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에 2000년 마법역사-34화 (34/197)

34화.  9. 변화

허름한 실내 인테리어.

칙칙한 벽지.

이전에 경험했었던 여관방이라는 사실에, 강민혁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크윽.”

전신에서 밀려오는 통증에 강민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전에는 없었던 현상이다. 클리스만의 몸에 빙의할 때 시야가 흐릿해지는 증상은 있었지만, 육체적인 통증은 전혀 없었다.

혹시 빙의의 부작용인 것일까?

아니다.

부작용이라기엔, 매우 익숙한 형태의 통증이었다.

‘이건 타박상인 것 같은데.’

강민혁은 육체에 관해서 해박하다. 안에 장기가 손상되어 통증이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타박상으로 인해 생겨난 통증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타박상이라면 몸에 상처가 있을 터. 강민혁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가서 거울의 모습을 확인했다.

수척한 얼굴.

갈색의 더벅머리 아래로, 짙은 인상의 낯선 얼굴이 있었다.

클리스만.

생각해보니 그의 얼굴을 직접 확인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역시.’

옷을 걷어보니 예상대로 타박상이 있었다. 몸 곳곳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멍이 든 부위에서 통증이 일어났다. 이러한 형태의 멍은 분명히 ‘구타’로부터 비롯된 것이 확실하다. 본인이 자해로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의 상처는 아니니, 타인이 이렇게 만들었다는 의미일 터.

강민혁은 손을 확인했다.

구타에 대항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몸에 이렇게 멍이 들 정도로 맞았는데, 클리스만은 제대로 된 반항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해가 되질 않았다.

클리스만은 평범한 인물이 아니다.

2000년의 마법 문명이 꽃을 피운 이 세상에서도, 클리스만의 지식은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가 원한다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고, 수많은 세력들이 클리스만을 이런 허름한 방에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클리스만은 그러지 않았다. 세상에 자신의 지식을 공개하지 않았으며, 같은 아카데미 친구들에게 매일 무시를 당했다. 그리고 누구에게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구타의 흔적까지 보였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일부만 공개해도 삶이 완전히 달라질 텐데, 클리스만은 본인의 안위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클리스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화장실을 나왔다.

혹시라도 클리스만의 메시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방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사실 확인할 것도 없었다.

미니멀리즘(minimalism) 인테리어라고 우기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단출한 방 구조에는, 눈에 보이는 게 전부였다. 방금 일어나서 흐트러진 이부자리와 책상에 놓여 있는 한 권의 책.

그게 끝이었다.

그리고 책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었다.

[3서클 마법서]

최상급 3서클 마법.

클리스만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강민혁에게 가장 필요한 ‘지식’을 넘겨줄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창밖으로 해가 떠오르는 상황에, 강민혁은 이만 마법서를 덮었다.

‘하루만으로는 시간이 부족해.’

3서클.

서클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강민혁이 기억해야 할 지식의 체계도 매우 복잡해졌다.

그리고 해당 마법을 활용하는 여러 갈래도 제시하다 보니, 하루 만에 통째로 외우는 것이 힘들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조급해지지는 않았다. 빙의는 시간을 하루로 제한하지 않는다. 그간 두 세계를 오가는 과정에서, 강민혁은 클리스만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몇 가지의 규칙을 알아낼 수 있었다.

[1. 한 달에 한 번, 클리스만의 몸에 빙의한다.]

이건 메시지를 통해 전달받은 사실.

[2. 클리스만이 제시한 목표(지식의 습득)를 달성하기 전에는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는다.]

강민혁이 본래의 세계로 복귀할 때는 특정 조건을 만족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지식의 습득이었다.

클리스만의 몸에 빙의되었을 때는 항상 습득해야만 하는 지식이 있었고, 강민혁은 그것을 만족할 만큼 습득하였을 때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복귀의 조건을 유추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3. 두 세계는 평행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형성되어 있는 시간대가 다르다.]

시간의 흐름이 달랐다.

클리스만의 세계에서 하루의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강민혁의 세상도 동일한 시간이 지나가진 않았다.

사실 그것이 가장 걱정이었다.

자신이 클리스만의 몸에 빙의되어있는 동안, 강민혁의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런데 항상 강민혁은 적절한 시간대에 눈을 떴다. 아침이 밝아 등교할 때나, 교수들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질 때.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강민혁은 자연스럽게 현실로 복귀했다.

그래서 하루 이상의 시간이 걸리는 지금의 상황에서, 강민혁은 크게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하루로 부족하면 이틀.

이틀로도 부족하면 삼일을 공부하면 된다.

완벽하게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주목적이지, 조급하게 매달릴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아카데미에 나가야겠지.’

아침이다.

클리스만의 삶도 있을 테니, 강민혁은 간단하게 짐을 챙기고는 여관을 나섰다.

아카데미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하고 호화스러운 궁전이, 바로 클리스만이 다니는 왕실 마법 아카데미였다.

과연 최고의 교육 기관이라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외관만 보더라도, 클리스만의 세상에서 왕실 마법 아카데미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클리스만의 교실이·········.’

기억을 더듬어 자리를 찾았다.

그래도 그간 지내온 시간이 있어서 크게 어렵지 않았고, 강민혁은 곧 익숙한 공간을 찾았다.

아침이라 그런지 안에는 학생들이 없었다.

강민혁은 자신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 앉았고, 3서클 마법서를 펼쳐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쇼크 웨이브(Shock Wave)]

‘현실에는 없는 마법이야.’

3서클 전기 계열 마법.

