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690화 (690/729)

# 690

제690장 운명의 눈

은빛 광채를 뿜어내던 거대한 검이 천제현 앞에서 멈췄다.

세상을 쓸어버릴 듯한 기세의 은하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린 것 같았다.

은하에는 여전히 거센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흐르지 못했다.

무형의 마력이 거대한 검을 휘감아 짓이겨 버렸다. 은하는 작열하는 태양에 다 말라 버렸다. 대륙의 어떤 신식도 파괴할 수 있는 이 마력 공격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거인의 몸이 요동쳤다.

의식체가 겁에 질린 모습을 보였다. 의식체는 이런 힘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달의 신이 남긴 기억으로 보았을 때, 이 정도의 힘이라면 달의 신조차 공포를 느낄 것이다. 그러니 달의 신의 신식에서 파생된 일개 의식체가 얼마나 기겁했겠는가?

이 힘은 원소와 물질, 정신, 영혼, 시공간을 초월했다. 이 힘은 모든 생명을 압도하고 세상 만물과 유리되어 있지만 이를 주재하고 지배한다.

이건 모든 것을 초월하는 힘이다.

제아무리 강한 신령도 당해낼 수 없는 힘이다.

어떤 말로도 이 힘을 설명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이 힘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운명의 힘은 속성도, 실체도, 규칙도 없기 때문에 탐지하기 어렵다.

역설적이기 그지없지만 확실히 실존하며, 세상 어디에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천하의 모든 것.

세상 만물.

생명체든 무생물이든, 강한 신령이든 먼지처럼 약해 빠진 것들이든, 뒤에서 이들을 연결시키고 변화시키는 큰 손이 바로 운명이다.

운명. 그것은 붙잡을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유일한 힘이다.

운명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지만, 사실 그것은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자기 위안도 결국에는 운명이 이끌어 낸 결과일 뿐이다. 아무리 강해 봤자, 아무리 높은 마력에 도달해 봤자, 운명으로부터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천제현은 운명의 힘을 방출했다.

물론, 거시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의 운명의 힘은 아주 미미했다. 세상에 흐르는 운명의 힘이 거대한 바다라면, 천제현의 힘은 망망대해 속 작은 돌멩이 정도랄까. 하지만 그렇게 약한 힘이라 해도, 한두 사람의 운명을 바꾸기에는 충분하다.

이번 일격은 천제현의 정신과 영혼까지 소멸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그를 덮쳐왔다.

그런데 천제현은 속수무책의 상황에서 운명의 힘을 촉발시켰다. 운명의 힘은 물리적인 힘과 달리 직접적인 방어나 공격의 수단이 되지 않는다. 그런 힘을 갖고 정면에서 은빛 거인에게 맞서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운명은 어떤 존재와도 반목하지 않으며, 그저 대상의 생존 궤도를 바꿔 버릴 뿐이다.

원래대로라면 천제현의 정신과 영혼 모두 소멸되어야 했겠지만, 놀랍게도 그는 멀쩡했다. 천제현은 어느새 은빛 거인의 일격을 막아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원리도, 규칙도 없다.

운명은 존재의 근원까지 파고들어 강력한 힘으로 결과를 바꿨다.

중생들이 일 더하기 일은 이가 아니냐고 논쟁할 때, 문제 자체를 일 빼기 일로 바꿔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운명의 힘이었다.

모든 규율과 존재를 무시하고 근원부터 바꿔놓는 것이 운명이기에 운명의 힘을 제어할 수 있는 자는 세상만물을 주무를 수 있으며 이 세상에 못 죽일 자가 없다. 그의 앞에선 세상의 모든 법칙과 규율도 웃음거리일 뿐. 그가 손바닥을 뒤집기만 하면 생사가 결정된다. 이런 존재가 ‘신’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운명의 힘의 씨앗은 천제현의 몸속에서 싹을 틔웠다.

다만 아직은 그리 강력한 수준이 아니었기에, 그가 펼칠 수 있는 능력도 아주 미미했다. 은빛 거인의 무시무시한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내자 운명의 힘은 거의 다 소진되었다.

“죽어라!”

천제현은 마력을 응집시켜 바늘로 찌르듯 의식체 본연의 핵심을 공격했고, 의식체의 일부를 없앴다. 그러자 의식체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달의 신 유적 속의 신식결정이 폭발하고 은빛 거인이 터졌다.

