐스팅을 끝내는 순간, 강민혁의 몸이 사라졌다.
확!
퍽!
“크악!”
의자가 노랑머리에게 작렬했다.
동시에 강민혁은 노랑머리에게 달려들면서, 옆에 있던 연필을 다량으로 쥐어 각진 얼굴의 사내에게 뿌렸다.
확!
“흐읍.”
각진 얼굴의 사내가 당황했다. 연필 공격은 상당히 절묘했다. 마나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해서 캐스팅을 무산시켰고, 그 과정에서 마나의 역류(逆流) 현상이 일어났다. 파랗게 질리는 각진 얼굴의 사내. 그 순간, 허공에 떠오른 강민혁이 그대로 노랑머리의 가슴팍을 찼다.
퍽!
콰당!
노랑머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리고 확실히 마무리하기 위해, 강민혁은 상대가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얼굴을 걷어차 버렸다.
퍼억!
“끄르르륵.”
피가 튀었다.
강민혁의 손속은 잔인했다.
상대에게서 살의(殺意)를 느낀 순간, 강민혁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생사가 걸린 싸움에서 자비란 오만함에서 비롯되는 멍청한 행동이다.’
아버지가 누누이 강조했던 부분이다.
이제 마지막.
각진 얼굴의 사내만이 남았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 몸을 벌벌 떨었다. 캐스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마나의 역류 현상 때문에 마나도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 모습을 보며 강민혁은 피식, 웃었다. 강민혁의 세상에서 마법사가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 활용성을 떠나 강화 전사들에게 너무나도 만만한 먹잇감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쪽 세상의 마법사들은 괜찮았다.
움직이면서도 마법을 사용하고, 마법의 캐스팅 속도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빨랐다.
하지만.
‘내 상대는 아니야.’
강민혁.
수호문의 후계자.
전투의 스페셜리스트(specialist)라고도 불렸던 강민혁에게, 제임스 일행은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걸 상대도 알았다.
강민혁이 다가오는 모습에, 각진 얼굴의 사내는 마법을 취소하더니 황급히 태도를 바꾸었다.
“미, 미안해.”
눈물과 콧물을 흘렸다.
바닥에서 고통에 신음하는 제임스와 노랑머리의 모습을 보니, 감히 대항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용서를 구했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면, 강민혁이 그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민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시작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시작한 이상 확실히 끝맺음을 해야만 한다.
꽈악!
“으악!”
강민혁의 손길이 각진 얼굴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머리가 뜯겨나갈 것 같은 통증에 비명을 지르는 그의 모습에, 강민혁은 그대로 뺨을 날리려고 했다.
그때였다.
“그만!”
“클리스만, 당장 멈춰!”
헐레벌떡 교실로 들어오는 사람들.
그들이 교수진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강민혁은, 다시 각진 얼굴의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던 것만 마무리하겠습니다.”
빠악!
“컥!”
홱 돌아가는 각진 얼굴의 고개.
마지막 상대까지 마무리하고서야, 강민혁은 뒤로 물러나는 것으로 전투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제임스의 얼굴은 처음과 달랐다.
코가 붉게 부풀어 오른 그는, 벤자민 우드(Benjamin Wood) 교수를 바라보며 화난 어조로 말했다.
“제 얼굴을 보세요. 일방적으로 맞았다니까요? 어디서 근본도 없는 녀석이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들어와서는, 이 제임스 체스터의 얼굴에 상처를 남겼어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면 아버지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무조건, 무조건 징계를 해주세요.”
체스터 가문.
영국의 마법 명가(名家)인 그들은,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서도 특별 관리를 받는 대상이다.
그들의 기부금만으로 호화스러운 건물을 올렸다는 소문이 돌 정도이니, 벤자민으로서는 제임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클리스만.”
“예.”
“제임스를 때린 이유가 뭐지?”
돌아가는 분위기가 보였다.
명문자제들의 말에, 벤자민은 이미 답이 정해진 것으로 보였다.
‘어딜 가나 인간은 똑같구나.’
계급 사회.
상류층에 해당하는 제임스를 건드린 일은, 쥐뿔도 없는 클리스만에게는 그 자체로도 중범죄일 것이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먼저 저를 때리려고 한 사람은 제임스입니다. 교수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게 원하는 대답이 있다면, 대답을 유도하지 마시고 그냥 솔직하지 말하십시오.”
“클리스만!”
벤자민의 눈썹이 홱 올라갔다.
그러나 강민혁은, 그의 살벌한 기세에도 눈빛을 죽이지 않았다.
화가 났다.
클리스만.
대단한 능력을 가진 그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임스 일행에게 대항했다. 자신의 행동이 클리스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클리스만이 자신을 위해서 희생하는 모습을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옳은 일을 행하는 것. 적어도 강민혁이 살아왔던 삶에서는, 가만히 당하고만 있으라는 가르침은 인생 그 어디에도 없었다.
