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2
제672장 라헬의 행운
기적성은 지금까지 어떤 성도 점령하지 않았고, 식민 지배를 한 적도 없었으며, 먼저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즉,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1년 남짓한 시간에 거대한 혼돈의 숲을 손아귀에 쥐게 된 셈이다.
누가 봐도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성의 통치는 수백만 대군을 이용한 무력 통치를 뛰어넘는 효율을 자랑했다.
이제 엘프, 마수령, 해양종족들은 모두 기적성의 각종 상품과 전송시스템, 공간 운수 등에 익숙해졌으며, 그것들은 그들의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해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일부가 되었다.
잇따라 설립된 엘프은행, 거룡은행, 푸른은행은 기적성의 알파브레인으로 영업 관리를 했고, 마석과 보물들이 쌓여 있는 공간 창고 또한 기적성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기적성이 사라진다면 각 세력들은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리라.
기적성의 통치 방식은 온건하고 느슨해 보였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모두의 삶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기적성의 영향권 안에 있는 세력들 중 한 곳에서 정치적 혼란이 일어나고 정권이 바뀌어도 그들은 기적성에 등을 돌리지 못할 것이다. 계속해서 은행을 이용하고 통신 설비를 사용해야 하며, 알파 브레인도 필요할 테니까. 그들이 기적성을 필요로 하는 한, 기적성은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고 대륙 각지의 부와 자원을 한 곳으로 집중시킬 수 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상생을 전제로 한다. 상생을 전제로 한 협력만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적성의 도움을 받는 도시와 국가들은 기적성으로 인해 더욱 부유해지고 강력해졌다.
최근에는 서해성이 정식으로 숲의 연맹에 가입하면서 서해성 휘하의 열여덟 개 섬과 해저, 해안 도시들까지 함께 연맹에 들어오게 되었다.
천제현은 이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앞으로는 혼돈의 숲 그 어떤 세력도 숲 연맹에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다. 대륙 반대편의 제국들이 겁나지 않느냐고? 그는 그들에 대해서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무력과 저력이 숲 연맹보다 강할지 몰라도 그들과 혼돈의 숲 사이에는 아득한 거리가 있었다. 제국의 황제들이 대륙 반대편에 있는 천제현을 어떻게 하겠는가?
천제현은 호화로운 유람선에 미녀들을 태운 후 바다로 나갔다.
그리고 아름다운 수정만에서 원해 지역까지, 여러 개의 대형 섬나라와 서해성의 부속 도시, 그리고 해저 도시들을 순방했다. 방문하는 곳마다 이국적인 풍취가 물씬 풍겼다. 그런 풍경은 혼돈의 숲은 물론이요, 대륙 어디를 가도 보기 힘든 것이었다.
천제현이 한가롭게 미녀들과 유람을 즐기고 있을 때, 서해성은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얼마 안 가 서해성에 첫 번째 전송탑이 만들어지자 기적성에서는 기술자와 학자들을 보내 서해성에 부대시설들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나자 서해성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기적성의 통신기술은 자음탑과 자영탑을 기반으로 구현된 것이다. 지난 2년간의 부단한 개선으로 통신 신호는 더욱 강력해졌고, 보급 범위는 더욱 넓어졌다. 아직 낙후 지역이나 지하세계 같은 곳에서는 통신이 원활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지만, 일반 지역에서는 거의 완벽한 통신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또한, 기적성에서 생산된 휴대전화는 계속된 업그레이드로 인해 현재는 통신뿐만 아니라 사진기나 라디오 기능까지 갖추게 되었으며, 거의 완벽한 운용시스템이 탑재되어 메시지 전송이나 쇼핑몰 이용까지 가능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서해성에 통신망이 깔리자 기적성의 엔지니어들은 거대한 공간창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서해성은 장차 숲 연맹에서 기적성 다음 가는 무역 중심지가 될 전망이었으므로 그에 상응하는 강력한 물류 시스템이 필요했다.
기적쇼핑몰 플랫폼도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춘 상태였다.
