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6
제676장 배후세력
천제현은 이미 장응전국도 헤집어 놓은 마당에 만교전국 하나쯤 더 건드린들 대수냐 싶었다.
“두 분, 괜찮아요?”
“방심했을 뿐이야. 천역 술사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비비안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천제현 덕에 순식간에 상대를 제압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남부끄러울 뻔했다.
“이제 어쩔 거야?”
“흥,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 같으니.”
제대로 한 방 먹은 남궁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상태였다.
“바로 죽여 버려!”
“살려두면 쓸데가 있을 거예요.”
천제현이 공간 마력을 가동하자 둘은 한꺼번에 수정선 위로 순간이동했다.
천제현의 능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도한 인어족들은 오체투지라도 할 태세였다. 기적성주의 이름값이 아깝지 않은 인물이구나.
천제현은 인어족 선장을 보며 말했다.
“인어족 친구분들의 세심한 배려에 멋진 여행이 될 수 있었습니다. 흑뢰 전투기가 수정선의 회항을 호위할 것입니다. 저희 일행은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교룡인 대장은 천역 경지의 술사이다.
당장은 포로로 잡았다고는 해도 몹시 위험한 존재다. 게다가 만교왕이 추격할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이제 천제현은 더 이상 수정선을 타고 유유자적하게 회항할 수 없었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죠!”
천제현 일행은 전송두루마리를 사용하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전송두루마리에 대해 알고 있는 선장을 제외한 나머지 인어족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작은 두루마리 하나로 이 먼 바다에서 서해성까지 바로 이동할 수 있다고?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정말 놀랍군요!”
“흥, 기적성의 물건들을 네놈들이 어찌 이해하겠느냐. 이렇게 오래 살아온 나도 하늘을 나는 기계가 불을 뿜는 건 처음 보는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 인어족 선장이 감탄 어린 말투로 천천히 중얼거렸다.
“기적성과 동맹을 맺은 건 정말 훌륭한 결정이었군. 우리의 자손들은 대대로 그 덕을 보며 살 거야!”
십여 대의 흑뢰 전투기가 수정선을 호위하며 천천히 수정만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편, 서해성으로 이동한 천제현 일행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파샤에게 포로를 건네준 것이었다.
만교전국은 서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세력이다. 만교전국이 정말 서해성을 배신했다면 서해성은 한동안 골머리를 앓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서해성은 숲 연맹의 일부였으므로 서해성을 건드리는 것은 천제현을 건드리는 것과 같았다.
지금까지 만교군도는 숲 연맹과 직접적인 충돌이 없었으며, 서해성과는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다.
놈들은 강력해진 숲 연맹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봤을 때, 만교전국의 배후에 다른 세력이 도사리고 있으며, 만교군도는 그저 그들의 끄나풀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파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공화련이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주 중요한 정보를 가져다 주셨소. 짐작도 못 한 채로 뒤통수를 맞을 뻔했구려. 여러분이 잡아오신 저자는 만교왕 루카스의 삼대 심복 중 한 명이라오. 루카스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 입을 열지 않을 테니 정보를 알아내긴 힘들 듯하오.”
“입이 무겁다고요?”
아직 분이 안 풀린 남궁혜가 소매를 걷어 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한 번 심문해 보죠!”
“진정해요.”
천제현이 남궁혜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런 방법으로 알아낼 수 있는 거였으면 파샤 성주님도 저렇게 말씀하시진 않았을 거예요.”
“그럼 포로로 잡아온 의미가 없잖아?”
“기다려 보세요. 세상에 안 열리는 입은 없으니까요. 방법을 모를 뿐이죠.”
천제현이 공화련을 돌아보며 말했다.
“큰아가씨, 황야고원에 한번 연락해주시겠어요? 사람 좀 보내달라고 요청해 보세요.”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공화련이 휴대전화를 꺼내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십여 분이 흘렀을까.
서해성 전송탑에서 독특한 이민족 복장을 한 마수령들이 나타났다. 양족과 뱀족, 도마뱀족이었는데, 모두 품이 큰 도포를 입고 괴이하게 생긴 가면을 쓰고 있었다. 손가락과 손목, 목에는 전부 뼈로 만든 장식품들이 걸려 있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달그락거렸다. 그 소리에서는 듣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힘이 느껴졌다.
공화련이 다가가 그들을 영접하며 말했다.
“마투 주교님,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수령들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자는 평범해 보이는 노인으로, 뱀족이나 도마뱀족의 변종 같았다. 그들과 달리 비늘은 없었지만, 온몸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했고 눈동자는 하얀 막으로 덮여 있어 맹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지팡이를 짚으며 정확하게 천제현과 공화련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두 분 성주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무한한 영광이겠습니다.”
그 마수령에게서 독특한 기운을 느낀 파샤가 입을 열었다.
“이 분은?”
천제현이 공화련 대신 그를 소개했다.
“황야고원 샤먼교의 주교이신 마투 님이십니다. 샤먼교는 포로 심문에 특화되어 있지요. 반나절이면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샤먼교는 황야고원에서 영향력이 꽤 큰 세력이다. 마투 주교의 지위는 클로 누카잔 다음이었으며, 무공 또한 천역 3성에 달하는 고수였다. 샤먼교가 클로의 성 안에 위치하고 있다고는 하나 클로라 해도 마투에게 함부로 명령을 내릴 수는 없었다. 그런 자가 공화련의 한 마디에 달려오다니 기적성의 위엄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적성이 한 번도 남의 위에 서려는 태도를 보인 적은 없었지만, 숲 연맹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였기 때문이다. 이제 혼돈의 숲 영역을 넘어 다른 지역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있었다. 더 많은 신도를 모아 교단을 발전시키고 싶은 샤먼교로서는 기적성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파샤는 마투 주교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으나, 샤먼교의 수법에 대해서는 자주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심문에 있어 샤먼교 주술사보다 적임자는 없었다.
