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700화 (700/729)

# 700

제700장 된통 뜯기다

천제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최악의 사태였다. 대건제국과 기적성이 앙숙인 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지만, 대건제국은 지난 패전 이후로 줄곧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대건제국이 어떤 자들인지를 생각하면 그냥 참고 넘어가기로 했을 리는 만무하고, 사실상 보복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간의 인내는 아마도 치밀한 준비를 위한 작전이었으리라.

천제현이 다급하게 물었다.

“뭔가 더 실질적인 정보는 없습니까?”

파샤가 보고했다.

“대건 황제가 마수령 소천제국의 소천대제와 대륙 북부 고원연맹의 고원왕을 포함해 몇몇 거물들을 찾아갔었다고 들었소.”

천제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둘은 어떤 자들입니까?”

“소천제국은 대륙 최대의 늑대족 마수령제국이라오. 독보적인 기병부대를 거느린 호전적 세력이지. 밤의 숲이나 분천제국만이 아니라 대건제국과도 자주 충돌하는데, 손해 보는 싸움을 한 전력이 없다고 하니 대단한 자들임이 틀림없소. 고원연맹은 북부 지역의 연맹세력으로 북방 고원과 설원지대 전체가 그들의 영향권 안이오. 대륙에서 가장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는 세력이고 인간족, 드워프, 거인, 얼음트롤, 얼음엘프 등이 주요 구성원이오. 연맹제의 틀은 우리와 다소 차이가 있다 들었소만, 어쨌든 유서 깊은 제왕급 세력이라오.”

두 세력은 예전부터 기적성에 그다지 호감이 없는 듯했다.

기적 정상회의 당시 공화련의 초청장을 받고도 그 오만한 자들은 기적성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기적성에서 어마어마하게 멀리 떨어진 소천제국과 고원연맹은 기적상회의 직접적인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땅이었다.

소천제국은 마수령제국이었다. 오만무례하고도 야만적, 근시안적인 것이 바로 마수령들의 특징, 그들은 기적상회를 대놓고 무시했다.

고원연맹의 경우는 상황이 좀 달랐다. 숲 연맹에서는 모든 가입 도시들이 평등한 지위를 인정받지만, 숲 연맹의 열 배 이상 면적에 십여 개에 달하는 전국(戰國)을 품고 있는 고원연맹에서는 힘이 센 자가 곧 왕이었다.

물론 고원연맹 역시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기도 했다.

기적상회에 대한 무지에 연맹 내의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세력구도까지 더해져 기적성의 초청이 쉬이 성사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 타이밍에 두 세력과 손을 잡은 대건제국이 노리는 건 십중팔구 천제현의 결혼식일 터였다. 천제현 덕에 자기들 체면이 땅에 떨어졌으니 당한 그대로 갚아주겠다는 심사이리라.

천제현은 일순 머리가 지끈했다.

“병력은 얼마나 된답니까?”

파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거기에 대한 정보는 아직 없소.”

이쪽의 허를 찌르려는 계획이라면 군대를 철저히 감춰두는 게 당연했다. 적이 가진 패를 알 수 없는 상황, 안 그래도 제한적인 군사력에 수비 쪽에 몰리기까지 했으니 허점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기적성 혼자서 무슨 수로 3개 세력의 연합공격을 막아낸단 말인가?

너무 급작스러운 소식이었다.

결혼식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며칠.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한 천제현이 대책 논의를 위해 공화련을 호출했다.

공화련 역시 이 시점에 대건제국이 움직이리라 예상치 못했기는 마찬가지였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장 기적성의 모든 자산을 동원해 적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해. 어떤 부대가 몇 명이나 움직이고 있으며 공격이 어디서부터 시작될지 정도는 알아야 정확한 대응을 하지.”

천제현이 물었다.

“우리 병력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요?”

“다행히 우리한테는 도움을 요청할 연맹원들이 있잖아. 제국급 세력 하나였다면 별문제가 안 됐겠지만, 상대는 셋이야. 게다가 그들에게는 서해성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어. 이런 상황에서는 설사 1대 1이었다 해도 서해성의 안전을 장담하기 힘들었을 거야.”

