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2. 클리스만의 일기
처음 눈에 보인 광경은 굉장히 허름한 실내 인테리어였다.
한 명만 간신히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싱글 사이즈 침대와 책상 하나.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휑한 공간에, 강민혁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낯설었다.
처음도 그랬지만, 머릿속은 새하얀 백지처럼 현재 상황에 대한 조금의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분명히 수업 도중에 쓰러졌는데.’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앨버트 교수에게 끌려가서 한바탕 혼난 뒤에, 강민혁은 초등 교과서를 확인하다가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은 여관방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일어났으니, 클리스만이라는 사람은 자신이 현실 세계로 돌아가 있는 동안 건강하게 살아서 움직였다는 가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일시적인 빙의(憑依)였을까.
시원하게 해소되지 않는 의문에, 강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찬찬히 방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일기인가?’
책상 위.
그곳에 일기로 추정되는 노트가 덩그러니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일기를 확인해야만 했고, 강민혁은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펼쳤다.
사락.
[2030년 12월 25일, 내가 살던 괴를리츠(Gorlitzer)에 의문의 현상이 발생했다. 몬스터 랜드에서 서식하던 몬스터들이 ‘게이트’라고 명명한 공간을 통해서 나타났고, 전혀 대비하지 못한 재앙은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내 가족. 나의 아버지는 나를 지키려다가 몬스터의 날카로운 발톱에 갈기갈기 찢겨나갔으며, 어머니는 동생과 같이 몬스터의 거대한 발에 흐물흐물하게 익어버린 복숭아처럼 터져버렸다. 나는 그때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크리스마스라는 축제에 사람들이 기쁨을 나누는 동안, 내 인생은 25일을 기점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그래서 일기를 쓴다. 그때의 기억을, 그때의 아픔을 평생 두고두고 기억하기 위해서.]
“·········이 세상도 똑같구나.”
몬스터에 의한 재앙.
강민혁도 겪었던 일이다.
클리스만도 그러한 일을 똑같이 겪었다는 사실에, 강민혁은 먹먹한 기분을 억누르며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2031년 8월 2일, 재앙을 겪은 이후로 나는 완전히 폐인이 되었다. 도저히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몬스터들이 건재하게 살아있는데, 나 혼자 몰락하는 것이 맞는 일일까? 이왕 이렇게 나락으로 빠질 인생이라면,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몬스터를 한 마리라도 죽이고 죽는 게 옳은 일이지 않을까?]
익숙했다.
강민혁이 살아가는 세상에도 클리스만과 같은 사람들이 많다.
몬스터들에게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오로지 복수만이 남은 괴물로서 사지(死地)에 몸을 맡겼다.
[2031년 12월 25일. 그때로부터 정확히 1주년.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머리로는 마법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만, 저주받은 내 몸뚱이는 마법을 구현해낼 만한 힘이 없다. 이대로는 가족의 복수를 하지 못한다. 방법이 필요하다, 방법이.]
그리고 다음 페이지.
클리스만의 일대기를 확인하던 강민혁이, 순간 경직되었다.
[2033년 3월 10일, 지금 일기를 읽고 있는 너에게 제안한다. 내 육신을 대가로 한, 아주 특별한 거래를.]
‘·········?!’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클리스만의 일기.
이것은 본인의 행적을 기록한 일임과 동시에, 바로 자신에게 보내는 클리스만의 메시지였다.
***
심장이 뛰었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빙의(憑依)라는 것은 이론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 기이한 현상이나, 빙의의 대상이 자신을 정확하게 지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설마 이게 우연이 아니라는 거야?’
평행세계로의 빙의.
난생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강민혁은 이것이 누군가 의도한 상황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클리스만은 거래를 제안했다.
일단,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의 제안을 확인해야만 했다.
[내 몸을 차지한 너는 분명히 내가 바라는 조건에 가장 최적화된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 목숨을 담보로 한 링크(link)가 연결되지 않았을 테니까. 너도 알겠지만 이곳은 네가 사는 세상의 평행세계다. 세상이 창조되는 그 시작점은 같았으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문명이 형성되었겠지. 두 세상은 모두 평화로웠다. 차원의 균열이라는 대재앙(大災殃)이 닥칠 때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몬스터의 출몰.
그건 정말 재앙이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느닷없이 세상의 상식을 무너트리는 그들이 나타나 모든 체계를 바꾸었다.
강화 문명은 그렇게 형성되었다.
몬스터의 위협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구의 문명은 어떻게든 몬스터에 대항할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몬스터의 등장 이유는 몰랐다.
그리고 그 이유가, 클리스만의 설명에 포함되어 있었다.
