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8
제698장 협력
운문연구소는 규모에 반해 최고 수준의 인재가 턱없이 부족했고, 그게 바로 제국과 기적성의 차이였다. 그러니 명왕이 저승바다에서 보내준 50명의 분야별 현자가 그야말로 눈물 나게 반가울 수밖에.
천제현은 이들을 알뜰히 활용해 단기간 내에 기적상회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리라 다짐했다.
현자들이 유학을 왔다 치면 그만, 명왕이 무슨 속셈인지야 알 바가 아니었다.
기술 유출은 두렵지 않았다. 5년이면 기적상회가 대륙 전역으로 진출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현자들이 일부 기술을 빼내서 돌아간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활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천제현은 쉼 없이 기술 개량에 매진하고 있었다. 뭔가를 복제해가 봐야 천제현의 손에 쥐어진 신기술에 비하면 그들이 가진 건 이미 도태된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할 터.
죽음의 현자들 건을 처리한 직후 천제현은 공화련에게서 급한 연락을 받았다.
“돌발상황이야. 직접 만나서 해야 될 얘기니까 얼른 복귀해.”
기적성에 돌아온 천제현은 각국 복식을 차려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했다.
공화련이 풍월, 분천, 광수, 저승바다 등지에서 온 사신들을 소개했다. 다들 뭔가 대단히 중요한 임무를 띠고 온 듯한 분위기였다.
“사신 분들이셨군요? 이거 실례가 많았습니다!”
정중하게 포권을 해보인 천제현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뭔가 가르침을 주실 일이라도?”
“저희가 기적성 성주님을 가르치다니요!”
풍월제국에서 온 여자 사신이 공손하게 말했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협력을 논의하고자 온 것입니다.”
이때 마음이 급해진 분천제국 사신이 앞으로 나섰다.
“천제현 성주님, 협력을 해도 제일 먼저 온 우리 분천제국과 하셔야지요!”
용들의 땅에서 온 사신이 면박을 줬다.
“여기가 시장판도 아니고 선착순은 무슨? 누가 가장 좋은 조건을 내거느냐가 문제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람?
천제현의 당혹스럽다는 시선에 가볍게 헛기침을 한 공화련이 사신들 대신 설명을 시작했다.
“기적투구가 기적쇼핑몰에서 광풍을 일으켰잖아. 미처 구매를 못 한 제국 분들이 많이 아쉬워하나 봐. 돈이 없거나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 순전히 우리 기적상회가 아직 그들 지역에 진출을 못 한 탓이었으니까. 게다가 입찰 기간도 너무 짧아서 시간적으로나 접근성으로나 참여가 불가능했던 거지.”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만했다. 기적성 혼자 돈을 쓸어 담는 게 배가 아프신 황제 폐하들께서 어떻게든 숟가락 얹어볼 궁리를 하고 계시렷다.
“그래서요?”
“분천대제께서 1차 생산분 50만 개를 전 대륙을 대상으로 경쟁 입찰을 받아 판매하기로 하셨습니다. 물론 기적상회 쇼핑몰의 도움을 받아서요. 제국 내 각 지역에 사무소를 설치해 국민들의 입찰 신청을 받을 예정입니다. 그럼 가격도 넉넉히 쳐서 받을 수 있어서 좋고 국민들에게 기적투구의 획기적인 기능을 경험할 기회도 줄 수 있어 좋고요.”
천제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도 지금 구실이라고.’
그렇게나 국민을 위하신다면 정가대로 판매하면 되지 경쟁 입찰은 뭐 하러 도입한단 말인가. 자기 백성 등쳐먹을 생각이나 하면서 구실은 그럴듯하게 갖다 붙이긴. 그 뻔뻔한 작태에 천제현은 그저 헛웃음밖에 안 나왔다.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50만 개를 뚝딱 만들어낸다고요?”
50만, 지극히 의심스러운 숫자였다.
