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 믿고 막 간다-664화 (664/729)

# 664

제664장 협상 결렬

장응전국 왕성은 북쪽 고원에 자리 잡고 있다. 나무가 적고 주로 초원으로, 장응전국의 마수령 부족은 대륙의 대다수 마수령 부족과 마찬가지로 유목민족이다. 왕성 역시 유목민족의 기풍과 특징이 넘쳤다.

가축과 탈것 마수들을 가둔 우리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거대한 마수들의 유해는 집을 짓는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정중앙에 위치한 ‘매머드 궁전’이라 불리는 왕궁은 고대 매머드 180마리를 기둥으로 삼아 세운 거대한 궁전이었다.

매머드 궁전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궁전 호위병 수천 명이 엄숙한 표정으로 양측에 도열해 있었다. 매족 전사들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길고 우렁찬 호각소리와 위엄 있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장엄한 기운이 순식간에 매머드 궁전을 덮었다.

“숲의 연맹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크고 작은 그림자 셋이 매머드 궁전 앞에 나타났다. 셋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다. 둘은 망토로 몸을 꽁꽁 감싸고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 사이의 젊은 인간족은 둘과 완전 딴판이었다. 눈처럼 하얀 옷을 걸친 인간족의 피부는 여인네들도 부러워할 정도로 고왔다. 그러나 몸은 근육으로 단단하며 우아하면서도 호방한 기운을 뿜어냈다.

천제현은 이렇게 위풍당당하게 매머드 궁전의 정전으로 들어섰다. 조각상 같은 매신족 금위병들이 곧장 주위를 에워쌌다. 모두 진령 경지에 달한 강자들이었다. 궁전 중앙의 높은 보좌에 매신족 노인이 검붉은 곤룡포를 입고 앉아 있었다.

“저자가 장응황제군!”

천제현이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기적성 성주 천제현, 폐하를 뵙습니다!”

“기적성의 천제현이라고? 역시 남다른 풍채를 지녔군! 그대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소!”

장응황제가 천제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는 천제현의 마력이 진령 9성 밖에 안 되는 걸 알아차리고 약간 멸시하는 기색을 보이며 천제현 배후의 둘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두 명의 실력을 알아차릴 방법이 없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 두 분은 누구시오?”

“이 두 분은 숲의 연맹의 고수로, 지금은 소인의 호위를 맡아주고 계십니다.”

“숲의 연맹에서 온 고수들이셨구려.”

장응황제는 조금 긴장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 한 손을 들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소. 자리에 앉으시오.”

“감사합니다!”

천제현은 점잖은 태도로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인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그는 먼저 장응황제에게 손을 모아 예를 올린 후 대전 옆에 준비된 보좌에 앉았다. 엘프왕과 용의 영주도 천제현 좌우에 나란히 앉았다.

“폐하께서 평화조약을 맺자고 소인을 초청하셨습니다. 폐하의 뜻에 깊이 동감하며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화는 번영의 기반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추구하고 전쟁을 자제해야 합니다.”

천제현이 인사치레를 늘어놓았다.

“폐하께서는 평화조약을 어떻게 정할 생각입니까?”

장응황제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히 말했다.

“뭘 그리 서두르시오. 우리 양측은 모두 당사자요. 우리끼리 평화조약을 정한다면 공정성과 공신력이 떨어질 것이오. 그리하여 짐은 공증인을 한 분 모셨소.”

천제현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 공증인에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았다.

이때 인간족 하나가 옆의 전각에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는 회색 비늘갑옷을 걸치고 목에 회색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수염과 머리카락이 희끗하고 턱수염을 짧게 기른 채 왼손으로 허리춤의 보검을 잡고 있었다. 지극히 평범한 외모에 약간 마른 체구인 중년 무장이었다.

“천역 7성 정도의 강자일세.”

