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7
제647장 우선순위
서해성은 해양종족의 도시다. 해양종족은 숲의 주민들과 확실히 분류되는 종족으로, 육지의 종족들과 서로 간에 터전을 침범하는 일이 없었다. 서해성 주민들은 강력한 힘을 갖고서도 숲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이유로 혼돈의 숲 세력들에게 무시당했지만, 지정학적 위치로 보면 서해성 또한 혼돈의 숲의 일부였다.
만약 서해성이 이번 일에 가담한다면 상황은 아주 심각해진다.
서해성은 용성이나 타이탄 성에 결코 뒤지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전해지나, 워낙 교류가 없는지라 그들의 실력에 대해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천제현이 우연히 이 소식을 접했기에 망정이지, 제대로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기습을 받았다면 숲 연맹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혈응왕의 노호성에 십여 명의 장수들이 천제현을 에워쌌다. 하나같이 마력을 번쩍거리는 것이, 명만 떨어지면 단번에 벨 태세였다.
“그래 봤자 소용없습니다. 너무 늦었거든요!”
천제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게는 기적상회에서 발명한 통신도구가 있답니다. 우리가 방금 한 대화도 이미 기적상회 본부에 전달됐다는 얘기죠. 수만 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는 기적성에 말이에요. 이제 기적성은 서해성의 침입을 대비하고 있을 거예요.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다니 정말 감사하네요. 모르고 당했다면 끔찍했을 텐데요.”
“뭐라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대경실색했다.
보통은 상대 진영에 첩자를 보내 정보를 알아냈다 하더라도 그 정보를 전달하는 것 또한 난관이었다. 정보가 도착할 때쯤엔 이미 늦어 있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수만 리 밖에서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고? 이 시대에서 그것은 꿈같은 얘기였다. 정보 전달 과정을 생략할 수 있다는 것은 향후 어떤 전쟁에서든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는 말과 같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혈응왕이 소리쳤다.
“저놈을 죽여라! 당장!”
천제현을 둘러싼 십여 명의 진령술사들이 동시에 정령을 소환하여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령 고수도 진령 고수 나름이었다. 진령 8성의 마력을 지닌 천제현의 눈에 그들이 들어올 리 만무했다.
천제현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동안 모든 공격이 그의 몸을 뚫고 지나갔다.
한 차례의 공격이 지나가자 천제현은 독수리가 병아리를 낚아채듯 앞을 막고 있는 술사 두 명을 잡아 천막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혈응왕 앞으로 몇 걸음 다가가 말했다.
“혈응왕, 넌 나를 죽일 수 없다. 아니, 만에 하나 나를 죽일 수 있다 할지라도 이미 늦었다. 매황이 너를 경계한 지 오래라고 들었다. 아직 명분을 찾지 못해 죽이지 못했다지? 이번에는 과연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혈응왕의 주위에 광기 어린 힘이 모이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방금 네가 한 말처럼 이제 장응국이 승리할 가능성은 0이다. 장응국이 천천히 멸망하는 모습을 지켜보느니 나와 손을 잡고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게 좋지 않겠는가?”
휙.
너무 빨라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움직임이었다.
혈응왕의 형체가 핏빛 잔영으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새에 천제현의 코앞에 나타났다. 날카로운 매의 발톱이 음속의 10배에 달하는 속도로 천제현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혈응왕의 실력이 천역 경지에 이르러 있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진령 고수는 이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지 못한다. 천제현의 허공둔이 일격에 산산조각 났다. 다섯 개의 흉포한 발톱이 성광불멸체를 찢고 예리한 기를 날리자 천막이 갈기갈기 찢겼고, 천제현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엄청난 속도다.’
천제현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핏빛 형체로 변한 혈응왕이 어느새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났다. 천제현으로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성광불멸체도 이미 첫 번째 공격으로 찢기지 않았는가. 다만, 천제현의 신체가 워낙 강인한 덕에 중상은 입지 않았다.
물론 이것도 이번 한 번뿐일 것이다. 한 번만 더 이런 공격을 받았다간 방어고 뭐고 아무 의미가 없으리라.
공간도약.
천제현이 하늘로 날아올라 공간 파동 속으로 사라지자 혈응왕의 다음 공격은 무효로 돌아가고 말았다. 매의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혈응왕은 300미터 밖의 한 지점을 포착하고 날개를 펼쳤다. 그의 형체가 번쩍이더니 믿기지 않는 속도로 천제현을 향해 날아갔다.
육안으로는 혈응왕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지만, 신식을 시전한 천제현은 또렷하게 그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천제현은 혈응왕이 거의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른손에 검은 장검을 소환해 검기 몇 줄기를 날려보냈다.
챙!
혈응왕은 어느새 핏빛 칼 한 자루를 꺼내 들고 있었다. 그의 칼은 검기를 자르고도 조금의 영향도 받지 않은 듯 계속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혈응왕이 천역 고수라고는 하나 실력은 아도와 비등할 정도였다. 즉, 천역 술사치고는 수준이 그렇게 높은 건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나 천역 경지와 진령 경지 사이에는 거대한 격차가 존재한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커서 혈응왕이 패할 확률은 0%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는 매신족 혈통의 힘까지 지니고 있지 않은가.