파샤는 기적쇼핑몰을 서해성을 대표하는 무역 플랫폼으로 키우고 싶어 안달이었다. 서해 구역을 대표하는 서해성은 기적쇼핑몰의 설립과 운영을 책임질 뿐 아니라, 자체적으로 판매 루트를 개척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기적성의 인기상품인 통조림 식품, 라디오, 축음기, 사진기, 휴대전화와 각종 단약, 부적, 그리고 숲에서 구매한 가죽과 약초, 심해에서 가져온 각종 금은보화까지 모두 자체 창고를 통해 판매할 수 있다.
그렇게만 되면 전무후무한 거대 시장이 형성되리라.
숲과 바다, 산맥과 지하 등 원산지에서는 수많은 재료들이 매우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른 지역으로 가져가면 값이 최대 수십 배까지 뛴다.
이윤을 많이 남기는 상품은 공간 운수로 수급하고, 이윤이 낮지만 수요가 많은 상품은 공간 창고로 사들인 후 화물선으로 대륙 각지에 판매하면 된다.
다시 말해, 잘만 하면 서해성이 장차 해운의 중심지를 뛰어넘어 서해안 최대의 도매시장으로 발전할 거라는 얘기였다.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수십 개 나라들과 맺은 동맹 관계와 판매 루트를 이용하면 아주 빨리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다. 그렇게만 되면 돈방석에 앉게 되리라.
해양종족들은 눈에 불을 켜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기적쇼핑몰이 문을 열자마자 수많은 해양종족들이 몰려들어 입점 신청을 했고, 창업 열풍이 불었다.
이렇게 엄청난 일을 연맹의 다른 세력들이 모를 리 없었다.
***
십여 개의 왕국연맹 중 ‘서초왕국’이라 불리는 소국이 하나 있었다.
서초왕국은 인간과 마수령이 어우러져 사는 왕국으로, 인간족의 비율이 3분의 2쯤 되었다. 자원이 별로 없는 국가라 몇 년 전의 남하국보다도 궁핍했다.
장응전국의 침략 이후 5년, 서초왕국은 장응전국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가뜩이나 가난했던 서초왕국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매년 거둬들이는 수확과 세금의 대부분을 장응국에 바쳤으며, 주민들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나라 전체가 장응국의 노예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 전, 5년이나 이어지던 암흑기가 갑자기 막을 내렸다. 장응황제인 매황이 3국 연맹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자 장응전국은 항복을 했다. 기적성의 압박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거, 반란으로 인해 수탈에 시달리던 속국들은 모두 자유를 되찾게 되었다. 서초왕국도 그중 하나였다.
독립하게 된 서초왕국은 다른 14개 왕국과 함께 대주국을 위시로 한 왕국연맹에 가입했다. 서초왕국은 자원이 귀한 소국이었지만, 대주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관계로 가장 먼저 덕을 볼 수 있었다.
서초왕국에 기적쇼핑몰이 지어지자 주민들은 언제고 원하는 약재와 단약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기적쇼핑몰의 설립으로 인해 서초왕국은 빠르게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 말 들었어?”
“최근 숲의 연맹에 거물 하나가 또 가입했다는구먼!”
“어리석긴. 그걸 이제 들었나? 그게 바로 카라공주가 있는 서해성 아닌가!”
외진 곳에 위치한 서초왕성은 성 전체가 황석으로 지어져 있었다. 성을 중심으로 반경 천 리가 모두 돌밭이라 풀뿌리 하나 자라지 못했고 수맥을 찾기도 힘들었다. 모래폭풍이 끊이지 않는, 그야말로 불모지였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도 카라공주를 아는 자가 있었다.
그들 중에는 숲 연맹의 열성적인 숭배자도 존재했다.
라헬은 서초성에 사는 귀족 아가씨였다. 암흑기를 겪기 전, 그녀의 가문은 중간 규모 정도는 되었지만 지금은 가문 사람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어 근근이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서해성이 연맹에 가입했다고?.
자신의 보물인 라디오로 그 소식을 접한 라헬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 서초국처럼 외딴 곳에 있는 소국에서는 사치품이었다. 보급률도 높지 않아서 갖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 휴대전화는 그녀가 20살 생일을 맞았을 때 아버지가 본성에서 구해온 선물이었다.
