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5
제725장 심연 위기
기적연방은 단순히 독특한 연방제 국가를 넘어 대륙에서 가장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땅으로 자리매김했다. 대륙의 다른 지배자들은 기적연방의 개방성에 감탄하는 동시에 마음 한구석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세습을 폐지하고 연방 국민 모두에게 대통령이 될 기회를 열어줬다는 건 곧 기적연방이든 천제현이든 대륙 전체를 집어삼킬 야심까지는 없음을 시사했다. 어쩌면 천제현은 애초에 그리 대단한 야심가가 아니었는지도 몰랐다.
기적연방 같은 매머드급 세력의 탄생 과정이 겨우 몇 달 만에 깔끔하게 완료될 리는 만무했다. 각각의 국가와 세력 간에는 아직 서로 맞춰가야 할 부분이 많았다.
취임연설이 끝나고 다들 본격적인 업무에 돌입하려던 그때.
기적성을 비롯한 혼돈의 숲 전역에 격렬한 진동이 휘몰아쳤다. 강도 자체보다는 진동 범위가 넓고 지속시간이 길다는 점이 두드러졌다. 모두가 피부로 직접 느꼈다. 땅속 깊숙한 곳에서 폭발한 그 힘을.
***
“무슨 일이에요?”
행사에 참석했던 천제현이 소식을 듣고 급하게 돌아왔다.
공화련이 굳은 표정으로 영상과 데이터를 보여줬다.
“정확한 상황은 파악이 안 되지만, 네간계에서 올라온 정보에 의하면 갑작스러운 사고로 최소 천만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해. 우리가 제국들과 공동으로 개발 중이던 광산도 전부 무너졌고. 사태가 심각한 것 같아.”
“네? 사상자가 천만?”
듣던 이들 모두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천만이라니?
아득한 거리를 사이에 둔 지표면에서까지 흔들림이 감지됐을 정도였으나 네간계에서 대체 무슨 일이 터진 건지는 아무도 몰랐다.
기적성 치하에 있던 네간은 현재 기적연방으로 편입되어 메이나가 통치하고 있었다. 이번 사태로 인한 피해는 단순히 기적연방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제1차 기적 정상회의 당시 기적성이 네간 지하자원 개발 사업을 다른 나라에도 개방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사태는 기적상회와 네간 본토뿐 아니라 여타 대륙 국가들에도 재앙이었다. 기적성과 끈끈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연맹 6개국에서는 특히 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네간계가 폭발했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만.”
“무슨 일이랍니까? 네간이 파괴됐으면 우리 생산라인은 어쩌고요? 네간에서 올라오는 자재가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데, 기적투구 만드는 데도 필요하단 말입니다. 이래서야 생산량을 무슨 수로 맞춰요!”
아니나 다를까.
일이 터진 지 얼마나 됐다고 천제현의 통신기는 벌써부터 불이 났다.
황제들이 대책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이 막대한 손실을 하소연할 데라고는 천제현이 유일했다. 네간을 개발한 장본인이 바로 천제현 아니던가? 자기 땅이니 자기가 책임을 져야지.
천제현이 말했다.
“아직 구체적인 상황설명은 못 드리지만, 조금 전 네간 대통령이 돌아가 조사해 본 바로는 악마의 문 유적지가 폭발을 일으킨 것 같답니다.”
분천대제가 시뻘게진 얼굴로 말했다.
“아니 대체 멀쩡하던 유적이 왜 갑자기 폭발했다는 건지!”
“공들여 개발한 광산이 다 무너졌단 말입니다!”
광수대제도 꽤나 혈압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천제현 대통령, 요즘 바쁜 건 알지만 이번 일이 단순 천재지변인지 아니면 인재인지 제대로 조사를 해봐야 됩니다.”
다른 황제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시는 것만큼 단순한 문제는 아닐 겁니다.”
천제현은 얼추 짐작 가는 데가 있었지만, 아직은 결론을 낼 단계가 아니었기에 말을 아꼈다.
“다 함께 네간에 한 번 다녀와야 할 것 같군요.”
그러는 수밖에.
결국은 직접 내려가 보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도 여섯 제왕의 황궁과 거처에 설치된 전송탑 덕에 말이 거창해서 네간행이지 이동하는 데 드는 수고는 후원 산책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암흑성 전송지점에서 모이기로 한 지 5분 만에 천제현과 여섯 황제가 속속 목적지 전송탑에 도착했다.
기적성의 과학기술에 다시금 찬탄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전송탑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내려오느라 얼마나 기운을 빼야 했겠는가.
도착과 동시에 일행의 눈에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풍경이 들어왔다. 머리 위에서 타오르던 불꽃이 확연히 빛을 잃은 데다가 색까지 요사스러운 녹색으로 변한 탓에 시야 전반이 어두침침했고, 공기 중에도 섬뜩한 기운이 자욱했다.
용 장로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사악한 마력이 이토록 짙다니!”
풍월여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는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정말 일이 터지긴 터진 모양이에요.”