“분천제국에 대형 공장을 짓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거로 아는데 제품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진 않을 테고?”
분천제국 사신이 태연하게 말했다.
“아직 만들진 못했어도 판매는 먼저 할 수 있죠. 경매부터 진행하고 좀 기다리다 보면 제품이야 나오지 않겠습니까?”
정말이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만들어지지도 않은 물건을 일단 팔아먹고 보겠다니. 세상에 누가 이런 식으로 장사를 한단 말인가? 남이 선수 치기 전에 어떻게든 한몫 잡고 보자는 식이었다.
천제현이 다른 사신들의 얼굴을 둘러봤다.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표정만 봐도 다들 같은 생각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거야 원,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천제현이 뭐라고 말도 꺼내기 전에 사신들은 또 협력 파트너 자리를 두고 침 튀기는 설전을 시작했다.
풍월제국 사신이 말했다.
“우리 풍월제국과 손잡는다면 이윤의 10%를 기적성에 사례금으로 떼어드리죠.”
“10%?”
분천제국 사신이 코웃음을 치더니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우리 분천제국은 20%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까지? 곧장 두 배라니.
용들의 땅에서 온 사신은 한술 더 뜨고 나섰다.
“용들의 땅은 30% 드리죠!”
천제현과 공화련은 한쪽에 서서 사신들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윤의 1/4을 기적상회에 양보하겠다니, 기적상회는 손도 까딱 안 하고 돈방석에 앉을 모양이었다. 천제현은 사신들을 저대로 싸우게 두면 나중에는 50%까지 주겠다고 나오지 않을까 예측해 보기에 이르렀다.
긴 세월 동안 이어져 온 경쟁구도.
내가 적게 벌면 적게 벌었지, 아니, 차라리 아예 안 벌더라도 남이 버는 꼴은 못 본다는 게 이들의 심리였다.
이래서야 결론이 안 나겠다 싶었는지 밤의 숲 사신이 시선을 천제현에게로 돌렸다.
“성주님 의견은 어떻습니까?”
나머지 사신들도 말을 멈추고 동시에 천제현을 돌아봤다.
“자, 너무 흥분들 하지 마시고.”
천제현이 사신들을 진정시켰다.
“이 중에 한 곳만 택한다면 나머지 나라들이 서운하지 않겠습니까? 기적성만 괜한 원성을 듣겠죠. 이름을 알린 지 고작 몇 년 밖에 안 된 우리가 대륙의 유서 깊은 맹주인 여러분에게 원한을 사는 건 무척 곤란한 일이어서요.”
사신들이 서로서로 눈치를 살폈다.
하긴, 기적성 입장에서야 곤란할 법도 했다.
이때 천제현이 말을 이었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해결책이 있긴 한데, 동의하실지 모르겠군요.”
“해결책이라면?”
풍월제국 사신이 재촉했다.
“그게 대체 뭡니까?”
천제현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아옹다옹할 필요가 뭐 있는지요? 우리는 눈부신 발전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나 혼자 다 먹겠다는 욕심보다는 함께 나누고 협력해야만 향후 공동의 번영을 이룰 수 있어요. 그러니 돈을 벌어도 다 같이 벌자는 말입니다.”
사신들은 전혀 못 알아듣는 눈치였다.
천제현이 설명을 보충했다.
“여기 오신 분들 각자 물량을 50만 개씩 제작해서 기적쇼핑몰에 몰아넣고 같이 파는 겁니다. 수익으로 들어온 마석은 모두 공평하게 나누고요. 그러면 너도나도 다 좋은 일 아닙니까?”
물론 그것도 방법이었다.
하지만 당장에 반대의견이 나왔다.
풍월제국 사신이 말했다.
“그게 무슨? 부강한 우리 풍월제국을 분천제국과 같은 취급 하다니. 마석을 똑같이 나누면 우리만 손해 아닙니까!”