라헬은 휴대전화를 보물처럼 여겼다. 그녀가 휴대전화를 켜자 화면에 쇼핑몰이 떴다. 기적쇼핑몰의 상품 수가 많아져서 휴대전화를 통해 구경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한동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한참 후에야 서해성에 위치한 점포를 찾을 수 있었다.
“녹영산호, 이거다!”
라헬은 약재 하나를 찾아냈다.
“이 약재만 있으면 아버지의 오랜 병도 고칠 수 있을 거야!”
라헬은 휴대전화로 구매를 시도했다.
그 약재의 가격은 결코 싸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가 사는 작은 성에는 쇼핑몰 영업점이 없었기 때문에 비용을 더 지불해야 했다.
“상관없어.”
그녀는 귀족 출신이기 때문에 그녀의 가문과 관련된 자료는 모두 왕국의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되어 있었고, 휴대전화에도 연맹 신분증이 등록되어 있었다. 신상 정보가 확실했고, 집안 상황도 양호했기에 은행에서 얼마 정도는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일단 대출 받은 돈으로 약값을 치르고 천천히 갚으면 된다.
그녀가 선택한 건 엘프은행이었다. 엘프은행의 금리가 가장 낮았기 때문이다. 라헬이 엘프은행에 대출 신청서를 보내자, 데이터를 분석한 은행 본사의 슈퍼 알파브레인이 라헬에게 대출 상환 능력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금액이 크지 않았기에 은행원의 재검토 없이 바로 마석을 지급 받을 수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이 이뤄지는 데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라헬은 주소를 적고 약재를 구매했다.
다음 날 정오. 본성에서 소형 비행선 한 대가 날아왔다. 라헬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찌감치 지정된 위치에서 비행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적상회의 비행선이 분명했다. 비행선 안에 실린 건 이 사람들이 기적쇼핑몰에서 구매한 제품들이리라.
“라헬 씨!”
직원 한 명이 세심하게 포장된 상자를 들고 위에 적힌 이름을 불렀다.
“라헬 씨 안 계신가요?”
“여기 있어요!”
라헬이 손을 번쩍 들었다. 간단한 신분 확인 절차가 끝난 후 물건을 수령한 그녀는 신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머나먼 서해성에서 보내온 제품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그곳에 가보지 못할 수도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름다운 수정만 해안에 있던 상자가 눈 깜짝할 새에 십만 리를 날아와 서초왕국 변경의 작은 성까지 도착하다니.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라헬은 상자를 열고 약재를 하나씩 꺼냈다. 양이나 품질 모두 예상보다 훨씬 좋았다. 역시 서해성에서 생산된 약재였다.
기존의 방법으로 이 바다에서 나는 약재를 구매했더라면 가격이 백배는 뻥튀기되었을 것이다. 서초왕국은 내륙에 위치한 국가고, 바다로부터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앗, 이게 뭐지?”
라헬은 큰 상자 안에서 들어 있는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다른 상품은 산 기억이 없는데? 인어족 판매자가 실수했나?”
호기심에 상자를 연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진주들이 상자 안에 가득했다.
서해의 일곱빛깔진주.
약재이자 최고급 사치품으로, 가격이 워낙 비싸 엄두도 내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이 상자 안에 있는 진주 한 개의 가격이 그녀가 이번에 구매한 모든 제품의 합계보다 비쌀 정도였다. 모든 진주의 값을 더하면 그녀의 가문이 지닌 재산보다도 가치가 클 것이다.
“이게 웬 횡재람.”
라헬은 상자 안에 작은 쪽지가 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쪽지에는 어눌한 인간족 문자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인어족 상품을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첫 번째 고객입니다. 감사의 표시로 서해의 진주를 선물로 함께 보냅니다!”
쪽지의 내용을 읽은 라헬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선물이라고?”
부유하고 강력한 인어족에게는 이 진주가 별로 귀한 물건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내륙의 한 소국, 작은 가문에서 자라난 라헬에게 그들이 보낸 이 물건은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큰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