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8
제718장 굴복
천제현은 열흘 만에 마력 단계를 뛰어넘었고, 다시 열흘 동안의 수련을 통해 새로 얻은 마력을 공고히 다졌다. 그 후에도 그는 실험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뭔가에 몰두했다. 그가 안에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결국 천제현을 밖으로 끌어낸 건 공화련이었다.
대건제국 쪽에서 큰 진전을 거뒀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럴 리가. 이렇게 빨리?’
공화련의 일 처리 솜씨에 대해서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출발한 지 한 달도 안 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 달이면 대건제국을 한 번 둘러보기에도 부족한 시간 아닌가.
자세한 내막이 궁금해진 천제현은 정신통신을 연결했다.
공화련은 정신공간에서 일련의 사건들을 자세하게 보고했다.
이번에 그녀는 수백 명의 외교사절단과 함께 대건제국으로 향했다. 그녀는 지시와 업무 분배만 맡고, 대부분의 실질적 행동은 수행원들을 시켰다.
기적성 사절단이 도착했을 때, 대건제국은 난리통이 되어 있었다. 지난 전투에서 또다시 패전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패배는 지난 몇 번의 패배보다 더욱 쓰라렸다. 제국 전체에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국의 체면 또한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패전의 영향은 국력에 의해 좌우되는 외교 관계에서 제일 먼저 나타났다.
술렁거리던 대건제국의 속국들이 공납을 중단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일부 속국은 심지어 대건제국을 등지고 독립을 선언하거나 다른 세력에게 의탁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대건제국은 전대미문의 손실과 타격을 입었다. 일반적으로 제국들은 속국으로 몇 개의 전국을 거느리고 있으며, 그 아래 있는 소국들은 수십, 수백에 이른다. 속국들이 바치는 보호비와 공납은 나라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두 번의 패배와 대건 황제가 포로로 끌려간 일은 대건제국의 민심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백성까지 갈 것도 없었다. 귀족들조차도 비관적인 전망을 할 정도였으니까. 기적성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다르다는 말이 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건제국이 어떻게 소국들을 지켜준단 말인가?
대건제국은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고, 이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다. 소국들을 관리할 여력이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전쟁으로 인해 향후 속국들에게 더 많은 공납을 요구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소국들이 배반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전성기의 대건제국도 숲의 연맹을 어쩌지 못했으니 앞으로는 그들을 제압하는 건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고원연맹이나 소천제국도 연합군에 참패해 대건제국과 국교를 단절했다. 그 두 제국은 대세의 흐름에 따라 대륙의 다른 제국들처럼 기적성과 동맹을 맺었다. 이 일은 대건제국을 더욱 공황에 빠뜨렸다.
이제 전 대륙에서 세상과 교류가 없는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기적성과 손을 잡지 않은 세력은 없었다.
대건제국만 빼고.
기적성은 공전의 성장세를 보이고 있고, 기적상회에서 개발한 과학기술과 첨단 제품들은 대륙 각지로 퍼져나가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로 인해 전 대륙이 고속 성장기에 들어섰다.
오직 대건제국만 모든 혜택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기적성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대건제국의 국력은 쇠퇴했다. 세상 모두가 그 둘이 적대관계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 대륙은 과학기술 발전의 초입에 서 있었다. 누구도 이런 중요한 시점에 남에게 뒤쳐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대소 국가들이 대건제국에 등을 돌리고 기적성에 붙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공화련은 이러한 상황을 100% 이용했다.
그녀는 대건제국에 가는 길에 정신회의 방식으로 고원연맹과 소천제국의 지도자와 만나 회담을 갖고 지금까지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기로 공감대를 모았다.
그 대가로 기적상회에서 전송, 물류, 통신 등 삼대 기반시설을 건설해 주기로 약속했고, 두 제국은 대건제국에 압박을 가하기로 했다. 이제 기적성은 6대 제국 외에도 고원연맹과 소천제국을 동맹으로 얻음으로써 대륙 중서부 지역에서 무적의 고지에 오르게 되었다.
