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4
제674장 만교전국
기적상회는 혼돈의 숲과 왕국들을 뛰어넘어 전 대륙에 거대한 변혁의 흐름을 가져왔다. 라헬과 피시송은 그 흐름에 합류한 수많은 사람들 중 일부 사례일 뿐이었다.
남하국의 작은 성에서 탄생한 기적상회는 거물로 성장했고, 거대한 그물을 펼치듯 대륙 곳곳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며 자원과 부, 인력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천제현은 숲 연맹이 얼마나 바쁜지,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 듣지도, 묻지도 않고 있었다. 지금 그는 아름다운 인어 수정선을 타고 비취빛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자매를 맺은 공서련과 비비안, 남궁혜는 휴양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짧은 치마 아래로 드러난 눈처럼 희고 맵시 있는 세 쌍의 다리가 천제현의 눈을 현란하게 만들었다. 위에는 안이 비치는 얇은 옷에 모자를 쓰고 있었다. 놀러 나온 보통의 귀족 아가씨들과 전혀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천제현과 공화련은 모래사장의 벤치에 누워 따뜻하고 습한 기후를 즐기면서 기적화원에서 생산된 최고급 신선주를 마시고 있었다.
신선주를 한입 삼킨 공화련은 오묘한 힘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일반인들은 냄새 한 번만 맡아도 삼생의 복이라 불리는 술이었다. 신선주는 마력이 심후한 대술사들도 운이 좋아야 간신히 구할 수 있는 물건으로, 수련 정체기에 마력을 높이는 돌파구로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에게 신선주는 그저 술일뿐이었다.
신선주를 섭취한 공화련은 그 힘을 제련하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고 그저 고급 음료수를 즐기듯 신선주의 힘이 몸 안 곳곳으로 퍼지도록 내버려두고 있었다. 누가 봤으면 어처구니없어 혀를 내두를 행동이었지만, 기적성의 성주에게 신선주는 귀한 물건 축에도 속하지 않았다.
무섭게 발전한 기적성과 기적상회의 유동 자산은 천만 마석에 달했다. 가쿠계의 엘리카시스 보물창고에서 손에 넣은 엄청난 보물들을 제외해도 그 정도였다. 수천만 마석에 달하는 기적상회의 비축 자원까지 더하면 천제현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부호일 것이다.
설령 마석 비축고가 동이 나 재정이 어려워진다 한들 기적은행이 있지 않은가. 숲 연맹의 금융업 발전 속도를 보면 기적은행에서 800만~1000만 마석 정도 융통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기적성의 자산 중 가장 중요한 건 마석도, 자원도 아니었다. 바로 불멸의 자산, 부동산이었다. 세계 각지에 건설된 전송탑과 통신탑, 네간계에 있는 광물자원, 숲 연맹 내부의 수십 개 자원장, 우주의 별 광산, 혼돈의 숲 여러 성과 상회에 지원한 투자금, 기적성의 운문연구실, 스마트 공장, 유전과 광산 등등…….
그 자산들은 추산이 불가능할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들까지 더한다면 엄청난 숫자가 될 것이다.
이제 숲 연맹은 기적상회와 운명을 함께하고 있었다.
숲 연맹의 크고 작은 상회들에 모두 기적성의 투자금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생명수 부족의 두 엘프 장로가 창업한 라이프엔터테인먼트 상회나 영원의 숲의 행렬언어상회, 타이탄산맥의 장비상회, 용의 고개의 재료상회, 심지어 황야고원의 초대형 용병단까지, 기적상회가 투자하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었다.
또한, 연맹 전체가 기적상회의 기술과 상품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숲 연맹이 번영하면 기적상회도 번영하고, 숲 연맹이 강력해지면 기적상회도 강력해진다는 말은 조금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든 것들이 고속 발전 중이기 때문에 기적상회가 지금부터 아무 것도 안 한다고 해도 1년 후에는 몇 배 이상 확장해 있을 것이다.
천제현은 자신의 세력이 대륙 최고라고는 감히 주장하지 못했지만, 상업 분야에서의 잠재력과 자금력만 놓고 보면 대형 제국 몇 개 외에는 어깨를 겨룰 자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공화련은 그런 기적상회의 최고 관리자였다.
그런 그들에게 신선주 몇 병이 대수겠는가?
천제현은 옥주전자를 들어 공화련의 술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며칠 쉬니까 기분 전환이 되죠? 가끔은 이렇게 쉬어줘야 머리도 잘 돌아가고 수련에도 도움이 된다니까요!”
공화련이 무슨 말을 하랴.
“여기서야 네가 회장인데 누가 네 말에 토를 달겠어? 집에서나 잘 하라고.”
“찬물 끼얹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천제현이 더 편한 자세로 돌아누우며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번 돈만 해도 500년은 놀고먹을 수 있을 걸요. 자기한테 그렇게까지 엄격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요?”
공화련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500년이 뭐야. 5천 년 동안 써도 다 못 쓸걸. 하지만 넌 아직 만족하지 못하잖아?”
천제현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네 야심과 꿈이 이 대륙에 머물러 있을 리 없으니까.”
공화련은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마력만 해도 그래. 넌 천역보다 더 높은 경지를 목표로 하고 있잖아. 난 네 꿈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그게 지금 우리가 이룬 것보다 훨씬 크다는 건 알아. 어쩌면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건 강력한 물질적 기초와 기술력이 있어야 이룰 수 있는 것일 테고. 그러니 지금의 기적상회로는 한참 부족하겠지.”
