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5
제655장 결혼 강요
두툼한 서류 뭉치.
전부 공화련이 정리한 것이었다. 내용이 너무 방대한 관계로 파샤는 숲 연맹에 관한 부분만 보기로 하고 기적상회 발전사 등등은 카라에게 넘겨졌다.
기적성 상품이라면 카라 역시 숲의 상인을 통해 구매한 적이 있었다. 방에 장식된 축음기와 상영기는 그녀가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다. 이런 이유로 카라는 기적성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기적성이 이룬 폭발적인 성장이 과연 어떻게 가능했는가는 혼돈의 숲 전체를 통틀어 누구도 알지 못하는 불가사의였다.
천제현이 남기고 간 서류는 일급기밀.
카라로서는 기적성에 대해 알아볼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꼼꼼하기로는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공화련의 작품이니 자료의 정확성과 사실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기적상회의 탄생부터 숲 연맹이 결성되고 발전하기까지, 모든 과정이 자료 안에 세세하게 담겨 있었다. 카라는 하룻밤을 꼬박 새워가며 서류를 정독했다.
기적성에서 지금껏 일어났던 그 모든 기술혁신과 새로운 발명, 기념비적인 진보가 상세하게 기술된 자료였다.
카라는 기적상회 발전사라기보다는 천제현의 개인적인 전기(傳記)를 읽은 느낌이었다. 기적상회가 이뤄온 성장과 혁신은 전부 천제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 모든 것이 천제현 개인의 손으로 이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었다.
머릿속에 무한한 지혜의 샘이라도 가진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아침 햇살이 비쳐드는 가운데 카라가 여전히 방금 읽은 자료의 여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즈음, 파샤가 카라의 방을 찾아왔다.
“서류는 훑어봤니?”
“기적상회는 단순한 상업제국을 세우려는 게 아니에요. 이 세계의 판도를 완전히 뒤엎겠다는 거죠. 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잠재력을 지녔어요.”
카라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해양종족과의 협력은 아직 백지상태예요. 남들보다 먼저 진입할수록 유리해요. 전 이번 협력에 찬성이에요!”
파샤도 고개를 끄덕였다.
카라의 말이 옳았다.
파샤 역시 숲 연맹이 기존에 취하고 있는 틀을 검토해 보고 온 참이었다. 하나의 연맹으로 묶인 와중에도 각각의 세력 간에는 어느 정도 독립성이 유지되고 있었다. 연맹의 율법을 공통적으로 적용받되, 현지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허용하는 식이었다. 상당히 개방적인 구조라고 할 수 있었다.
숲 연맹에 가입한다면 대건제국 따위는 더 이상 겁낼 필요가 없으리라.
잠시 생각에 잠겼던 파샤가 입을 뗐다.
“카라, 나한테 생각이 하나 있는데 네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카라가 움찔했다.
“무슨 생각이요?”
파샤의 설명을 들은 카라는 뺨을 새빨갛게 붉히고 말았다. 파샤의 생각이라는 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카라는 한참을 더 안절부절못했다.
“일단 천제현 성주를 들라 하라.”
명령을 받은 근위병들이 종종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 후, 인어궁을 다시 찾은 천제현 앞에 다섯 개의 쟁반이 놓였다. 쟁반에는 각각 곤충령의 머리가 하나씩 올라가 있었다. 전부 몸통에서 떨어져나온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다.
흠칫한 천제현이 물었다.
“이게?”
“가쿠계에서 서해성에 심어놓은 연락원과 밀정들이오.”
가쿠계 일당을 일거에 몰살했다는 건 그 무엇보다도 명확한 의사 표명이었다. 숲 연맹에 합류하는가 마는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가쿠계에는 확실히 등을 돌린 것이다. 천제현이 바라던 바였다. 이번 방문의 가장 큰 목적은 이미 달성한 셈이었다.
한시름 놓은 천제현이 말했다.
“올바른 결정을 하셨군요.”
치료효과가 최대한으로 발현된 덕에 파샤의 얼굴에 패여 있던 주름은 80%가량이 사라진 뒤였다. 피부에만 탄력이 돌아온 게 아니라 볼품없던 체격도 다시금 활력이 넘쳐 보였다. 회백색이던 머리카락 역시 많이 검어졌다.
상태가 워낙 심각했던 탓에 전성기 때의 미모를 온전히 되찾는 건 불가능했지만, 송장에 가깝던 이전 몰골과 중년 부인 정도로 보이는 지금 모습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
카라는 파샤의 옆자리 대신 옆방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천제현에 대해 상세히 알게 된 지금, 카라의 눈에 비친 그는 더 이상 시장에서 만났던 무뢰배가 아니었다. 다만 파샤의 제안이 너무 민망했기에 얼굴을 내밀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기적성이 앞으로 창조해낼 기적은 또 얼마나 될까? 기적성이 품은 무한한 잠재력은 또 어떻고?
숲 연맹 가입은 분명 서해성에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이 머리들은 내 병을 고쳐준 데 대한 보답이오. 우리 서해성은 숲 연맹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오.”
파샤가 느긋하게 말했다.
“연맹 가입에 대해서도 면밀히 검토해 봤소. 조건 한 가지만 들어준다면 기꺼이 합류하리다!”
‘조건 하나? 열 개라도 들어줄 수 있다마다.’
이번 방문의 본래 목적은 서해성의 출병을 막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숲 연맹 가입 의사까지 끌어내게 됐으니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상황이었다.
‘과연 무슨 조건을 내걸까?’