이 밖에 대건제국의 주변 속국들이 단체로 단교를 선언한 것도 공화련의 배후공작과 관계가 있었다. 이로 인해 대건제국은 제왕이 포로로 잡히고 속국들은 등을 돌리는 내우외환, 풍전등화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공화련은 이 시점에 대건제국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대건제국의 고위층과 만나지 않고 각종 수단과 루트를 이용해 수억 마석에 달하는 돈을 써가며 대건제국의 언론 매체와 연을 만들어 두었다.
대건제국의 언론매체는 신문과 서신 등 전통적인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하는데다, 각 지역마다 무수히 많은 매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중앙 정권은 이들을 다 통제할 수 없었다. 얼마 후 각 지역의 매체들은 모두 경악할 만한 기사를 내보냈다. 대부분이 대건 황제와 고위층 인물들을 비판하는 기사였고,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들을 비방하는 내용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신문을 본 백성들은 대건제국이 이 꼴이 된 게 전부 대건 황제 및 고위 귀족들의 욕심과 자만심 때문이라고 믿게 되었다.
백만 병사를 잃게 만든 책임은 호화로운 궁전 안에서 팔자 편하게 앉아 있는 집권자들에게 있지 않은가! 기적성은 이번 일에서 무고한 피해자, 수동적인 수비자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 공화련은 이러한 민심이 형성된 때를 놓치지 않고 기적성의 각종 과학기술과 그것이 가져온 변화, 그리고 대건제국의 폐쇄 정책이 초래한 결과에 대해 알리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대건제국의 백성들은 기적성의 기술과 제품들을 접하고 동경하게 되었다.
그녀의 조치들은 매우 시의적절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기적성과 대건제국의 주요 갈등은 몇 번의 전투에서 비롯되었다. 전쟁은 대건제국의 군대에 참담한 손실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력과 영향력이 급속도로 약화되도록 만들었다. 이때문에 대건제국의 백성들은 기적성을 철천지원수처럼 싫어하게 된 것이다.
대건제국의 고위층 인사들은 몇 번이나 만남을 요청했지만, 공화련은 모두 거절했다. 가능한 협상을 미룸으로써 그들의 날 선 반응이 무뎌지게 만드는 한편, 외부적 압박과 내부의 여론 선동을 통해 협상 테이블에서 우위에 서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훌륭한 효과를 가져왔다.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공화련은 대건제국의 최고 세력가 및 귀족들과 협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전략은 간단했다. 설득이 가능하면 설득을 하고 뇌물을 원하면 뇌물을 주되, 정 안 되면 위협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전투를 벌이거나 암살까지도 단행한다는 것이었다.
대건제국은 우두머리를 잃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이 없었다. 대건 황제가 사라짐으로써 정치적 구심점을 잃었고 민심은 몹시 흉흉해졌으며, 속국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외부의 압박은 더욱 거센 상황이었다. 탁월한 중재 능력을 지닌 공화련은 한 달 안에 대건제국의 고위층 인사들을 손아귀에 넣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네가 해줘야 하는 일이 두 가지가 있어. 하나는 마석을 제공해 주는 거야. 마석으로 관원들을 매수할 생각이거든. 두 번째는 가능한 빨리 대건 황제를 설득하는 거야. 대건 황제가 우리의 요구에 동의하기만 하면 가장 큰 세력을 지닌 황족들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어. 그렇게만 되면 나머지는 순조롭게 해결될 거야.”
“기적성의 마석을 얼마든지 가져다 쓰세요. 20억, 30억, 아니 100억도 상관없어요! 마석이 부족하면 다른 세력에게 빌리고, 그래도 부족하면 우리 자원을 팔아다 쓰세요. 대건제국만 끌어들일 수 있으면 돈은 얼마를 쓰든 아깝지 않으니까요!”
천제현이 공화련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며 말했다.
“그리고 대건 황제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한테 다 방법이 있으니까요.”
공화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어쨌든 이렇게 된 거, 서둘러야겠지!”
통신을 끊은 천제현은 시간을 계산해 봤다. 대건 황제가 정신감옥투구를 쓴 지도 30일이 지났다. 좁은 정신세계에서 25년 가까이 머문 셈이다.
25년이라니 그 작은 방 안에서.