천제현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서련 아가씨의 말이 맞네요. 절 가장 잘 이해하는 건 큰아가씨라더니.”
천제현은 소리 내어 웃은 뒤 다시 말했다.
“그래도 생각해 보면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남하국의 소규모 상회에서 이 정도로 발전한 거잖아요. 사실 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속도였어요. 큰아가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없었겠죠.”
“같은 배에 탄 이상, 끝까지 함께하는 수밖에.”
그러자 천제현은 일부러 더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신다면 아예 서련 아가씨랑 같이 저한테 시집오지 그래요!”
하지만 공화련은 콧방귀를 뀌었다.
“꿈 깨시지!”
천제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화련이 보수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벽창호 수준은 아니었다. 어째서 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이렇게 망설이는 걸까?
“우리 얘기는 나중에 하자.”
공화련이 목소리를 낮추며 덧붙였다.
“난 공서련이가 유일무이한, 오직 그 애만을 위한 결혼생활을 하길 바라니까.”
천제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동생에 대한 애정이 아무리 깊어도 이 정도면 좀 심한데.
“바다가 정말 크네요. 이 배의 속도면 1년을 항해해도 끝까지 갈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때 공서련이 신나게 갑판을 뛰어왔다.
“천제현, 바다의 끝엔 뭐가 있어?”
비비안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천제현을 바라봤다.
“그건 차원 구조로 설명해야 할 것 같네요.”
천제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해수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세계는 구를 이루고 있어요. 구의 표면에서 멀어질수록 물질은 희박해지고 중력도 줄어들죠. 우주 밖이든 지하세계든, 아니면 대륙의 어느 곳이든 중력이 없는 지역이 존재하죠. 그래서 바닷물도 일정 거리 이상 흘러간 순간 더는 움직이지 않게 되죠. 그래서 서해의 끝은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세상인 거예요. 바닷물은 절벽 끝에 도달한 것처럼 심연으로 떨어지고요. 그 다음 땅의 심층부를 통해 다시 순환하게 되죠.”
“와, 천제현 진짜 대단하다. 뭐든지 다 아는 거야?”
“바보 같긴. 그러니 제가 대장 아니겠어요?”
바로 이때, 한 명이 없다는 걸 깨달은 천제현이 앉은 채로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남궁 아가씨는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앞쪽 바닷물이 솟구치더니 온몸에 화염이 이글거리는 남궁혜가 나타났다. 그녀의 열기로 인해 바닷물이 증발되면서 물안개를 만들고 있었다. 남궁혜는 바닷속에서 100미터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문어를 잡아 끌어올리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3급 마수는 될 것 같았다. 진령 5성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으리라. 그런 놈을 주먹 두 방에 해치운 것이다.
남궁혜는 제일 튼실해 보이는 다리 하나를 골라 갑판으로 들고 올라왔다.
“이것 좀 봐봐. 엄청 신선해 보이지? 오늘은 철판 문어구이야!”
공서련과 비비안은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이 신선한 문어다리를 기적상회의 최고 요리도구로 요리해서 신선주와 곁들이면 천국이 따로 있으랴. 여기에 생각이 미친 세 미녀는 재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화련이 어처구니없는 듯 웃으며 말했다.
“하여튼 저런 일에 있어선 죽이 척척 맞는다니까!”
천제현도 맞장구를 치려는데, 인어족 선원 한 명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부자연스러운 태도로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죠?”
“앞쪽에 만교군도가 있습니다.”
천제현과 공화련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거기가 어떤 곳인데요? 그리고, 왜 만교군도라고 하는 거죠? 설마 교룡이라도 사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만교군도는 서해에서 가장 큰 군도 중 하나로, 한때 푸른제국의 영토였습니다. 푸른제국이 분열한 후 독립했죠. 지금은 자칭 ‘만교전국’이라 한답니다. 만교왕은 교룡인족인데, 과거 푸른제국의 사대 총사 중 한 명이었을 정도로 무공이 엄청납니다. 파샤 성주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죠.”
“이번에도 전국이야?”
공화련이 눈썹을 찡그리며 천제현에게 말했다.
“교룡인들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만교왕 역시 한 성격하는 것 같고. 그러니 ‘전국’이라 칭하는 것 아니겠어? 그것만 봐도 꽤 자신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잖아. 건드리지 말고 지나가자. 서해 상황이 아직 평화로운 건 아니니까.”
평소의 천제현이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가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휴가를 즐기러 온 것 아닌가.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에이, 기분 잡치게. 뭐, 놀만큼 놀았으니까 그만 돌아가죠!”
인어족 선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거대한 수정선이 천천히 뱃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그들이 회항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거대한 망치로 선체를 때리기라도 한 양 수정선이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장에라도 배가 뒤집힐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젠장, 누구 짓이야!”
“바닷속입니다! 모두 조심하세요!”
거대한 바다교룡 두 마리가 수정선을 끼고 돌며 한 번씩 몸을 부딪치고 있었다. 그러나 파샤가 선물한 수정선은 인어족이 갖고 있는 가장 튼튼한 배 중 하나였다. 게다가 배 전체에 강화 작업을 해놓아서 천역 경지의 고수라도 쉽게 격침시킬 수 없었다.
그때.
사방팔방에서 괴이한 형태의 거대한 함선들이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인어족 선원들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만교전국의 함선입니다!”
천제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재미있군. 모처럼 건드리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려 했더니, 먼저 다가오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