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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믿고 막 간다-654화 (654/729)

# 654

제654장 교섭

현재 혼돈의 숲에서 대기 중인 해양종족 정예군은 최소 수십만, 무시할 수 없는 규모였다. 가쿠계 곤충령을 상대하느라 바쁜 사이에 그들이 뒤를 친다면 숲 연맹에 상당한 타격이 될 수도 있었다.

천제현의 가장 큰 임무는 서해성 성주를 설득해 병력을 철수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파샤 역시 천제현의 목적을 잘 알았으며, 그의 두둑한 배짱에 탄복하는 중이었다. 혈혈단신으로 서해성에 나타난 거로도 모자라 눈 하나 깜짝 않고 기적성을 내기 밑천으로 내놓다니, 자신감을 넘어 결과를 100% 확신한다는 의미였다.

“천제현 성주의 패기를 봐서라도 응하겠소.”

“그럼 어서 드십시오!”

묵묵히 손을 내민 파샤가 건네받은 단약을 이리저리 굴리며 살펴봤다. 실질적인 효능이 어떨지는 몰라도 조제 과정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천제현은 분명 제대로 된 제약사였다.

단약을 확인하는 파샤를 향해 천제현이 빙긋이 미소를 보냈다.

“독은 안 들었으니 안심하시죠.”

천제현은 바보가 아니었다.

단약을 먹고 파샤가 죽기라도 했다가는 이 성을 비롯한 서해 전역의 해양종족 수백만이 벌떼처럼 혼돈의 숲으로 몰려들지 않겠는가?

단약을 삼킨 파샤는 몸속 구석구석 기묘한 힘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봄 햇살에 얼음이 녹듯, 지긋지긋하게 그녀를 괴롭히던 저주 마력이 그 기묘한 힘에 밀려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와 동시에 넘치는 활력이 체내를 채웠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생명력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모든 과정이 막힘없이 순조로웠고, 효과는 즉각적으로 발현됐다.

지켜보던 이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창백하던 파샤의 얼굴이 눈 깜짝할 사이에 생기를 되찾았다. 흡사 나무껍질처럼 말라붙어 쩍쩍 갈라졌던 피부에도 탄력이 돌아왔다.

기적.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우문희는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대강 만들어낸 듯 보였던 단약이 정말로 효능을 내다니, 그것도 즉각적인 효능을. 전설의 신약(神藥)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현자 어른께서는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하셔야 될 것 같네요.”

천제현이 비꼬는 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야 눈치를 보건 말건 천제현은 우문희의 체면을 세워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선물이 효능을 보였으니 이번 내기의 승자는 저로군요. 이제 약속을 지켜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우문희가 발끈했다.

“네놈이 뭘 안다고 감히…….”

“패배를 인정하시지!”

카라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지켜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파샤는 한껏 들뜬 마음을 겨우 가라앉히는 중이었다. 이제 그녀는 무서울 게 없었다.

“여기서 말을 바꾸면 현자로서의 명예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셈이오!”

이 상황에서 우문희가 뭘 어쩔 수 있겠는가?

파샤의 상태가 호전된 이상 그의 콧김이 예전 같은 효과를 발휘하기는 힘들었다. 파샤는 앞으로 최소 수십 년은 더 서해성의 수장 자리를 지킬 것이다. 파샤가 이끄는 서해성은 결코 만만한 먹잇감이 아니었다.

대건제국은 더 이상 서해성에 큰 위협이 못 됐다.

저 애송이가 정말 해낼 줄이야. 진작 없애 버렸으면 일이 이렇게 귀찮아지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 그래, 젊은 사람이 대단하군.”

여기 더 버티고 있어 봐야 좋은 꼴은 못 보리라. 우문희가 팽하고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파샤 성주님, 축하드립니다. 그럼 이 몸은 따로 일이 있어서 이만.”

“배웅은 생략하겠소.”

미적거릴수록 체면만 깎인다는 걸 자기도 아는지 우문희는 시종과 호위병을 이끌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위풍당당한 제국의 현자를 한 방 먹이다니.

다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천제현을 향한 좌중의 눈길에는 뜨거운 경외감마저 깃들어 있었다.

현자가 본인 입으로 불가능이라 단언했던 일을 가뿐하게 해냈다는 건 이 젊은이가 현자보다도 대단한 인물이라는 얘기 아닌가?

물론 학식으로야 우문희 열 명을 합쳐도 천제현의 발끝도 못 따라오는 게 사실이었다. 천제현은 파샤를 치료할 각양각색의 처방 중에서도 다소 약은 수단을 택했다.

단약 제조 중간에 넣은 두 가지 재료는 생명수 나뭇가지와 신골에서 추출한 정수였다. 신골정수에는 세상 모든 저주를 해제하는 힘이 있었고 생명수 나뭇가지는 바닥난 생명력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좌중에게 즉각적인 효능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파샤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은 셈이었다.

남은 시간이 고작 2~3년인 줄 알았을 때는 어떻게든 더 많은 자원을 긁어모아 카라에게 투자할 생각뿐이었다. 차기 성주 자리를 맡기려면 그만한 실력을 키워줘야만 했다.