서큐버스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네간을 관리하고 있는 메이나였다.
“조사 결과 악마의 문에서 거대한 마력 분출이 일어난 탓이었어요. 현재 악마의 문을 중심으로 반경 천 리 내에는 생명체가 하나도 남지 않은 상황이에요. 구체적인 원인은 더 조사해 봐야 알 것 같아요.”
“음, 알겠어요. 가서 마저 일 보도록 해요.”
악마의 문이 원흉일 줄이야 예상했던 일이기에 긴 대화는 필요 없었다. 천제현의 눈동자가 흰색으로 변하는가 싶더니 강력한 공간마력이 옆에 있던 여섯 황제를 감쌌다. 다음 순간, 일행은 악마의 문 외곽으로 이동해 있었다.
“천제현 대통령은 그간 실력이 또 일취월장했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공간능력으로는 대륙에서 따라올 사람이 거의 없겠습니다.”
천제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담이나 나눌 때가 아닙니다. 저 앞을 보세요!”
시선을 돌린 황제들의 표정이 황망하게 일그러졌다. 시야는 온통 검은색뿐. 산봉우리에서 평지에 이르기까지 온 세상이 검은색 결정으로 변한 광경이었다. 마치 얼음이 한기를 뿜듯 검은 증기를 토해내는 흑색 결정은 몹시도 기괴한 느낌을 줬다.
저승바다의 명왕이 침통하게 말했다.
“반경 천 리 이내의 모든 물질을 결정화하다니. 이건 우리의 한계를,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계의 한계를 넘어선 힘입니다. 심상치가 않군요.”
“공간의 눈!”
천제현이 시야를 무한히 확장하는 특수능력을 발동했다. 저 멀리 악마의 문 유적에서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네간계 곳곳에 있는 다른 악마의 문 유적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적에서 흘러나온 검은색 마력이 악마의 문 정중앙으로 모여들어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다.
“역시 심연의 문이었군!”
능력을 거둬들인 천제현이 한숨을 뱉었다.
“악마의 문은 일종의 열쇠입니다. 열쇠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지금 보는 것처럼 거대한 진법을 만들어냈어요. 심연에서 충분한 힘을 빨아들이고 나면 차원 안팎을 연결하는 통로를 뚫을 겁니다. 차원 밖의 생명체가 안쪽으로 침투를 시도하는 거죠.”
시공간이 뒤틀리고 있었다.
어둠의 소용돌이 사이로 모종의 사악한 힘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랬다. 여기가 바로 재난의 근원이었다.
악마의 문에 만들어진 진법을 자세히 살펴볼수록 천제현은 점점 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진법의 핵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건 섬뜩한 심연의 기운이었다. 이런 기운이 감지될 이유는 딱 하나였다. 심연의 문이 열리려 하는 것이다.
광수대제는 영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무슨 말이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오?”
“그 말인 즉슨…….”
역시 명왕은 박학다식했다. 명왕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인간에게서나 나올 법한 반응이었다.
“저기 중앙으로 모여든 마력이 차원의 통로를 여는 중이라는?”
천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분천대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도 그 문을 통해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겁니까?”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이었다. 천제현이 기억하는 대륙 역사에서 심연의 문이 열린 건 인간의 마력과학기술이 7,000~8,000년의 발전을 거친 시점이었다. 그 당시 대륙은 십만 척이 넘는 전함을 보유 중이었고 각종 첨단 무기의 숫자도 지금보다 백배 천배는 더 많았다.
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심연의 문이 이렇게 빨리 열릴 리가 없었다. 분명 비정상적인 현상이었다. 설마 지난번에 악마의 문 유적의 구조를 바꿔놓은 탓에 심연의 등장 시기가 앞당겨졌단 말인가?
심연세계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천제현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시점에 심연과 마주한다면 대륙은 한순간에 멸망해 버리고 말 것이다.
심연에 대항하려면 최소 20년은 더 발전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나치게 일찍 열린 심연의 문은 대륙에 치명적인 재난이 될 것이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천제현이 제왕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있는 우리만으로는 역부족이에요. 천역 6성 이상 고수들을 전원 집결시켜야 합니다!”
“전원?”
“네, 모조리 다요.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나마 제때 눈치챘기에 망정이지 며칠만 더 늦어서 심연의 문이 실금만큼이라도 열렸다면 결과는 지금과 완전히 달랐으리라. 대륙 문명과 대륙의 국가들도 언뜻 봐서는 쟁쟁한 수준이었으나 만약 이를 그대로 심연으로 옮겨간다면 몇 해를 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차원통로가 열린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몰랐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따지면 누구 하나 빠지지 않는 제왕들이 모두 천역 9성 정점에 멈춰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차원법칙의 제약 탓이었다. 천역 경지를 넘어서는 일이 가능해져 누구나 초능력을 쓰게 된다면 이 세상은 엄청난 혼란에 빠지리라.
천제현은 차원통로의 가치를 잘 알았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없는 지금 차원통로가 열리게 두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애써 이뤄낸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