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677화 (677/729)

# 677

제677장 기적 정상회의

대륙 면적의 90% 이상은 지적 생명체를 찾아볼 수 없는 땅이지만, 사실 나머지 10%만으로도 수천억 지적 생명체를 품기에는 넉넉하다.

지적 생명체들이 형성한 제국급 세력은 총 14개로 그중 인간족 제국이 여섯, 마수령 제국이 넷, 엘프족 제국급 세력이 둘, 용족 제국급 세력이 하나, 망령 제국급 세력이 하나다.

제국과 제국급 세력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인간 제국과 마수령 제국은 정식 국가 체제를 갖춰 돌아가며, 최고 지도자인 제왕 한 명이 모든 권력을 독점한다. 반면 제국급 세력은 어디까지나 ‘세력집단’에 불과하다. 제국에 준하는 저력을 지녔지만 정식 국가가 아니기에 국호도 없고 내부 결집력도 떨어진다.

제국급 세력의 예시로는 밤의 숲에 사는 나이트엘프들이 있다.

밤의 숲은 규모 면에서는 혼돈의 숲과 비슷하지만, 온갖 종족이 어지럽게 뒤섞인 혼돈의 숲과는 달리 삼림 전체가 오로지 엘프들의 전유물이다. 이러한 단일성이 밤의 숲을 제국급 세력의 반열에 올려주었던 것이다.

물론 나이트엘프들이 번듯한 나라를 세우고 사는 건 아니다. 밤의 숲 엘프들은 소규모 원시 공동체 단위로 흩어져 생활하다가 외부의 침입이 있을 때만 힘을 합쳐 적을 막아낸다. 그렇기에 전반적인 역량은 대륙의 제국들 못지않더라도 정식 제국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밖에 대표적인 제국급 세력으로는 거룡 십만 마리가 모여 사는 용들의 땅, 리치와 망령들이 지배하는 저승바다가 있다. 이 두 지역은 면적은 좁지만, 거대 제국에 전혀 밀리지 않는 힘이 결집된 곳으로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히는 세력들의 근거지다.

열네 개의 제국급 대형 세력 아래에는 전국급 세력이 백오십여 개, 기타 크고 작은 왕국 천여 개가 존재한다. 현재 대륙 세력구도의 밑바탕은 이러한 피라미드 형태의 계급구조다.

기적성이 통일한 혼돈의 숲 역시 향후 제국급 세력으로 발돋움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현재로서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일 뿐이다. 내부의 불협화음이 워낙 오래 지속된 탓에 혼돈의 숲은 어느 면으로 보나 아직 제국급 위치를 넘볼 상황이 못 된다. 게다가 혼돈의 숲이 뒤를 추격해오는 걸 다른 거대세력들이 잠자코 지켜만 볼 리가 없다. 제대로 기지개도 켜기 전에 짓밟아 버릴 공산이 크다.

혼돈의 숲과 기적상회가 갑자기 주목받게 된 계기는 달 탐사 로켓 발사였다. 무명의 변방세력이던 기적상회와 기적성은 달 표면에 발을 디딘 이후로 순식간에 화제의 중심에 섰다.

좋은 일이긴 했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부정적인 측면도 있는 게 사실이었다.

일단 기적상회 제품이 각국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보름 만에 상품 수요가 10배로 늘었다. 야간까지 공장을 돌려도 도저히 감당이 안 될 지경이 되자 당장에 품귀 현상이 일어났고,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여기에 현지 물가까지 반영된 고로 어지간한 제국급 국가의 시장에서는 축음기 한 대에 마석 천 개 이상을 부르기도 했다.

기적성의 대외 수출액은 이후 한 달 동안만 해도 마석 수천만 개에 달할 것으로 점쳐졌다. 대폭 늘어난 무역 흑자는 기적성의 대륙진출 전략에 탄탄한 기반이 되어줄 예정이었다.

기적성이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 그 빛나는 성과에 눈독을 들이는 자들 역시 생겨났다.

가장 좋은 예는 대건제국이었다.