서해성은 기적성처럼 방어체계가 잘 갖춰진 도시가 아니었다.

강력한 무기와 방어결계, 거기에 고대 생명수와 엔트족까지 버티고 있는 기적성도 애를 먹을 만한 적들을 서해성이 당해낼 수 있을 리가.

더욱 결정적인 건 이번 전투가 결코 일반적인 공방전 색채를 띠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예식 중간에 대건제국 군대가 쳐들어온다면 서해성이 함락되고 말고에 관계없이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결혼식은 엉망이 되어 버린다.

공화련이 의견을 냈다.

“우리가 예전보단 강해졌다고 쳐도 제국급 세력 여럿을 동시에 당해내기엔 역부족이야. 다른 제국들에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어.”

그게 쉽지가 않으니 문제였다.

6대 세력 중 현재 기적성에 그나마 우호적인 건 밤의 숲이 유일했다. 물론 그 역시 달의 신 궁전이 천제현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세력들의 반응은 예측불허였다. 기회는 이때다 하고 등에 칼을 꽂지만 않아도 고마워해야 할 판에 과연 그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익공동체잖아. 우리 덕에 큰돈 한 번 만져보겠구나 기대하는 자들이니 가능할 거야. 내가 설득해 볼게.”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지만, 공화련은 이 비상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직접 나서기로 했다.

공화련이 6대 제국에 긴급 정신회의를 요청했다. 정신회의란 정신투구로 서로의 의식을 연결해 만든 가상의 회의장에서 안건을 논의하는 일을 뜻했다. 6대 세력의 최정상급 권력자들을 한낱 병졸 부리듯 오라 가라 할 수야 없는 일 아닌가? 상대를 그런 식으로 부리려 들었다가는 기적성도 좋은 꼴을 보기는 힘들 터였다.

정신회의는 위의 우려를 일소시켜 줄 최적의 방책이었다.

6대 세력은 종일 기적쇼핑몰 입찰가 순위표를 지켜보며 기적쇼핑몰의 위대함을 절감하고 있는 참이었다. 이런 타이밍에 공화련이 요청한 회의를 거절할 리가. 6대 세력 우두머리들은 약속한 시간에 맞춰 한 명도 빠짐없이 투구를 착용했다.

분천대제가 입장과 동시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기적쇼핑몰이 돈을 긁어모으는 수완에는 정말이지 질투가 날 정도요. 이런 화수분을 끼고 있으니 기적성은 좋든 싫든 돈방석에 앉을 수밖에 없겠소이다.”

풍월여제가 우아하게 차 한 모금을 넘겼다. 물론 차 역시 가상의 산물이었다. 여제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적상회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마석이 절로 굴러들어오니, 앞으로 기적상회에서 흘리는 떡고물이라도 받아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용족 대장로와 명왕 역시 공감을 표했다.

공화련은 처음 회의장에 입장한 순간부터 분위기가 어쩐지 묘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륙 최상위 권력자들을 앉혀놓은 회의라기에는 저들의 태도가 다소 당혹스러웠다. 나이트 엘프왕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공화련은 엘프왕의 눈빛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된 거였나.’

정보가 서해성에까지 흘러 들어갔을 정도면 대륙 권력의 최정점에 있는 이들이 대건제국이 소천제국, 고원연맹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모를 가능성은 몹시 희박했다.

얼굴 마주치기가 무섭게 앓는 소리를 하며 기적상회를 치켜세우는 건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리라.

이런 일은 정면돌파가 최선이었다. 공화련이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밝혔다.

“이미 알고들 계시겠지만, 대건제국이 다른 대형 세력들과 함께 결혼식 당일 서해성을 칠 계략을 세우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결혼식 당일은 기적대륙의 오픈일이기도 합니다. 기적대륙 오픈은 투구 판매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거고요. 이미 투구 사업으로 이익을 보고 있는 동시에 향후 백억 단위의 마석을 더 손에 쥘 분들로서 기적성에 힘을 보태주시길 요청합니다.”