엘프왕 랜스로드의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엘프왕은 비술을 사용하여 천제현만이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천제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장응전국 같은 나라에 이 정도의 강자가 있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장응황제 본인도 천역 4성 정도일 뿐이다.

게다가 이 중년 사내는 인간족이다. 어떻게 마수령 국가의 백성일 수 있단 말인가?

장응황제가 중년 사내를 소개했다.

“이 분은 대건제국 황제께서 직접 무왕의 봉호를 내린 형무영 상장군이시오. 오늘 우리 양측의 평화조약을 공증해주러 오셨소.”

‘대건제국의 상장군이라고?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천제현은 얼마 전 서해에서 호국현자를 건드렸다. 그런데 상장군이라는 자가 나타났으니, 이거 너무 절묘한 우연 아닌가? 물론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형무영이 천제현을 흘긋 훑어보았다.

천제현은 성난 파도가 밀어닥치고 물이 솟구치는 느낌을 받았다.

이놈이 기선을 제압하려는 모양이네.

천제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신식을 방출하여 형무영의 몸을 훑었다. 형무영은 몸을 미세하게 떨 뿐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표정을 좀 일그러뜨렸을 뿐이었다.

장응황제는 두 사람의 대치를 못 본 척했다.

“휴전 당사자와 공증인까지 모였으니 이제 협상을 시작해도 되겠소.”

천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시지요!”

“장응전국은 거미여왕 엘리카시스의 속임수에 넘어가 숲의 연맹과 전쟁을 벌였소. 엘리카시스가 죽었으니 이번 일을 덮는 게 좋을 것 같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응전국은 삼대 왕국에 피해를 주었습니다.”

무왕 형무영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는 이번에 초청된 공증인이자 중재인으로 장응황제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장응전국은 모든 피해를 배상해야 합니다.”

“그리하겠소!”

천제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 정도 피해는 개의치 않습니다.”

“숲의 연맹은 장응전국의 도시 10여 곳을 기습하고 전략적으로 비축한 식량을 절반 이상 불태웠소. 게다가 장응전국의 속국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각종 신형 무기를 제공했소. 이 모든 행동으로 장응전국은 막대한 피해를 보았어요. 장응전국이 먼저 잘못한 건 사실이나 숲의 연맹에서도 도가 지나쳤소!”

천제현은 형무영의 말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무왕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숲의 연맹은 장응전국에 대한 모든 행동을 즉시 중지하고 배상하시오.”

천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행동은 중지할 수 있지요. 그러나 배상은…….”

“기적성은 숲의 연맹을 이끄는 핵심 세력으로 외부에서 알지 못하는 기술을 대거 보유하고 있다고 알고 있소. 이 기술들은 대륙과 지역의 평화를 위협할 것이오. 다시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막고 성의를 보이는 차원에서 이 기술들을 공개하시오. 그렇게 해야 대륙과 지역의 균형을 되찾을 수 있소.”

천제현은 이렇게 황당한 요구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기적성의 기술은 우리의 피와 땀입니다. 그런 귀한 기술들을 무왕의 한 마디에 내놓아야 합니까?”

“기술을 공개하지 않는다면 기적성에서 휴전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오!”

형무영이 담담하게 말했다.

“대건제국은 끊임없이 몸집을 불리려는 세력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그쪽이 계속 제멋대로 군다면 대건제국은 장응전국과 연맹을 맺고 기적성을 정벌할 수밖에 없소. 사악한 기술이 대륙을 위협하지 못하게 말이오.”

천제현이 세상에서 가장 웃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장응황제가 미간을 찡그렸다.

“기적성 성주는 어째서 웃는 것이오?”

“너무 뻔한 수라서요. 무슨 새로운 수를 쓰나 괜히 기대했네요! 제국으로 날 위협하겠다고? 날 너무 물로 봤군!”

천제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폐하의 성의 잘 봤습니다. 평화조약이고 나발이고 이제 그만합시다. 바빠서 입씨름할 시간 없어요.”