벤자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적당히 호통을 치면 클리스만이 움츠러들 거라 생각했는데,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이게 클리스만이라고?’
소심하고 조용한 학생.
그게 클리스만에 대한 기억이었는데, 이런 호전적인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혼자서 3서클 마법사 3명을 제압하다니.’
사실 아직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학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막 날아다니면서 제임스 일행을 쓰러트렸다고는 하는데, 말이야 쉽지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3서클 마법사 세 명. 그들의 능력이라면 근접하기도 전에 상대를 쓰러트려야 맞는 일이지 않은가. 의문투성이인 사건이었지만, 그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체스터 가문을 건드리다니. 멍청한 녀석.’
이곳은 계급 사회다.
쥐뿔도 없는 클리스만을 보호해줄 만큼, 벤자민은 욕망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반성하는 기미가 없다면 징계위원회를 건의하는 수밖에.”
이때만 하더라도 문제는 악화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1시간 뒤.
다시 학생들을 불어들인 벤자민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제임스가 그간 클리스만을 괴롭혔다는 정황이 있어서, 클리스만의 행동은 정당방위로 끝내는 것으로 말이야. 그러니·········.”
“교수님!”
제임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연히 잘 해결될 줄 알았는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제가 맞았는데 이번 일을 이렇게 끝낸다고요? 진심이세요? 저 제임스 체스터에요. 체스터 가문의 장남이 다쳤는데, 제 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 뒷감당을 하실 수 있겠어요?”
위협이었다.
겨우 교수 주제에, 이번 일을 묻으려 하냐는 위협.
그런데 벤자민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제임스의 비위를 맞추던 그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위에서 결정된 사안이야. 아버지의 힘을 동원하려거든 그렇게 해. 이번 일은 내가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상황은 종료되었다.
강민혁도 어떻게 문제가 해결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교무실을 나온 뒤에 제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경고하는데, 다음에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아. 날 건드리려거든, 네 목숨을 걸 생각을 하고 달려들어. 네 가문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또 다시 이러면 네 목에 연필을 쑤셔버릴 생각이니까.”
제임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클리스만에게 일방적으로 맞았고, 가문의 힘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만 자리를 떠나는 클리스만의 모습에, 제임스는 볼을 꼬집음으로써 이게 현실인지를 확인했다.
이번 사건은 의문투성이였다.
첫 번째로는 클리스만은 어째서 능력을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두 번째로는 정황상 제임스의 가문은 대단한 명가일 텐데, 왜 아무런 징계도 없는 것일까.
상황의 전개가 상식적이지 않았다.
벤자민의 반응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는 클리스만의 진짜 능력을 모르기에, 처음에만 해도 클리스만을 죄인으로 몰면서 당장에라도 징계를 내릴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1시간 뒤에 태도가 바뀌었다. 그 말인즉 왕실 마법 아카데미가 체스터 가문을 대신해서 클리스만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인데, 이게 말이 되질 않는다.
체스터.
누구나 알 정도로 명문 가문에,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주기적으로 기부를 한다.
배경도 없는 클리스만을 감싸줄 만큼, 체스터 가문의 힘이 아카데미 내에서 약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동급생들을 통해 알아보았다.
혹시 강민혁이 모르는, 클리스만의 특별한 배경이 있는지 말이다.
‘클리스만은 아무런 배경이 없는 것이 확실해. 사실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 마법에 재능이 없는 클리스만이, 배경이 없고서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입학할 방법은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배경이 있다는 것일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체스터 가문조차 어떻게 할 수 없는 배경이?’
그건 추측이었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클리스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상황을 속 시원히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배경이 대단하다면.
클리스만은 동급생들에게 무시를 당하면서 지낼 이유가 전혀 없다.
결국 의문을 해소하지 못했다.
하지만 강민혁으로서는, 이번 사건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클리스만은 육체적인 능력에 재능이 있어.’
제임스 일행과의 싸움.
그때 느꼈다.
강민혁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육체 반응에, 어쩌면 클리스만은 다른 곳에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멍에서 통증이 올라왔다.
묵묵히 괴롭힘을 당했을 클리스만을 떠올리니, 강민혁은 마음이 아팠다.
“클리스만.”
강민혁은 그를 모른다.
일기에 적힌 글 정도로는, 클리스만이 살아온 삶과 그라는 사람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를 남처럼 생각하진 않는다.
그가 자신을 구원해준 것처럼, 강민혁 또한 클리스만을 구원하길 바란다.
“이게 너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노트를 하나 폈다.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공간에, 강민혁은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인생이 변한 것처럼, 네 인생도 변했으면 좋겠어.”
[수호문의 마나 심법]
아마 이번 빙의는 조금 길어질 것 같았다.
수호문의 심법은 매우 복잡하기에, 글로써 풀어내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