설사 천제현이 현자 우문희나 대장군 형무영과 충돌하지 않았다고 해도 대건제국은 필연적으로 기적상회라는 먹잇감을 노렸을 것이다. 일단 지리적으로 기적성과 가깝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대건제국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기적상회의 수입은 조만간 몇 배나 불어날 게 확실했다.

화수분이 따로 없지 않은가.

주변의 수많은 속국과 역내에서 완전히 고립된 만교전국, 지금 대건제국은 그들과 손잡고 기적숲을 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전면전은 두려울 게 없는 천제현도 쉼 없이 신경을 건드리는 국지 도발은 곤욕스러웠다.

이때.

기적성에서 온 대륙을 들썩이게 할 만한 소식이 날아왔다.

숲 연맹이 처음으로 개최하는 기적 정상회의에 대륙 수백 개 나라의 군주와 제왕들을 초청한다는 소식이었다.

회의 취지는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기적상회에서 대륙인들의 삶을 뒤바꿔놓을 만한 제품을 발표한다.

둘째, 기적성의 플랫폼과 기술을 공유할 협력 파트너를 모집한다.

셋째, 지하세계와 우주세계로의 진출루트를 대륙 대·소 세력에 개방하고 개발사업에 필요한 편의를 제공하는 동시에 수익을 함께 나눈다.

넷째, 천문과 운문에 합류할 인재를 모집하고, 기적아카데미 신입생 모집 범위는 전 대륙으로 확대한다. 재능과 잠재력만 있다면 황실 출신이든 천민 출신이든 기적상회로부터 동등한 대우를 받을 것이다.

하나같이 경천동지할 내용이었다.

우선 첫째 항목, 그간 숱하게 이뤄낸 과학적 업적으로도 기적성의 갈증을 채우기에는 부족했단 말인가? 항상 소리소문없이 진행하던 일을 유독 떠들썩하게 강조하는 걸 보면 이번에는 확실히 달라도 뭔가가 달랐다. 안 그래도 기적상회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는 대륙 국가들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다음으로 둘째 항목, 플랫폼 개방이야 대륙 각국의 귀족들에게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일 수밖에 없었다. 더 놀라운 건 기술까지 공개할 예정이란 점이었다. 기적상회가 보유한 과학기술은 다른 국가들이 꿈에도 바라 마지않는 것이었다.

이어서 셋째 항목, 대체 어떤 플랫폼과 어떤 기술을 공유할 예정인지 무척이나 애매모호한 두 번째 항목과는 달리 셋째 항목은 뜻하는 바가 뚜렷했다. 지하세계에서 우주세계까지, 다른 세력들도 새로운 세상을 누빌 수 있도록 돕고 거기에서 나는 귀중한 자원까지 나누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넷째 항목, 이전 세 개 항목이 귀족 가문, 세력집단, 국가 차원에서 환영할 만한 내용이었다면 네 번째 항목은 개인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이었다. 기적성의 과학기술이 천하제일인 건 온 세상이 다 아는 바였다. 기적성의 기술을 흡수한다는 건 곧 대륙에서 가장 선진화된 지식을 손에 쥔다는 의미였다. 아마 각국 황제들도 자식들을 기적성으로 보내지 못해 안달을 낼 것이다.

대륙은 너무 큰 땅덩이였다.

소식이 중간에 차단되거나 변조될 가능성을 우려한 천제현은 사자 수십 명을 기적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전송탑으로 보내 그곳에서부터 각국을 향해 파발을 출발시켰다.

대륙 국가들이 들끓어 오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인간족, 서대륙, 분천제국.

폐관수련마저 중단하고 나온 분천대제가 문무백관을 모조리 입궁시켰다. 드높은 보좌에 앉은 분천대제가 말했다.

“최근 전해진 소식에 대해서라면 경들도 이미 알고 있으리라 믿소. 이 재상,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분천제국의 현자이자 재상을 지내고 있는 이(李)씨 성의 노인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놓칠 수 없는 호기입니다. 기적성의 허실도 확인할 겸 숲 연맹과 손잡을 기회도 되겠지요. 참석하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들에 좋은 일만 시켜주는 격입니다.”