그들은 각종 약품으로 사람의 심지를 쇠약하게 만드는 건 물론이고, 유혹이나 매혹술 등으로 상대의 이성을 잃게 하거나 심지어 조종하는 것까지도 가능했다.
‘숲 연맹에는 인재가 즐비하군.’
교룡인 대장보다 무공도 높고 각종 샤먼 주술에 정통한 마투는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원하는 정보를 전부 얻어냈다.
“심문 결과, 숲 연맹의 세력 확장으로 불안해진 일부 국가들의 짓이라는 걸 알아냈습니다.”
마투가 천제현 일행에게 보고했다.
“특히 기적상회의 과학기술을 모두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지 않습니까? 십여 개 세력이 암암리에 연맹을 맺어 우리를 견제하려는 것 같습니다. 만교전국은 그들이 끌어들인 앞잡이에 불과하지요.”
“역시 그랬군.”
아무리 숲 연맹이 못마땅해도 실력 차이가 이렇게 확연한 상황에서 대놓고 손을 쓸 리가 없었다. 그러나 숲 연맹을 겨냥한 배후 세력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예상 밖이었다.
파샤 성주는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십여 개 국가가 손을 잡다니. 상대의 세력은 점점 더 커질 텐데, 이대로 가다간 숲 연맹이 봉쇄되고 말겠소.”
이번에는 공화련이 입을 열었다.
“상대 세력의 정확한 규모는 얼마나 되나요? 주도 세력은요?”
마투가 천천히 대답했다.
“상대 세력에 가담한 왕국 몇 개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만, 그들 안에 전국과 제국이 포함되어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만교전국까지 포함하면 총 3개의 전국과 1개의 제국이 있습니다. 그 제국은 바로 대건제국이고요.”
파샤가 가장 걱정하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만교전국이 대건제국과 손을 잡다니.
대건제국은 서부 대륙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대국으로, 서해안 소국들에 침을 흘린 지 오래였다. 얼마 전에도 서해성과 만교전국이 힘을 합해 대건제국의 야심을 저지한 바 있지 않은가. 서해성이 기적성과 동맹을 맺자마자 만교전국이 대건제국에 가서 붙을 줄이야.
대건제국이 숲 연맹과 충돌하면 그전쟁은 몇 년 안에 끝나지 않을 것이다.
대건제국은 기적상회가 지금까지 부딪혔던 어떤 상대와도 다르기 때문이다. 숲의 거물들의 경우, 아무리 강해 보여도 인구가 적다거나 하는 단점이 하나씩은 있었다. 장응전국도 마찬가지였다. 언뜻 보기에는 강해 보였지만, 사실 병력을 남용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대건제국은 다르다.
대건제국은 7800년의 역사와 저력을 지닌 강력한 대국이다. 국토 면적도 넓으려니와, 인구 수는 210억 명에 달했다. 천제현의 세력권 안에 있는 왕국연맹과 십여 개의 대소 왕국 인구들을 모두 더해도 대건제국에는 미치지 못했다. 인구만 봐도 이 정도이니 다른 부분들은 또 어떻겠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대건제국이 서쪽 대륙의 강국이라는 사실이었다.
대건제국은 서방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숲 연맹이 그들과 충돌한다면 서해의 수많은 국가들은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서해성과의 협력을 중단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해성의 손실은 추산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가장 큰 수혜자는 만교전국이 되겠지.
“대건제국 짓이었군요. 뭐, 짐작 못 한 바는 아닙니다.”
곤란한 표정으로 턱을 어루만지던 천제현이 갑자기 옆에 있던 공화련을 보며 말했다.
“만교전국을 포함한 다른 8~9개의 왕국들은 모두 대건제국의 장기 말에 불과해요. 우리의 진정한 상대는 대건제국인 거죠.”
그 말에 공서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도 안 돼. 그럼 우리, 제국을 상대해야 되는 거야? 안 돼. 그들의 전투력은 우리보다 열 배는 많을 거라고!”
언제나 기세등등하던 남궁혜까지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대건제국은 대륙 최강의 나라 중 하나니까.
그러나 천제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뭘 걱정해요? 대건제국이 주변에 있었다면 우린 진작 밟혔겠죠. 이렇게 성장할 수도 없었을 테고요. 하지만 놈들은 우리로부터 아득하게 멀리 떨어져 있잖아요? 그러니 이제야 우리의 소문을 듣고 반응하는 거겠죠.”
그러나 대건제국의 행동은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제국의 군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들 사이에는 엄청난 거리가 놓여 있지 않은가.
게다가 숲 연맹의 도시들은 대부분이 산맥과 숲, 심지어 지하 깊은 곳에 위치했다. 대건제국이 군대를 보내 수천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숲을 일일이 뒤지며 그들을 하나씩 멸망시킨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천제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큰아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공화련도 몇 초간 생각한 후 대답했다.
“대건제국이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진 않을지 몰라도 전국 세력들을 조종하면 우리를 괴롭히기에는 충분할 거야. 그러니 피할 게 아니라 정면 대결을 하는 게 좋겠어. 상대가 강하긴 하지만, 이 대륙에 제국이 그들 하나뿐인 건 아니잖아? 놈들도 당장 우리를 어쩌진 못하겠지. 그러니 우리는 다른 제국과 협력을 모색하는 게 좋겠어.”
“옳으신 말씀이에요!”
천제현이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기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