쾅!
천제현과 혈응왕이 부딪히는 순간, 허공에 격렬한 기의 파동이 생겼다. 그 기운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병사들을 휩쓸자 병사들과 말은 엉망진창으로 고꾸라졌다.
일반 병사들은 둘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머리 위에서 울려 퍼지는 천둥 같은 굉음을 들으며 상황을 추측할 뿐이었다. 소리로 보건대 한쪽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 건 아닌 듯했다.
혈응군단의 장수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실 혈응왕 자신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천제현의 실력은 진령 8성에 불과하지 않은가. 진령 9성 정점의 술사라 할지라도 천역 1성과의 격차는 메울 수 없는 것이거늘.
그의 앞에 있는 이 인간족 술사는 마력은 낮을지 몰라도 전투력만은 놀랍도록 강했다.
물론 순수한 실력만 놓고 본다면 혈응왕이 절대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다만 천제현이 지닌 능력이 너무나 다양했다. 신식, 무공, 체질, 이 세 가지 조건이 결합되어 혈응왕을 상대로 수십여 합을 버틴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혈응왕의 공격을 막는 데 불과했지만…….
천제현은 혈응왕의 속도와 힘을 따라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저 신식을 이용해 상대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성광불멸체로 상대의 공격을 막으며 강력한 회복력으로 그럭저럭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정말 안 되겠다 싶으면 공간도약으로 몸을 피했다. 이것이 천제현이 십여 합이나 싸우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진령 술사가 천역 술사와 겨루면서 이렇게 오래 버티다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랑거리가 될 만한 일이었다.
천제현은 물러나면서 소리쳤다.
“장응국은 성공할 수 없다. 매신 혈족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면 장응국의 파멸을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될 것 아니냐!”
혈응왕은 천제현의 말에 다시 한 번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혈응왕의 몸 주변에 작은 마력 파동이 이는가 싶더니 그의 기운이 갑자기 폭증했다.
천역 강자의 진정한 힘이었다.
혈응왕은 동시에 혈통의 힘을 발휘했다.
그러자 그의 속도와 힘이 모두 믿을 수 없을 만큼 증폭되었다. 천제현은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아 공간도약을 이용, 수백 미터 밖으로 물러났다.
그런데 천제현이 제대로 숨조차 돌리지 못했을 때였다.
혈응왕의 형체가 순식간에 일고여덟 개로 늘어나더니 육안으로는 분간하기 힘든 속도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안 돼. 이대로 가다간 지고 만다.’
천제현은 자신이 혈응왕과 겨뤄 승리할 확률이 거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정면대결 말고 다른 수법들도 있지 않은가?
그의 두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변했다.
천제현은 모든 정신력과 신식을 모은 후 폭발시켰다.
무진연옥.
혈응왕은 갑자기 이뤄진 이 공격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1초쯤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고는 피를 토하며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스쳐 지나가듯 짧은 한 순간이었지만, 가상 환경 안에서 오랜 시간 고통을 당한 것이다.
‘쳔역 고수의 정신력은 확실히 엄청나군. 이 가공할 위력의 공격에 당하고도 중상을 입는 데 그치다니.’
하지만 중상 정도면 충분하다.
천제현도 상대를 죽일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혈응왕, 다음에 또 봅시다!”
말을 마친 천제현은 전송두루마리를 꺼냈다. 장수들이 급히 그를 덮쳤으나 그의 형체는 순식간에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돌아온 천제현을 본 심빙우가 다가가 물었다.
“상황이 어때?”
“수확이 있었어요. 하지만 혈응왕을 회유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어쨌든 중상을 입었으니 3~5일 정도는 전면전을 벌이지 않을 거예요. 시간을 번 셈이죠.”
천제현이 대주국 왕성 전송지점에서 걸어나오며 말했다.
“지금 제일 큰 문제는 서해성이에요. 그쪽 문제만 해결되면 숲 연맹을 겨냥한 계획은 큰 차질이 생길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지?”
“이제 곧 흑응군단이 견융초원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이 대주국과 장응국에 퍼질 거예요. 그럼 장응국 군사들의 사기도 크게 떨어지겠죠.”
천제현은 잠깐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장응국에 소문을 퍼뜨려야 해요. 혈응왕이 숲의 연맹과 결탁해서 서해의 주요 정보를 팔아넘기고 있다고요. 혈응왕과 장응국의 매황은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았으니 유언비어가 도는 즉시 뭔가 반응이 나올 거예요. 두 세력이 서로를 견제하는 동안 우리는 준비할 시간을 버는 거죠!”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는 법.
장응국이 위협이 되고 있다고는 하나 최악의 결과라고 해봤자 대주, 대하, 북융 3개 왕국이 함락될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그들이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건 서해족의 동정이었다. 천제현은 직접 서해성에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숲의 세력과 해양종족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니 그것이 이번 여정에 도움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