“가긴 어딜 가? 여기에 와놓고 멀쩡히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대전에 공간파동이 일어나면서 별안간 공간능력자 열 명이 나타났다. 모두 강력한 공간마력을 방출하며 순식간에 모든 공간을 교란했다.

“너희들이 순간이동할 수 있는 공간두루마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형무영이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일부로 대건제국의 공간능력자 열 명을 데리고 왔지. 이제 이 공간은 모두 교란되었다. 천역 경지의 공간 마력을 지니지 않았다면 어떤 공간 조종도 먹히지 않아. 안타깝지만 네겐 그런 마력이 없는 것 같군!”

천제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별로 신선한 수법은 아니지만 날 상대하려고 많이도 준비했군.”

“걱정하지 마라.”

형무영이 싸늘하게 웃었다.

“넌 보물 같은 존재니 네 목숨을 빼앗지는 않으마. 마력을 폐하는 정도로 끝내주지. 대건제국의 황제께서 네 지식을 필요로 하신다.”

천제현이 손을 저었다.

“그럴만한 능력이 되면 한 번 해보시지!”

형무영이 허리춤에서 보검을 뽑았다. 검을 뽑는 게 아니라 산맥이나 강줄기를 뽑는 것처럼 엄청난 기세였다. 거대한 검기가 순식간에 매머드 궁전 전체를 휩쓸더니 매머드 뼈로 된 견고한 열 겹의 벽을 뚫고 하늘로 솟구쳤다.

“대단한 검기로군!”

천제현은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싸늘하게 웃으며 형무영을 쳐다봤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어림없어!”

형무영의 반쯤 감겨 있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검기가 훑고 지나가던 순간 천제현 옆에 있던 자가 긴 지팡이를 휘둘러 검기를 가볍게 튕겨냈다.

틀림없었다.

손 한 번 휘두르자 검기가 꺾이면서 엉뚱한 방향으로 튕겨나갔다.

형무영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대건제국에서도 그의 검기를 손쉽게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황제 정도의 절대 강자뿐이다.

설마 놈들 중에 대건제국 황제와 맞먹는 강자가 있단 말인가?

“데스윙, 장응황제는 자네가 맡게!”

엘프왕 랜스로드가 느긋하게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이 무왕은 내가 맡지.”

데스윙은 좀 언짢았다.

“이건 너무 쉽단 말이야.”

천제현이 옆에서 재촉했다.

“서두르세요. 여기는 놈들의 본진이잖아요. 5분이 지나기 전에 지대공 부대 수십만 명에게 포위될 거예요.”

장응황제와 형무영은 어안이 벙벙했다.

천제현은 둘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분노한 형무영이 소리를 지르며 자리를 박차 올라 랜스로드를 향해 보검을 날렸다. 랜스로드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지팡이에서 분출된 녹색 빛이 순식간에 커다란 그물로 변했다. 그물은 형무영의 무시무시한 검기를 전부 빨아들이더니 점점 커지면서 촘촘해졌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대전 전체로 퍼져나갔다. 천제현 일행을 공격하려고 준비하던 매신족 금위병들까지 전부 그물에 갇혔다.

엘프왕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녹색 빛이 분출되면서 형무영이 튕겨나갔다.

엘프왕은 천역 7성의 마력인 데다 지팡이는 그의 힘을 배가시켜주었다. 형무영은 애당초 엘프왕의 상대가 아니었다. 한편 데스윙은 장응황제를 곧바로 공격했다.

천제현도 둘을 거들고자 힘차게 양손을 모았다.

구목신마 정령이 머리 꼭대기에 등장하자 천제현의 눈동자가 영혼을 나타내는 보라색으로 변했다. 구목신마의 손에 주문이 가득 새겨진 거대한 보라색 낫이 나타났다.

“영혼참!”

천제현이 빛처럼 빠르게 공간능력자들의 곁을 스쳐 지나가면 보라색 낫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들의 몸과 정신에는 자그마한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