모여들던 무수한 신식들은 다시 망망대해로 변했고 천제현은 그 속에 가라앉았다.

천제현의 두 눈 또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외상은 전혀 없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강력한 운명의 힘은 반발력 또한 굉장하다. 천제현의 영혼과 정신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

다행히도.

천제현의 소멸 목표는 의식체였다. 달의 신 유적 속의 신식결정은 이글거리는 화염 속에서 조금씩 녹아내리더니 결국 미세한 마력으로 변해 모조리 그에게 흡수되었다. 그 덕에 방금 생긴 부상들이 회복되었다.

신식, 방대한 신식, 달의 신 본연의 신식이 모조리 그를 향해 몰려왔다.

이 신식은 처음 죽음의 설원에서 마주친 것보다 수백, 수천 배는 강했다.

천제현이 거대한 스펀지처럼 신식결정을 감싸자 신식결정이 그의 몸속으로 녹아들었다. 그와 함께 천제현의 마력이 미친 듯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신마로 개조되어 이미 완벽에 가까운 몸이 달의 신의 힘까지 삼켰으니, 마력 단계도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펑.

달의 신 유적 전체에 방대한 마력이 자욱하게 깔렸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부활을 꾀하려던 달의 신 호위병들이 꺼져 버린 형광등처럼 순식간에 빛을 잃고 어두워졌다. 달의 신 유적에서부터 시작된 이 강렬한 진동은 달 전체로 퍼져나갔고 달에 사는 모든 종족과 생물들은 화면이 정지한 듯 멈췄다.

배후에서 영향을 주던 의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달 종족 괴물들의 공격성은 급전직하했다.

요동이 멈추자, 이번에는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안개처럼 보이는 이 마력은 달 표면을 뚫고 순식간에 광활한 지역을 뒤덮었다.

“저건 뭐지!”

“어서 와서 보라고!”

고개를 든 대륙 사람들은 상공에서 구안마신의 형체를 보았다. 9개의 차디찬 눈동자가 저 높은 곳에 앉은 신처럼, 평범하고 비천한 지상의 생명들을 내려다봤다.

“천제현 오빠가 천역 문턱을 뛰어넘었어!”

기적성에 있던 비비안이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너무 요란한걸, 대륙 사람들 모두 보고 있잖아!”

남궁혜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대장은 역시 제멋대로라니까!”

공화련과 공서련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천지의 이변이 요란할수록 쉽지 않은 돌파란 뜻이고, 그로 인한 수확이 더 많다는 의미다. 이제 천제현은 진령 경지에서 천역 경지로 들어섰고 대륙 강자의 대열에 올라섰다. 이것은 놀랍도록 비약적인 발전이자 돌파였다.

사실 천제현은 기적상회의 모든 자원을 사용할 수 있으므로 계속 평소처럼 수련한다면 반년 내에 무난하게 천역 경지에 이를 전망이었다.

그러므로 달의 신 유적에서 단계를 뛰어넘은 것이 축하할 만한 일이긴 했지만, 그렇게 놀라운 사건은 아니었다. 천제현에게 더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달의 신이 남긴 신식을 삼키고 그의 신식이 대폭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제 천제현의 신식은 ‘현성’ 급을 넘어 ‘불멸’ 경지에 이르렀다.

입미, 심안, 심등, 현성, 불멸.

불멸은 신식의 다섯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여기까지 신식을 발전시킨 사람은 이 시대를 통틀어도, 아니, 역대 모든 인류를 통틀어도 몇 되지 않았다. 신마급 존재들의 신식조차 불멸 경지에 머물 뿐이었으니까.

한 생명체의 신식이 불멸 경지에 도달하면.

그의 영혼과 육신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다.

천제현은 이제 몸에 대한 의존도가 크게 낮아졌다. 치명적인 육체 공격을 받아도 그의 영혼은 흩어지지 않을 것이다. 머리에 중상을 입어 뇌가 파괴되어도, 그의 사고 능력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불멸 신식의 장점이었다.

이렇게 천제현은 점점 육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오랫동안 영혼과 몸을 분리시킬 수 있고 머리가 없어져도 사고 능력을 유지할 수 있다. 불멸의 신식과 영혼! 이것은 그 어떤 생명체도 상상할 수 없는 경지였다.