“일리가 있군!”

사실 분천대제는 이미 결정을 내린 뒤였다. 신하들을 부른 건 그저 보여주기식 절차에 불과했다. 분천대제가 손을 들어 지시했다.

“내 친히 기적성에 다녀올 것이니 재상과 상장군은 채비를 하시오.”

재상과 상장군이 황제를 향해 허리를 숙여 포권했다.

***

인간족, 중대륙, 풍월제국.

풍월제국에는 대륙의 뭇 나라들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었다. 바로 여자들이 권력을 쥔 사회라는 점이었다. 풍월제국에서는 황제에서 각 가문의 가주에 이르기까지, 지배적 위치 대부분이 여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반대로 남자들의 지위는 비천하기 이를 데 없었으니, 덕분에 이 나라는 대륙에서도 별종 취급을 받았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궁 대전에 모인 신하들도 열에 일고여덟은 여인의 몸이었다. 화사한 실내장식에 향긋한 내음이 떠도는 황궁에는 구석구석 섬세한 여인의 감각이 배어 있었다. 황궁이라는 장소가 마땅히 가져야 할 위엄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풍월여제는 긴 의자에 나른하게 모로 누워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친 자세였다. 새빨간 치마 아래로 긴 다리가 은근히 드러나 보였는데, 붉은 옷감과 흰 피부의 조화가 황제의 자태에 요염함을 한층 더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가느다란 비수 여러 개로 정교하게 틀어 올렸고, 이목구비는 황홀할 만큼이나 완벽했다. 미간에 찍힌 붉은 문양은 비술 수련의 증거인지 아니면 단순한 장식용인지 알 길이 없었으나, 그로 인해 고혹적인 미모가 더욱 돋보이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름다움, 나긋함, 매혹, 위엄, 그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혼돈의 숲에 한 번 다녀와야겠구나. 십삼성녀를 준비시켜라!”

여제는 대신들의 의견을 묻지도, 상의하는 시늉이라도 하려는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은 볼멘 목소리 하나가 없었다. 풍월여제가 기적성 물건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 하는지, 기적상회와 기적성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빤히 아는 판에 누가 감히 나서서 여제의 흥을 깨겠는가?

***

밤의 숲.

은발의 나이트엘프들이 엘프궁전에 집결했다.

“혼돈의 숲이라면 영원의 숲이 있는 곳 아닌가? 세상 모든 엘프들의 고향인 영원의 숲!”

“기적성이 고대 생명수까지 키워냈다더군. 나무엘프와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우리로서는 모른 척 넘어갈 수 없는 일이야.”

“우리 나이트엘프는 달의 신을 섬기는 종족이 아닌가. 그들은 벌써 달에 다녀왔다잖아. 기적성에 가서 달에 신전을 짓게 도와달라고 요청해야겠네!”

“투표를 시작하지!”

나이트엘프 의회가 투표에 돌입했다. 밤의 숲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본 적이 없는 나이트엘프들이었지만, 이번에는 사안이 너무도 중대했다. 고대 생명수가 자라난 것도 모자라 달에 신전을 지을 기회까지 생긴다고 하지 않는가. 기적 정상회의 참석 안은 압도적인 동의를 얻어 통과됐다.

***

저승바다.

대륙 한복판에 박힌 이 내륙해는 일 년 내내 음산한 기운에 뒤덮여 있는 망자들의 천국이었다.

거대한 유령선 한 척이 공중에서부터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왔다. 죽음의 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그림자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수만에 달하는 리치가 경건한 자세로 수면 아래에서 솟아오르더니 마치 침묵의 조각상처럼 잿빛 안개와 잿빛 바다를 배경으로 열을 맞춰 늘어섰다.

“기적성이 지하세계 시공터널의 비밀을 쥐고 있다.”

“네간계에 가서 그 통로를 찾아야 한다!”

“출발 채비를 하라. 기적성으로 간다.”

***

용들의 땅, 무수한 거룡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지면에 내려앉았다.

“니드호그가 운이 좋았군.”

“한 번 만나러 가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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