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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믿고 막 간다-652화 (652/729)

# 652

제652장 내기를 벌이다

파샤의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는 듯 콧방귀를 뀐 우문희가 한층 무서운 기세를 내뿜었다.

그 기세에 눌렸는지 파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우문희, 여기는 서해성이오. 난동이라도 부릴 셈이오?”

“파샤 성주님,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거로 아는데 말입니다.”

우문희가 여유만만하게 말했다.

“성주님이 잘못돼도 과연 서해성이 지금처럼 번영을 누릴 수 있을까요? 그전에 기댈 곳을 찾는 게 좋을 텐데요, 대건제국이라면 서해성과 인어족을 충분히 보호해 줄 수 있습니다. 어차피 혼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이겁니다.”

파샤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푸른제국 황족의 혈통을 노리는 거로도 모자라 서해성까지 날로 먹으려 하다니. 대건 황제는 본인이 얼마나 파렴치한지 정녕 모른단 말이오? 우리한테 대건제국에 대항할 힘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대건제국에서 여기까지의 거리로 보나 해양종족만의 강점으로 보나 서해성을 차지하는 건 절대 쉽지 않을 거요.”

말이 끝나는 순간.

무기를 든 인어 근위병 수십 명이 우문희 주위를 에워쌌고, 건물 밖을 지키던 해양종족 전사들도 즉각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우문희가 아무리 천역급 고수라고 해도 이곳은 남의 땅 한복판이었다. 게다가 이 자리에 있는 천역급 고수는 그 하나만이 아니었다. 파샤만 해도 결코 우문희에게 밀리지 않는 실력자였으니.

하지만 우문희는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주변을 비웃었다.

“내가 여기 얌전히 서 있은들, 네놈들이 감히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으냐?”

시건방진.

그런 소리를 입 밖에 내다니.

우문희는 대건제국의 국사(國師), 대건제국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존귀한 신분이었다. 물론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대단한 인물이긴 매한가지였다.

행여 우문희를 포박이라도 했다가는 대건제국의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 되는데, 감히 그런 짓을 할 만한 세력이 몇이나 있겠는가? 일단 서해성은 그럴 배짱이 없었다.

해양종족 근위병들은 쭈뼛쭈뼛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파샤는 지금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니었다. 이기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우문희의 공격이 날아든다면 피하지도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핵심은, 우문희의 말대로 서해성에는 대건제국 국사를 잡아들일 배짱이 없다는 점이었다.

손님들도 눈치만 볼 뿐, 누구도 선뜻 나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본래 흥겹던 생일잔치가 우문희 탓에 순식간에 가시방석이 되어 버렸지만, 여기 모인 상인들과 대소 왕국 출신 귀빈 중에 감히 대건제국 일에 끼어들 강심장은 없었다.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얌전히 술이나 마시는 게 최선이었다.

그런 상황에 고무된 건지 우문희의 태도는 끝 간 데 모르고 무례해져 갔다.

“툭 까놓고 말해서 대건 황제께는 푸른제국 황족의 혈통이 흐르는 후대가 필요하다. 게다가 서해성은 연해지역의 중추로서 대건제국에 중대한 전략적 의미를 지니지. 감히 대건 황제의 뜻을 거역하려는 자가 있다면 어디 한 번 나와 보아라!”

우문희는 예의 차리는 시늉조차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사실상 대건제국 정도 되는 나라라면 그럴 필요가 없긴 했다.

우문희도 다 믿는 구석이 있기에 속셈을 가감 없이 드러낸 것이다. 제정신이 박힌 이상 대륙 최강의 권력을 휘두르는 제왕에게 맞설 자는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기에.

“여기 있습니다만!”

모두가 침묵하고 있던 그때, 한쪽 구석에서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목소리의 발원지로 향한 찰나.

공간이 일렁였다.

다음 순간, 우문희와 파샤 사이에 수수한 차림새의 젊은이 하나가 훌쩍 모습을 드러냈다. 천역급 고수 두 명이 내뿜는 위압감 한가운데에서도 젊은이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마치 천역급 고수가 아니라 평범한 조각상 두 개 사이에 서 있기라도 한 듯이.

공간 재능?

좌중의 표정이 굳어졌다.

젊은이의 능력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담력이었다. 저 자리에 끼어드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정녕 모른단 말인가? 한없이 평범해 보이는 인간족이 감히 대건제국의 호국현자를 거스르다니.

우문희가 미간을 찌푸리자 숨 막히는 살기가 천제현을 과녁으로 엄습해왔다. 그러나 결과는 우문희의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타이탄과 거룡 앞에서도 태연자약했던 천제현이 설마 늙은이 하나 무서워서 벌벌 떨까.

“뭐 하는 놈이냐?”

우문희가 천제현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아하니 평범한 자는 아닌 듯했다.

“너 같은 애송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저는 기적성 성주 천제현이라고 합니다. 앞으로의 협력에 관해 상의하고자 숲 연맹 특사 자격으로 서해성 성주님을 뵈러 왔고요.”

천제현의 자기소개와 동시에 파샤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천제현이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말했다.

“서해성은 지리상 혼돈의 숲에 속합니다. 언젠가는 숲의 일원이 되겠죠. 대건제국이고 현자고 간에 서해성을 넘보는 자들은 무조건 우리 숲 연맹의 적입니다. 이래도 제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까?”