기운을 거둔 천제현은 눈을 떴다. 번쩍 뜬 그의 눈동자에 어렴풋이 9개 색깔의 빛이 맴돌았다.

월나스, 랜스로드 등 달의 신 유적 탐사에 참여한 이들이 모두 그의 곁에 모여 있었다. 표정은 가지각색이었지만, 놀라움과 경탄의 빛만은 동일했다.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이들은 모두 천역 경지의 고수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천역 경지로 들어설 때는 방금 전의 천제현처럼 엄청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역사상 이런 선례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누가 경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천제현은 달의 신 유적에서 직접 달의 핵심에 있는 의식체와 맞섰다. 이 의식체는 달의 신의 신식과 남은 영혼 조각들이 변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신령은 불멸의 존재다. 지금까지 신령을 죽일 수 있는 힘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반신급의 존재로 알려진 이 의식체를 해치울 줄이야.

아홉 색깔이 맴도는 그의 눈빛을 바라본 모두의 몸에 전율이 흘렀다. 신마가 자신들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 경외심과 놀라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천제현은 바로 빛을 거두고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천역 경지에 이르자 구안마신의 힘이 각성되었고, 이제 비로소 정령의 힘을 완벽히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천역 경지와 진령 경지는 단순한 실력의 경계가 아니다. 그것은 근원적인 차이로서 제 아무리 수명이 짧은 인간도 일단 천역 경지에 들어오면 800년~1,000년 정도까지 살 수 있다.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로군.

랜스로드는 일 년 전 쯤, 천제현이 막 혼돈의 숲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당시 그는 진령 경지에도 이르지 못한 혼성 술사였다. 그 후 2년이 채 안 된 시간 동안 엘프들이 200년 동안 수련해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대륙에 천역 고수가 한 명 더 늘었군.

새로운 강자가 생겼어.

랜스로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주, 천역 술사가 된 것을 축하하네!”

썬더, 클로, 데스윙, 파샤 등도 모두 축하의 말을 전했다. 천제현이 천역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의 지위가 아무리 높아도 5대 거물들 마음속에는 여전히 편견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역 경지의 실력에 이른 지금, 그는 지위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그들과 동등한 수준이 되었다.

천제현의 마력 상승은 기적성의 성장을 의미했다. 그는 혼돈의 숲 최고 지도자 지위를 다시 한 번 공고히 했고, 그에 따라 기적성 또한 혼돈의 숲에서 진정한 핵심 도시로 거듭날 수 있었다.

천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 덕분에 순조롭게 난관을 돌파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가면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지금 달의 신 유적의 상황은 어떤가요?”

월나스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주님이 신식 모체를 제압한 후 달의 신 호위병은 회복 능력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달의 신 궁전으로 들어가 유적의 보물들을 발굴했죠.”

천제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눈부신 빛이 사라진 광구(光球)가 잠잠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모든 달 의식의 모체가 회전을 멈추면서 강력한 달의 신 호위병 또한 재생 능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그들의 근원은 의식체가 사라진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천제현은 신식을 시전하여 달의 신 호위병의 근원으로 들어갔다. 그의 신식은 어떤 거부감도 없이 달의 신 호위병에게 연결되었다. 천제현의 생각 한 번에 달의 신 호위병의 근원이 빛을 내더니 주변에서 마력을 미친 듯이 흡수해서 곧 거대한 거인으로 변신했다.

월나스는 놀라워하며 말했다.

“이것은…….”

천제현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엘프왕 폐하, 놀라지 마세요. 제가 달 의식의 모체를 제련했습니다. 달 의식 모체처럼 모든 달의 생물들을 제어할 수는 없지만, 생명체들을 개조하고 그들의 행동지령을 바꿔서 공격성을 띄지 않게 만들 순 있지요.”

되살아난 달의 신 호위병은 나무기둥처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주변 사람들을 못 보는 것 같았다.

천제현은 이런 능력을 이용해 모든 달의 생명체들을 제어할 수 있다. 달에서만큼은 무적의 존재인 셈이다. 다만 지상으로 이들을 데려갈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달 종족으로 군대를 구성한다면 제국을 세우고도 남을 것이다.

“오늘부터 달의 신 궁전과 달의 신 유적은 나이트엘프가 지키도록 하세요. 저는 달의 신 궁전에 전송탑을 세워서 밤의 숲과 바로 연결되게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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