마법서의 설명대로라면, 쇼크 웨이브를 사용할 경우 강력한 충격파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 마법이 재밌는 부분은, 상대의 몸에 직접적으로 사용할 때 발경(發勁)의 효과가 발휘된다는 것이다.

육체 안.

내부의 타격.

아무리 강화 전사라 할지라도, 장기를 공격하는 쇼크 웨이브에는 버텨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근접전에서 직접적으로 타격하는 과정이 힘들겠지만, 만약 이 마법을 성공시킬 수만 있다면 강화 전사라 할지라도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어.’

강화 전사.

그들의 단단한 피부는 마법사의 천적이다.

3서클 마법부터 그들을 상대할 실마리를 찾은 상황에, 강민혁은 3서클 마법서에 푹 빠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다른 학생들이 등교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강민혁에게 중요한 것은 일단 3서클 마법의 습득이었다.

그때였다.

3서클 마법서를 절반 정도 읽었을 때, 낯선 손이 불쑥 시야에 나타났다.

확!

“·········?!”

마법서가 사라졌다.

느닷없이 마법서를 채간 사내는, 고개를 홱 도는 강민혁의 모습에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보였다.

“오호, 뭘 그렇게 열심히 읽나 했더니 겨우 하급 3서클 마법서였어?”

강민혁은 자리를 박차 마법서를 빼앗으려고 했다.

그런데 상대가 하는 말에, 몸이 흠칫 굳어졌다.

‘하급 3서클 마법서라고?’

아니다.

자신이 읽고 있던 것은 최상급 3서클 마법서였다.

그런데 사내의 반응으로 보아, 자신이 읽는 것과 전혀 다른 내용을 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마법서의 내용을 나만 볼 수 있다는 건가.’

클리스만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혹시라도 분실, 강탈을 당할 위험을 대비해서, 마법서에 이런저런 장치를 해두었다.

마법서를 모두 읽으면 안의 내용이 사라지는 것또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그의  안배였다.

강민혁이 말했다.

“내놔.”

차가운 음성.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사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새끼가 정신을 못 차렸네. 뭐 내놔? 너 미쳤냐?”

그때, 강민혁은 확신했다.

‘이 녀석이다.’

클리스만의 몸에 생긴 멍.

그것의 가해자가, 자신을 적의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저 녀석이라고 말이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저러네.”

“제임스가 발동이 걸렸으니, 한동안은 시끄럽겠네.”

제임스 체스터(James Chester).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로, 상대의 이름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너구나.”

강민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클리스만과 제임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강민혁은 클리스만의 문제를 방관할 수 없었다.

적어도 어떤 전후 사정이 있었든 간에, 클리스만의 몸에 멍이 생긴 일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다.

“하.”

제임스가 황당하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적의가 넘실거리는 눈빛으로 강민혁을 내려다보며, 당장이라도 한 대 날릴 기세로 말했다.

“어제는 가만히 맞기만 하더니, 오늘은 생각이 달라졌나 보네?”

예상은 맞았다.

제임스는 가해자였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실 항상 의문이었어. 대단한 집안을 등에 업은 것도 아니고, 마법사로서의 재능도 없는 네가 대체 어떻게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는지를. 그래서 학기 초반에는 네게 숨겨진 배경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조사를 해봐도 너에게서 특별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어.”

그는 선민의식(選民意識)에 찌든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도 모르는 클리스만이 왕실 마법 아카데미에 계속 다니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녀석들은 대부분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어. 대단한 배경을 타고 났거나, 아니며 마법적으로 재능이 뛰어난 녀석들뿐이지. 그런데 넌 대체 뭐야? 어디서 굴러먹은지도 모르는 버러지 같은 새끼가, 우리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수업을 받는 것을 나는 용납할 수 없어.”

눈썹이 홱 올라갔다.

위협적으로 다가가더니, 분노를 토해냈다.

“알겠어, 이 버러지 새끼야? 이제부터 이 제임스 체스터가, 네게 지옥 같은 학교 생활을 선사해줄 거야.”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제임스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런데.

훅!

“·········?!”

간발의 차이로 강민혁이 주먹을 피했다.

제임스가 놀라서 눈이 커다래지는 순간, 강한 충격이 그의 복부를 때렸다.

퍽! 콰다당!

“크윽.”

복부를 얻어맞은 제임스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제임스는 고통을 느낄 겨를도 없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이 개새끼가.”

확!

마나가 흩뿌려졌다.

곧바로 캐스팅에 들어가는 그의 모습에, 강민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속이 뒤틀렸다.

어딜가나 항상 이런 녀석들이 있다.

본인만의 세상에 갇혀서, 본인의 기준에 어긋난다 싶으면 아무런 이유 없이 해를 가하는 녀석들.

‘쓰레기 새끼.’

정상훈과의 대결.

그는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그와의 대결은 상당히 신사적인 것이었다.

만약 강민혁이 정말 ‘승리’를 목적으로 했다면, 그는 1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확!

책상에 있던 연필.

그것을 잡아, 정확히 마나의 시작점에 던졌다.

캐스팅.

그 과정에서 물리적인 충격을 받을 경우, 마법사는 강한 충격을 받는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제임스는, 순간 일부의 마나를 컨트롤 하더니 연필을 막아냈다.

“어딜!”

팍!

연필이 튕겨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캐스팅을 마무리하려는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던 강민혁이 불쑥 그의 앞에 나타났다.

퍽!

“커억!”

그대로 작렬하는 니킥.

제임스의 얼굴에서 피가 튀어 오르며, 그의 몸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콰당!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

쓰러진 제임스의 뒤로, 경악한 학생들의 시선이 강민혁에게 꽂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