보나 마나 협상을 좀 더 자기들 쪽으로 유리하게 끌고 가려 할 것이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 조정 가능한 범위였다. 서해성은 중요한 파트너였다. 서해성만 합류하면 숲 연맹은 더할 나위 없이 공고해질 것이다.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천제현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뭐든 편히 말씀해 보시죠.”
“천제현 성주는 젊은 나이에 능력도 좋고 학식 또한 대현자 못지않더군. 앞으로가 기대되는 젊은이야.”
일단 천제현을 제대로 한 번 띄워준 파샤가 뒤이어 진짜 목적을 밝혔다.
“카라는 푸른제국의 적통 공주라오. 성년이 된 지 한참이건만 인어족 중에서는 걸맞은 상대를 찾을 수가 없어서 말이오. 천제현 성주에게 시집보내면 어떨까 하는데, 그러면 카라도 든든한 남편을 만나서 좋고 서해와 연맹의 관계도 더욱 끈끈해지지 않겠소?”
“네?!”
기껏해야 협상이나 유리하게 조정하려 할 거라는 천제현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설마하니 이런 조건을 내세울 줄이야. 난데없이 인어 마누라를 얻어서 돌아갔다가는 공씨 자매가 천제현을 그 자리에서 찢어 죽이고야 말 것이다.
“아니요, 안 됩니다!”
천제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보수적인 사람이라서요. 이종족과 맺어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특히 해양종족은 더더욱요.”
파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푸른제국 황족 공주로도 성에 안 찬다는 말이오?”
천제현의 의사는 확고했다.
“실은 이미 약혼녀가 있습니다. 정말 곤란하니 이해해주십시오!”
“천제현 성주 정도 되는 인재면 정실인 카라 말고도 첩 몇 명쯤 들이는 거야 얼마든지 이해해 줄 수 있소.”
파샤가 싸늘하게 말했다.
“서해성이 대단한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시오. 우리는 푸른공주의 존엄을 모욕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소. 조건을 수락 못 하겠다면 연맹 가입도 없던 일로 하는 수밖에.”
‘젠장, 협박을 하시겠다? 이 몸이 제일 질색하는 게 협박이야.’
천제현 특유의 오기가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우리 집 안방에 누굴 들일지까지 남의 간섭을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계속 이렇게 난처한 요구를 하시겠다면 더 이상의 협상은 어렵겠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목적은 이미 달성했다.
파샤가 연락원과 밀정들의 목을 친 순간 서해성과 가쿠계는 완전히 척을 진 셈이었다. 연맹 가입은 당장 급한 일이 아니었다.
천제현이 공간두루마리를 꺼내 자리를 뜨려던 때였다.
파샤가 돌연 손에 쥔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자 집채만 한 파도가 두루마리를 꺼내든 천제현을 덮쳤다. 순식간에 파도에 휩쓸려간 두루마리는 어느새 파샤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천제현도 이제 제대로 빈정이 상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는 겁니까?”
“조건을 수락하지 않겠다면 서해성에 며칠 더 머무르면서 생각할 시간을 주는 수밖에.”
파샤가 곧장 아랫것들에게 명했다.
“여봐라, 천제현 성주가 흥분을 가라앉히도록 모시고 나가거라.”
천제현은 파샤에 의해 마력마저 봉인된 상태였다. 천역 6성 경지인 파샤를 상대로 천제현이 반항다운 반항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천제현은 갖고 있던 두루마리를 모조리 털린 뒤 해양종족 절정고수 십여 명에게 끌려가 낯선 방에 감금당하고 말았다.
파샤의 뜻은 명확했다.
나가고 싶거든 결혼에 동의하라 이거였다. 아니면 영영 서해성에서 썩든지.
여기 오기 전 온갖 가능성을 다 타진해 본 천제현이었지만, 이런 요구에 발이 묶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급기야는 의문이 들었다. 너무 잘생긴 것도 죄인가?
인어공주가 경국지색의 절세미녀인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억지 결혼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파샤가 공주를 시집보내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천제현과 기적성의 무한한 저력, 둘째는 대건제국과의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마찰을 기적성 쪽으로 돌리려는 계산. 노림수야 뭐가 됐든지 간에 불순한 의도의 정략결혼 따위는 설사 기적성에서 기다리는 공서련이 없다 쳐도 절대 사절이었다.
그 누구도 천제현에게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천제현은 이틀간의 감금생활 동안 열심히 빠져나갈 방법을 연구했다. 마력은 봉인당했어도 몸은 건재했으니 천역급 고수 이하로는 한 번 붙어볼 만했다. 아니면 새끼 여우를 보내 두루마리를 훔쳐오는 것도 방법이었다.
천제현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던 그때.
금발의 매혹적인 그림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절대 미모, 카라였다. 천제현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에는 다소 가시가 돋쳐 있었다. 카라가 입을 열었다.
“여기, 두루마리. 할머니 몰래 가져왔어.”
카라가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천제현이 일순 멈칫했다.
“이걸 왜?”
“나라고 시집 같은 거 가고 싶은 줄 알아?”
카라가 천제현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건 그거고, 도둑질까지 한 마당에 여기 어떻게 있어. 할머니 화가 풀릴 때까지 기적성에 가 있었으면 하는데 그 정도도 못 해주지는 않겠지?”
“하하, 물론이죠. 전송두루마리야 넉넉한걸요.”
“그럼 얼른 가자!”
방 안에 눈부신 전송광선이 번쩍인 뒤, 두 사람이 사라진 걸 발견한 근위병들이 즉각 성주에게 소식을 알렸지만, 파샤는 ‘알겠다’는 말 한마디를 끝으로 더는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