혼돈의 숲을 치려던 이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쿠계는 그들이 숲 연맹 주력부대를 상대하는 동안 해양종족이 약탈한 전리품은 전부 서해성에 양보하겠다고 약속했다. 서해성으로서는 자신들에게 득이 되는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천제현의 출현이 모든 것을 바꿔놨다.

일찌감치 연회를 접은 파샤가 천제현을 집무실로 안내했다. 이제부터는 성주 대 성주,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나눌 시간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찻잔을 손에 든 천제현이 앉은 자세만큼이나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서해성의 숲 연맹 가입을 요청합니다. 서해성이 합류하고 나면 서해안 전역의 크고 작은 도시들도 자연스럽게 연맹의 일원이 될 테고, 그러면 숲 연맹은 영원의 숲, 황야고원, 타이탄산맥, 용의 고개, 서해를 아우르는 초대형 세력으로 거듭날 겁니다. 여기에 외부 왕국과 지하 네간계의 자원과 인구까지 더해지면 대건제국 같은 나라도 함부로 덤비지 못할 테고요.”

파샤는 결정을 서두르지 않았다.

“서해성은 지금껏 특정 단체에 소속되어 제약을 받아본 적이 없네. 게다가 우리 해양종족이 숲의 종족들로 구성된 연맹에 들어가는 건 적절치 못한 일인 듯하구려.”

천제현이 말했다.

“어쩌면 제약이 존재하겠지만, 숲 연맹에 합류함으로써 얻는 혜택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겁니다. 종족 간의 차이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염려할 필요가 없고요. 숲 연맹은 복잡성과 다양성을 전혀 꺼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영하죠. 해양종족 중 첫 타자로 합류하면 유리한 위치도 선점하고 좋지 않겠습니까.”

파샤가 건조하게 말했다.

“말만 번드르르하게 한다고 다가 아니지.”

파샤는 쉽게 넘어올 상대가 아니었다. 좀 더 실질적인 이익을 눈앞에 들이밀어야만 했다. 서해성은 굳이 숲 연맹에 합류하지 않더라도 그들 자체로 충분한 힘을 가진 집단이었다. 게다가 푸른제국이 남긴 유산까지. 이들의 군사력은 숲 연맹에도 위협적인 수준이었다.

“분명 궁금하셨을 테지요?”

천제현이 화제를 전환했다.

“제가 뭘 믿고 서해성에 나타나 겁도 없이 우문희에게 덤비기까지 했는지 말이죠.”

파샤가 말했다.

“들어보고 싶군.”

“이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제현이 탁자 위에 두루마리 하나를 올려놨다.

“기적성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공간전송두루마리입니다. 극한의 위기상황에서도 이 두루마리만 활성화하면 즉시 순간이동이 가능하죠. 서해성에 아무리 많은 병력이 있든, 우문희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든, 적어도 줄행랑 칠 일 하나는 걱정이 없었다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물건이?’

파샤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천제현이 이어서 한 말은 파샤를 더더욱 전율케 했다.

“이미 기적성만이 아니라 사대 세력이 활동하는 지역 전반에 걸쳐 전송탑 수십 개를 지어놓은 상태입니다. 연맹 내부에서는 전송탑을 통한 실시간 왕래가 가능하다는 거죠.”

파샤가 생각에 잠겼다.

“사실 전송탑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요. 사대 세력은 현재 매우 적극적으로 신기술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조만간 폭발적인 팽창을 이루게 되면 숲 외부는 물론이고 지하 네간계까지도 우리의 영향권에 들어올 겁니다. 그게 바로 가쿠계가 우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이유고요.”

여기까지 얘기한 천제현이 돌연 말투를 바꿨다.

“사대 거물이 무섭게 발전하는 동안 서해성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어요. 파샤 성주님께서는 앞으로 뭘 밑천으로 엘프왕이나 용의 영주와 경쟁하시렵니까? 조만간 숲이 통일되고 나면 서해지역만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될 텐데, 그래도 정말 괜찮으신가요?”

파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쯤이면 할 이야기는 다 했다고 생각한 천제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연맹 현황과 사대 세력의 성장 보고서입니다. 빨리 답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럼 이만!”

말을 마친 천제현은 정말로 일말의 지체도 없이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그가 남기고 간 서류에는 기적성의 저력과 사대 거물이 그간 추진한 개혁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공장이면 공장, 은행이면 은행, 언뜻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였다.

특히 기적성과 제일 먼저 협력 관계를 구축한 영원의 숲은 그중에서도 가장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있었다.

영원의 숲은 이미 행렬 언어 프로그래밍 등 각종 차세대 산업을 육성 중이었다. 이로써 엘프족은 탄탄한 미래를 보장받은 셈이었다.

머리를 조금만 굴려 봐도 연맹 가입으로 얻을 이익을 읽어내지 못할 수가 없었다. 이건 정상인이라면 도저히 거부 못 할 유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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