“에라, 우리도 당신네랑 똑같이 나누기 싫거든? 분천제국 인구가 얼마나 많고 국토는 또 얼마나 광활한데, 당신들이랑 비교가 되나?”
“부유하기로 치면 용들의 땅이 제일 부유하지.”
“인구는 우리 광수제국이 최고로 많다고!”
또 설전이 시작됐다. 누구 하나 양보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천제현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할 즈음, 보다 못한 공화련이 나섰다.
“제가 한마디 하죠.”
공화련은 위신 있는 인물이었다.
기적성의 실질적인 관리자가 그녀라는 사실은 오늘 모인 사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볼 일이 많을 테니 이 여자 앞에서는 일단 얌전히 굴어야 한다.
“사실 어렵지 않게 해결될 문제에요. 알파브레인 시스템으로 지역별 구매상황과 입찰가를 분석한 뒤 실제 판매액이 높은 곳에는 많은 마석을, 판매액이 낮은 곳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마석을 배분하면 되니까요. 그러면 공평하죠?”
물론 괜찮은 방책이었다.
하지만 사신들은 여전히 불만이었다.
그러자 공화련이 조건을 덧붙였다.
“기적상회는 서로 윈윈이 되는 협력방식만을 고수합니다. 기적성에 떼어줄 이익금은 20%면 충분해요. 돌아가서 여러분의 지도자를 설득해주신다면 즉각 협력 진행이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어려울 거예요. 어느 쪽이 이득인지 잘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이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있겠는가?
세상에 마석 싫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기적쇼핑몰 같은 플랫폼이 없는 제국들은 제품을 생산하더라도 경쟁 입찰을 받을 방도가 없었다. 아직 대량 생산은 꿈도 못 꾸는 상황, 정가로 달랑 30~50만 개 팔아봐야 수중에 얼마가 떨어지겠는가? 제국급 국가에서 그까짓 마석은 돈도 아니었다.
사신들이 각자 나라로 돌아가 공화련의 말을 전했다.
바로 당일 정신투구를 이용한 원격 회의가 열렸고, 각국 대제들은 모두 공화련의 제안에 동의 의사를 밝혔다. 그다음으로는 1차 생산분이 몽땅 다른 나라로 팔려나가는 상황을 대비해 자국용 최저 재고 유지선을 어느 정도로 할지, 판매 완료 후 또다시 다툼이 벌어지지 않도록 이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눌지 등 세부사항이 논의됐다.
공화련의 면밀한 중재를 거쳐 최종적으로 모두가 만족할 만한 방안의 윤곽이 잡혔다.
풍월제국, 분천제국, 광수제국, 밤의 숲, 용들의 땅, 저승바다에서 각각 50만 개씩, 총 300만 개의 물량을 생산해 기적쇼핑몰에서 경쟁 입찰을 통해 판매하기로 한 것이다.
이번에는 입찰 지역이 더 넓었다.
제국별로 국내만이 아니라 바깥 부속국의 왕성에까지 입찰 접수처를 설치해 국내외 소비력을 광범위하게 끌어모으기로 한 데 이어, 입찰 기간도 넉넉하게 일주일로 잡아 희망자들에게 시간적 여유를 제공했다.
기적투구가 대량생산을 통해 대중적으로 보급되기까지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1~2년이 더 필요했다. 현재의 기적투구는 오로지 부자들만을 위한 사치품이었다. 대륙에는 마석이 썩어나는 억만장자들이 차고 넘쳤다. 그들은 남들보다 먼저 정신투구의 기능을 체험해 볼 수만 있다면 마석 3~5만 개쯤이야, 아니, 더 많은 금액도 대수롭지 않게 내놓을 이들이었다.
구매자들이 지갑을 더욱 쉽게 열도록 만들기 위해 기적상회는 다시금 공격적인 홍보전에 돌입했다. 기적성주의 결혼식이 코앞인 시점, 기적대륙의 시대가 열리기 전 마지막 구매 찬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 최소 한두 달은 기적투구를 구경할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