[차원의 균열은 내가 사는 세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네가 살고 있는 차원으로 넘어가서 우리가 겪었던 혼란을 일으키고 있지. 현재도 재앙은 더욱 몸을 부풀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언제고 인류는 몬스터들에게 완전히 함락되고 말겠지. 그래서 너의 힘이 필요하다. 몬스터들을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리기 위해서는, 양쪽에서 동시에 몬스터들을 무너트려야 한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공의 적.
그들을 처리하는 것에는 동의하나, 클리스만과 자신은 사실 그런 대업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클리스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은 수호문의 낙오자로 취급받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를 도와줄 힘도, 그럴 자격도 없다. 이러한 의문을 클리스만은 예상했던 것일까?
[난 네가 필요하다.]
명확히 강민혁을 지목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네게 원하는 것은 그쪽 세상의 몬스터들을 말살(抹殺)하는 것. 그리고 딱 한 번, 재앙의 뿌리를 뽑을 때 너의 힘이 필요하다. 이곳은 평행세계이지만 동시에 존재하는 세상. 나는 너를 이 세상에 소환할 방법을 알고 있다.]
손이 떨렸다.
예상치도 못한 전개에, 강민혁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아마 너는 자신이 아직 그러한 자격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 세상의 지식을 경험해보았기에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겠지. 한 달에 한 번, 너의 영혼을 나의 몸에 빙의시켜서 새로운 지식을 단계별로 전수하겠다. 그것이 네게 제시하는 거래의 대가다. 만약 응할 생각이라면, 책상의 서랍을 열어라.]
“·········.”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클리스만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 강민혁은 한동안 가만히 일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의문은 많았다.
왜 자신인지.
대마법사가 무수히도 많은 세상에서, 자신에게 그들의 지식을 전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클리스만의 정체는 무엇인지.
하지만 길고 길었던 고민의 끝에, 강민혁은 결국 처음부터 정해졌을지도 모르는 선택을 내렸다.
드르륵.
서랍을 열었다.
지금 있는 방처럼 휑한 그 공간에, 딱 한 권의 책이 있었다.
그 겉표지에는.
[108가지의 1클래스 마법]
지난번에 확인하지 못했던, 초등 교과서의 다음 파트가 있었다.
***
강민혁이 눈을 떴다.
‘현실인가.’
창밖에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밤새 1서클 교과서를 붙잡고 있었던 강민혁은, 그쪽 세상에서 해가 뜰 즈음에 다시 잠에 들었다.
지식은 완벽하게 터득했다.
강민혁의 머리가 좋은 것도 있었지만, 교과서에는 친절하게 주석(註釋)이 포함되어 있었다.
‘클리스만은 천재야. 마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어.’
108가지의 마법.
클리스만은 그 마법들의 원리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겨우 1서클 마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클리스만의 설명을 통해서 그 마법들은 달라졌다.
이게 과연 내가 알던 마법이 맞는 것일까.
1서클은 정말 기본적이고 파괴력도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는 마법으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마법 문명이 발달한 클리스만의 세상에서는 다른 방식으로의 사용이 가능했다. 강민혁의 세상이 강화 문명에 매달렸던 것처럼, 그들은 마법으로 몬스터들을 쓰러트리는 방법을 터득했다.
“후우.”
숨을 크게 내뱉었다.
클리스만과의 거래.
너무도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지만, 후회스러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몬스터들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이 세상은 사연이 많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클리스만과 마찬가지로 강민혁 또한 자신만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동조했다.
클라스만의 아픔이, 강민혁의 마음을 이끌었다.
문제는.
‘나는 너무 늦은 나이에 마법을 시작했어. 저쪽 세상의 도움을 받는다고는 하나, 빠르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쪽 세상에서도 기반이 필요해.’
가문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검을 버린 낙오자를 도울 리도 없을뿐더러, 그들은 마법 자체가 매우 질 떨어지는 학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강민혁에게는 마법이 동아줄이다.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일단 이 세상에서 마법의 진전을 도와줄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활용할 필요성이 있어.’
더블 캐스팅과 1서클 마법.
현실에서는 그게 대단한 지식처럼 보이겠지만, 앞으로 얻을 지식들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지식을 계속 공급받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가치를 살릴 차례다.
다음 날.
이학범 교수를 찾아간 강민혁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더블 캐스팅 연구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이학범.
수면 유도제라고 불리며 학생들에게는 인기가 없지만, 마법계에서는 엄청난 권위자.
그와의 관계가 바로, 훗날 마법의 신이라고 불리게 될 강민혁이 표면 위로 드러나는 최초의 시작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