회의 참석자들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설마하니 공화련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저자세로 도움을 요청할 줄이야.

“도와주지 않겠다는 게 아니오만.”

회의장에 굵은 저음이 메아리쳤다. 광수제국의 광수대제가 우렁찬 목청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주머니 사정에 파병 경비가 어디 만만한 금액이어야지.”

경비? 그만한 돈도 못 댈 정도면 일찌감치 제국 간판을 내렸어야지.

맨입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공화련도 잘 알았다. 이미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던 참이었다. 기적성과 6대 제국은 연맹이 아닌 단순 협력 관계에 불과했다. 저들에게는 기적성을 위해 군사를 내어줄 의무가 없었다. 그러니 주머니 불릴 생각부터 하는 것도 당연했다.

기적성을 끝장낼 정도의 위기는 아니었지만, 대건제국 연합군으로 인해 온 대륙이 기다려온 결혼식이 난장판이 되고 기적대륙 오픈이 연기된다면 기적상회의 명성에는 큰 금이 가고 말 것이다. 만약 서해성이 함락될 경우에는 서해지역 전체를 잃는 손실을 볼 수도 있었다.

공화련이 조건을 던졌다.

“기적성은 이번 투구 판매로 발생하는 이윤 중 10%만을 가져가겠습니다. 나머지는 여기 계신 분들의 몫으로 양보하죠.”

말 한마디로 마석 최소 수억 개가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마석 수억 개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광수제국처럼 경제가치 창출이 빈약한 마수령제국에서는 한 달 세수에 해당하는 단위였다. 인구 백억의 제국에서 나오는 세수치고는 적은 액수지만, 어쨌든 공화련은 국가 세수 규모의 마석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포기한 것이다.

‘마석이 탐난다며? 군자금이 필요하다며? 억 단위로 안겨줬으니 이제 만족했지?’

“우리가 이 틈에 제 배만 불리려 한다든가 그런 오해는 말아주시오. 물론 나도 도와주고야 싶지.”

분천대제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끼어드는 순간 동급 세력 셋을 적으로 돌리는 셈인데 신중히 고려해 봐야 하지 않겠소. 지금 마석이 중요한 게 아니오.”

공화련이 말했다.

“우리가 협력 파트너라는 사실을 잊으시면 곤란합니다. 기적상회에 무슨 일이 생기면 그 타격은 여기 계신 분들도 같이 받게 될 거예요. 기적대륙 오픈일이 미뤄질 경우 기적투구에 대한 관심도 급격히 식을 테고 향후 예정되어 있던 협력사업도 진행이 어렵습니다. 여러분이 알게 모르게 볼 피해는 단순히 마석으로 계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분천대제가 고개를 저었다.

“일리는 있는 말이오만, 방금 내건 조건에 겨우 협의서 한 장 가지고 우리에게 결정을 강요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군.”

공화련이 물었다.

“그럼 원하시는 게 뭔가요?”

광수제국의 광수대제가 피비린내를 맡은 한 마리 늑대처럼 눈을 빛내며 일어섰다.

“기적쇼핑몰 주식을 우리한테도 나눠주시오. 그렇게 한 가족이 되고 나면 어려울 때는 자연히 서로서로 돕는 거고!”

‘쇼핑몰 주식을 내놔라?’

쇼핑몰은 기적상회의 가장 주요한 자금줄이자 그 어느 사업보다도 오랜 시간을 들여 만든 플랫폼이었다. 기적쇼핑몰은 지금도 그 가치를 평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지만, 앞으로는 더욱더 무한한 가치를 창출해낼 존재였다. 현재 기적쇼핑몰 지분은 100% 기적상회가 소유하고 있었다. 지분을 떼달라는 요구는 기적상회의 살점을 베어달라는 거나 같은 말이었다.

아무리 주머니 사정이 급해도 그렇지, 광수대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그걸 욕심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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