“건방진, 천지 분간을 못 하고 까부는구나!”

우문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정도 거리에서라면 네놈쯤은 당장 개미새끼 밟듯이 짓이겨줄 수 있거늘!”

“아하? 그럴지도요.”

그런데 바로 뒤에 이어진 말은 방금 친 맞장구와는 어조가 딴판이었다.

“하지만 파샤 성주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파샤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제정신인가. 서해성이 자길 보호해 줄 거라니, 뭘 믿고 저런 소리를 하지? 기적성 성주라면 서해성이 혼돈의 숲을 칠 계획임을 알고 온 걸 텐데? 기적성과 서해성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숙적이란 걸 알면서도 저런다고?

“제가 파샤 성주님을 살릴 수 있으니까요!”

천제현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파샤 성주님의 병은 치료가 가능합니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기절초풍했다.

가장 놀란 건 우문희와 파샤였다. 우문희가 멋대로 설치는 건 파샤가 이미 죽음의 문턱에 있기 때문이었다. 오래 버텨봐야 3~5년일 텐데 뒤를 이을 후계자도 없는 상황, 그래서 파샤는 감히 대건제국과 분쟁을 만들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완치의 희망이 있다면 우문희에게 이리 꼼짝 못 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단순히 힘만 비교하면 물론 대건제국이 한참 위였다. 하지만 서해성과 대건제국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거리가 가로놓여 있었다. 제아무리 대건제국이라도 서해성을 집어삼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잠시간의 경악에서 헤어나온 우문희가 코웃음을 쳤다.

“파샤가 왜 저렇게 됐는지나 알고 하는 소리인가? 나도 고칠 수 있다고 장담 못하거늘, 네까짓 게 뭐라고 나서?”

‘오만한 늙은이가.’

하지만 그것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우문희는 상상을 초월하는 학식을 자랑하는 현자였다. 제국을 대표하는 현자조차 못 하는 일을 어느 산골에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촌뜨기가 해내 보이겠다니? 농담에도 정도가 있지.

“그렇게까지 확신하신다면 내기 한 판 어떻습니까?”

천제현이 실실 웃으며 우문희를 쳐다봤다.

“제가 파샤 성주님을 고치면 얌전히 이 성에서 꺼져주시죠.”

“네놈이 감히!”

우문희가 나서기도 전에 그의 수행원들이 먼저 발끈해서는 천제현을 향해 공격을 날렸다. 황제조차도 우문희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하건만,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 까분단 말인가.

콰앙!

갑작스럽게 용솟음친 파도에 수행원들이 저만치 밀려났다.

콜록거리며 기침을 한 파샤가 말했다.

“천제현 성주가 이렇게까지 자신이 있다는데 기회를 줘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오.”

우문희는 천제현이 정말 파샤를 치료할 수 있으리라고는 털끝만치도 기대하지 않았다. 우문희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실패한다면?”

“처분은 그쪽 손에 맡기겠습니다.”

“그래, 오늘 좋은 구경 한 번 하겠구나.”

“눈 똑바로 뜨고 보시지요!”

천제현의 시선이 다시 서해성 성주 파샤에게로 향했다.

“황급히 오느라 송구하게도 빈손입니다. 생신 선물은 이걸로 대신하도록 하지요! 제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면 파샤 성주님을 괴롭히는 건 죽음의 화염저주입니다. 생명력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동시에 체내에 독소를 생성해 몸을 노쇠하게 만드는 저주이지요. 그간 요수내단 정수를 섭취하며 겨우 생명력을 유지해오셨을 겁니다. 제 말이 맞나요?”

우문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반대로 파샤는 충격에 휩싸인 얼굴이었다.

우문희는 물론이고 파샤 역시 처음에는 별 기대가 없었다. 저 인간족이 한눈에 병세를 꿰뚫어 볼 줄이야, 그야말로 놀랄 노자였다.

우문희를 의아하게 만든 건 천제현이 파샤의 외양만 보고 진단을 내렸다는 점이었다. 이건 상식적이지 못했다. 몸을 노쇠하게 만드는 원인은 수도 없이 많을진대, 어떻게 저주를 콕 짚어낼 수 있었을까?

선지자도 아닌 천제현이 이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건 어제 만났던 금발미녀 덕택이었다.

천제현은 그때 이미 눈치를 챘다.

그 금발미녀는 인어족이었다.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만 봐도 혈통이면 혈통, 실력이면 실력, 어느 쪽도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서해성에서도 지위가 높은 존재, 아마도 우문희가 대건 황제의 후궁으로 점찍은 푸른공주일 가능성이 컸다.

그날 사려던 내단은 회복용으로 쓰이는 것이었다.

금발미녀는 성주에게 먹일 내단을 사러 나온 게 확실했다. 그러니 천정부지로 치솟는 값에도 기어코 내단을 챙겼던 것이다. 거기에 오늘 파샤의 상태까지 보고 나니 천제현은 더욱 확신이 들었다. 십중팔구는 자신의 추측 대로이리라.

씨익 웃은 천제현이 목청을 한 번 가다듬고는 말했다.

“사실 치료는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어제 시장에서 본 만년팔조요수의 내단이 성주님께는 특효약인데 제가 값을 치르려던 찰나에 어디서 악독한 추녀 하나가 끼어들어 가로챘지 뭡니까. 그 내단만 있었다면 성공 확률이 훨씬 높아졌을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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