아무리 심지가 강한 사람이라도 25년간의 답답함을 견디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불같은 성정의 악인이라도 25년 동안 혼자 지내면 차분해지겠지.
이 정도면 됐다 생각한 천제현은 대건 황제를 만나보기로 결정했다. 겉에서 보기에 대건 황제는 한 달 전 모습 그대로였다. 어쨌든 현실 세계에서는 30일이 흘렀을 뿐이니까. 천제현이 그곳을 지키고 있는 죽음의 현자에게 손짓을 하자 그가 대건 황제의 투구를 벗겼다.
“헉!”
갑자기 현실 세계로 돌아온 대건 황제는 멍한 표정으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주변 환경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아득한 표정으로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봤다. 한때 이 자를 얼마나 죽이고 싶었던가. 죽여서 그의 시체라도 씹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천제현을 바라보는 그는 그 어떤 분노도, 원한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무력감과 자신의 나약함만 느껴질 뿐.
정신감옥에 25년 동안 갇혀 있으면서 대건 황제는 수없이 많이 욕하고 분노하고 미쳐 날뛰었다. 그러나 마음 속 격랑이 가라앉자 냉정을 되찾고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비참한 지경에 이른 이유를 되씹던 그는 기적성과 반목한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음을 깨달았다.
천제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 30일 만에 많이 변하신 것 같습니다. 투구가 제 역할을 톡톡히 한 듯하네요.”
대건 황제는 이를 갈며 대꾸했다.
“무슨 생각이냐? 당장 이 몸을 풀어주지 못할까!”
그러자 천제현이 고개를 저었다.
“제게 부족한 게 뭐가 있을 것 같습니까? 돈? 세력? 권력? 지금은 아내까지 있습니다. 폐하는 그런 제게 무엇을 주시고 자유를 얻을 생각이십니까? 사실을 말씀 드릴까요? 최근에 업그레이드 버전 정신투구가 발명됐답니다. 정신세계의 시간을 500분의 1로 늦출 수 있는 물건이죠. 이 정신감옥에 갇힌 수감자는 촉각, 청각, 시각 등 모든 행동력을 잃게 됩니다. 사고능력만 살아 있달까요? 이걸 쓰면 수백, 수천 년을 후회와 고통 속에서 보내게 되겠죠.”
대건 황제는 공포로 몸을 떨었다.
지고무상의 제왕이라면 어떤 일에도 공포심을 느끼지 않아야 하겠지만, 천제현 저놈은 달랐다. 그가 발명한 형벌은 유사 이래 어떤 형벌보다도 잔인했다. 제 아무리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라도 그 잔혹한 형벌을 겪으면서 이성을 유지하지는 못하리라.
천제현은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폐하의 수명을 천 살이라고 보고 앞으로 500년 더 사신다고 했을 때, 500년 동안 정신투구를 쓰신다면 정신감옥 안에 25만 년 계실 수 있겠군요. 와, 정말 엄청난 숫자네요. 혼돈시대 이후 대륙의 문명사보다도 긴걸요. 그 정도 시간이면 고대부터 지금까지 모든 인생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으실 겁니다.”
“잠깐!”
대건 황제는 서리 맞은 풀처럼 꼿꼿하던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대체 원하는 게 뭐냐? 말을 해라!”
천제현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대건 황제가 지친 말투로 말했다.
“뭘 원하든 다 들어주겠다! 날 풀어만 준다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천제현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저도 사양하지는 않겠습니다. 전 귀국과 손을 잡고 싶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역 통합이랄까요…….”
그는 연방계획에 대해 설명했다.
“연방이 설립되어도 폐하께서는 계속 제왕의 옥좌에 앉아 대부분의 행정권과 일부 군 통수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일부 행정권과 대부분의 군 통수권은 기적성이 갖게 되겠지만요.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진실로 손을 잡고 전 대륙을 호령하는 무적의 연합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천제현의 조건이 단순할 리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대건제국의 모든 국고를 털어서라도 자유의 몸이 되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제현이 원하는 것이 만 년 동안 축적한 수백, 수천억 마석이 아니라 대건제국 자체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